Here/이탈리아 베네치아

베네치아에서의 나의 시간은 에스프레소처럼 짧고 진했다

난짬뽕 2022. 8. 8.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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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 한 잔

베네치아에서의 이튿날,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는 빗나가지 않았다. 보슬보슬 내리던 여린 빗방울이 정오가 지나자 제법 세찬 빗줄기로 변해 있었다. 

 

6342 A LE TOLE에서 파스타를 먹고 그 맛있는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골목길을 걸었다. 그런데 조금 더 강해진 빗줄기가 자꾸만 바람을 타고 우산 속으로까지 눈치 없어 넘어와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시야에 세 개의 야외 테이블이 놓인 조그마한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위치한, 간판도 없는 카페 내부에는 옆에 내려놓은 여행가방으로 미루어 보아 관광객인 듯한 노부부가 앉아 있었다. 

비와 함께 마시는 에스프레소

나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받아 들고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 지붕의 처마를 방패 삼아 어느 정도 빗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작은 카페였지만 실내에도 몇 개의 테이블이 있어 안에 앉아도 되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나왔다. 아마도 그것은 처마를 톡톡톡 건드리고 있던 빗소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에스프레소 전용 잔인 조그마한 데미타세의 도톰한 묵직함이 이곳에서의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만 같았다. 

약 1천5백 원 정도의 가격이었던 것 같다. 자릿세도 받지 않으신, 연세가 지긋해 보이던 주인 할머니께서 계산을 하는 나에게 환하게 웃으시며 운을 띄우셨다. 

 

내 소중한, 내 사랑아,
꿈꾸어 보아요.

 

그러자, 옆에 계시던 노부부께서 함께 합창을 하셨다. 

 

그곳에서 함께 사는 달콤함을!
한가로이 사랑하고
죽는 날까지 또 사랑할 테요,
그대 닮은 그곳에서!

 

아, 이러면 나도 한마디를 건네야 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다음 마디가~~ 이렇게 고조된 분위기를 깰 수는 없었다. 들으면 알지만, 외우지는 못하는 이 시에서 딱 한 부분만 알고 있던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주인 할머니와 노부부께서 자신들의 손까지 번쩍 들어 올리시면서 함께 외쳐주셨다. 

 

그곳엔 오직 질서와 아름다움,
풍요와 고요 그리고 쾌락뿐

 

고등학교 시절, 우리 학교의 제2외국어 수업은 독일어였다. 그 당시에 나와 친구들은 독일어가 아닌 불어에 빠져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사랑을 고백할 때 가장 아름다운 언어가 바로 '불어'라는 얘기를 해주신 그 시점부터 우리들은 모두 불어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독일어에도 걸음마 수준이었던 우리들이, 입시에 시달리며 불어까지 공부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불어로 시 하나 정도는 외우자는 생각에, 친구들과 함께 엉터리 발음으로 보들레르의 '여행으로의 초대'를 만나게 되었다. 그 시절 오래된 기억 속의 불어 한 조각을 이렇게 꺼내올 수 있다니~~ 여행은 참으로 놀라운 일들의 연속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분들이 아시는 보들레르의 '여행으로의 초대'.  주인 할머니도, 손님이셨던 노부부도 그리고 나 역시 우리는 그곳에서 여행을 통해 서로 다른 기억 속의 추억까지 꺼내보게 되었다. 

가게 명함

추억과 함께했던 에스프레소 한 잔에 몸과 마음이 재충전이 되었다. 이제는 베네치아를 떠나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아쉬운 마음에 산 마르코 광장을 다시 찾았다. 

체스판

어제 잠깐 구경했던 가게가 있었는데,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이 체스판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은 가끔씩 바둑이나 장기, 체스 등을 즐기는 편이다. 아들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 오래된 원목 바둑판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그런 멋스러운 바둑판에 비해 우리 집에 있는 체스판은 휴대용이다. 그래서 멋진 체스판을 보면 늘 시선이 가게 된다. 

체스판

GIOBAGNARA라는 가게에서 보게 된 체스판이었는데,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런데 가격이 너무 비쌌다. 매니저에게 물어보니, 작은 것은 5백만 원에서 시작하여 큰 사이즈는 1천만 원까지 한다고 했다. 

커피메이커

이 커피메이커 역시 몇 백만 원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사진을 찍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아마 이 사진을 보시는 분들은 금방 눈치채셨을 것 같다. 테이블 다리를 보시면, 그 이유를~~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었다. 

수로 위의 조각상

이제 나는 산 마르코 광장과는 점점 더 멀리, 수상버스를 타기 위해 선착장 방향으로 걸어갔다. 사이사이 골목길로 들어서며 조금은 느리게 주변을 구경했다. 

 

오늘의 비 소식으로 인해 어제 여기저기를 알차게 다닌 덕분에, 오늘은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어느 수로를 따라 걷다 보니, 사진 속 조각상이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잠시 서서 한참 동안 바라만 보고 있다가 주위를 보니, 길가에 이름 없는 카페가 있었다.

멋스러운 수로의 모습
수로 벽면에 달린 고리
수로 바로 앞의 카페 테이블에 앉다
카페 앞 수로 모습
한적한 골목의 카페

카페 입구 옆에도 테이블이 몇 개 있었고, 수로 바로 앞쪽에도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놓여 있었다.

카페 안이 서점 같다

북카페처럼 카페 안에는 많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곳의 에스프레소 한 잔 가격 역시 1천5백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산 마르코 광장 주변의 번화가가 아닌 골목길 카페라서 그런지, 이곳에서도 자릿세는 받지 않았다. 

 

나는 커피를 즐겨 마시지만, 커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제대로 마시는 방법들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 내리는 향이 집안 가득 은은하게 퍼지면 왠지 모를 행복함이 느껴진다. 

 

에스프레소를 단번에 마시면 어떻고, 두 번에 나누어 마시면 또 어떠한가. 데미타세를 입가에 대고 향을 먼저 맡으면 어떻고, 크레마를 맛 본 다음에 마시면 또 어떠한가. 설탕을 넣지 않은 채 그대로 마시면 어떻고, 젓지 않은 채 바닥에 가라앉은 설탕을 커피 수저로 조금씩 떠먹으면 또 어떠하리. 

하루에 두번째 마시는 에스프레소

새로운 곳에서의 낯선 풍경 하나가 마음에 들어오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하나둘씩 또렷한 의미가 되어 내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여행의 묘미인 것을. 

 

나는 이곳 베네치아로 떠나 온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나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 주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보들레르의 말처럼 행복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했고, 고요한 가운데 생각의 사치를 누렸던 1박 2일간의 여행.  

 

베네치아에서의 나의 시간은 에스프레소처럼 짧고도 진했다. 

에스프레소 맛에 빠지다

 

♥  커피 한 잔에 담긴 단상 두 스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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