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거래처와의 회의가 있어 외근을 나갔었는데, 마침 남편 회사 근처였다. 나는 업무를 마치고 바로 퇴근하게 되어, 남편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1시간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어 평상시라면 운동 겸 산책 겸 주변을 걸었을 텐데, 한파로 인해 잠시만 바깥바람을 쐬어도 얼굴이 에이는 것 같아 커피숍에 들어갔다.
가끔씩 남편과 함께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에 간 적이 있지만, 이렇게 나 혼자 리저브 바에 앉기는 오랜만이었다. 가방 안에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지난 설날 연휴에 읽으려고 대출한 책이었는데, 아직까지 첫 페이지조차 넘기지 못한 채 반납을 연기해야 할 녀석이었다.
책을 꺼내놓는 순간, 왠지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의 향긋한 부드러움이 마시고 싶어졌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는 커피의 고향으로 불린다. 항상 독특한 개성과 매력 넘치는 풍미를 우리들에게 안겨주는데, 에티오피아 남부 지역인 예가체프 커피의 가장 큰 매력은 아마도 은은한 꽃향기가 아닐까 싶다.
지금 이곳 스타벅스 리저브 바에서는 예가체프 지역에서도 뛰어난 품질로 유명한 첼렐렉투를 선보이고 있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날, 새콤달콤한 라즈베리의 향으로 시작되어 야생 꿀처럼 달콤한 피니시를 상상하며 바리스타의 손놀림을 쳐다보았다. 원두를 갈고 푸어 오버(Pour Over)로 천천히 내려지고 있는 커피 방울들이 이미 내 입안으로 들어와 깔끔하게 절제된 산미 뒤로 숨은 깊은 향기의 여운을 남기는 듯했다.
예가체프는 꽃향기, 과실향, 부드러운 신맛 등의 수식어와 함께 동반된다. 특히 에티오피아 커피 중 가장 세련되었다고 하여 '커피의 귀부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기도 하다. 커피와 함께 나온 리저브 바크 초콜릿을 네 조각으로 잘라 먼저 입에 넣었다. 커피만큼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는 리저브 바크 초콜릿을 만날 때마다 엄청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바람이 매서운 날, 나의 마음속에는 봄의 따스함이 내려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초콜릿 한 조각이 주는 달콤함과 커피 한 모금이 선사하는 여유로움이 내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주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복잡했던 나의 머릿속 궤도를 단순 명료하게 만들어 주었다.
생활하다 보니, 힘은 빼고 싶다고 빠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잔뜩 경직되었던 몸과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힘이 빠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힘을 빼면 조금 더 자연스럽고, 날 선 시선 역시 부드러워지며, 조금은 욕심을 덜어낼 수 있어 편안한 포용이 가능하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커피 한 모금과 초콜릿 한 조각에 내 안에 맴돌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간 탓인지, 남편을 기다리는 이 시간이 마냥 즐겁게 느껴졌다. 빵빵하게 부푼 풍선의 바람이 맥없이 빠져버리듯, 나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자 허리가 올곧게 펴졌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퇴근을 하는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읽던 책을 가방에 넣으려는 순간, 그 짧은 시간에 거의 한 권을 다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주에 대출하여 첫 페이지도 펼쳐 보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단숨에 책 속으로 빠져들어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느껴졌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던 것을. 내가 오늘 읽은 책은 재밌게 읽기에는 조금 거리가 먼, 나의 역량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이론서였다. 잘 모르는 용어들과 읽고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는데도, 뭐가 즐거웠는지 나는 책장을 넘기면서도 웃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시간들 안에서 나는 힘을 뺏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의도해서 스스로 힘을 빼야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나를 둘러싼 힘이 빠졌던 것. 주사를 맞을 때도 힘을 빼야 하고, 운동을 할 때도 늘 힘을 빼라고 한다. 수영을 할 때도 힘을 빼야 물에 잘 뜰 수 있고, 피아노를 연주할 때도 힘을 빼야 오롯이 음악에 집중할 수 있다.
내일이면, 설날 연휴를 보내고 나서 맞이하는 첫 주말이다. 새해를 맞이하고, 보다 더 나은 한해를 위한 계획과 다짐으로 인해 그 사이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힘이 많이 들어간 순간들은 아니었을까. 이번 주말에는 모두들 견고하게 맞물린 힘을 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어느 정도 적절하게 힘을 빼야 오래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껴둔 힘을 어느 한순간에 강하게 쏟아내야 할 때가 있다. 그 중요한 순간을 위해, 힘을 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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