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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아름다움/책

성해나 소설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이어지고 버텨내는 풍경들 안에서

by 난짬뽕 2026.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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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 지은이: 성해나
  • 초판 1쇄 발행: 2025년 3월 19일
  • 펴낸곳: (주)위즈덤하우스

 

 

창밖으로 느티나무가 보이는 것만으로

나는 늘 이 자리가 좋았다.

이 자리에서 나는 '차경'을 배웠다.

경치를 빌린다는 뜻의 차경은

건축학과에서 '과제' 다음으로

자주 쓰이는 단어 중 하나였다.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는데, 

뭉게구름이 방향을 바꾸며 흘러가고,

나무는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고,

겨울에는 눈이 조용히 쌓이는

이 창가 자리에서

풍경은 소유가 아니라 잠시 빌리는 것이며

그 누림이 건축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 50-51

 

 

흔들려도 괜찮다고,

이 순간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성해나 작가의 소설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는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으로 출간된 작품이다. 작가는 홀로 경주 여행을 다녀온 뒤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첨성대와 금관총, 봉황대 등은 고스란히 이 소설의 배경이 되었다. 

여행 중 산책하면서 만나게 된 고분에 뿌리내린 은행나무들을 보면서 고분 아래 깊숙이 뿌리내리기까지 나무는 어떤 세월을 견뎠을까, 그리고 이곳에 터를 잡은 이들은 삶에 어떤 나이테를 새겼을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는 그 오래된 풍경 안에서 우리들의 삶이 함께 이어지고 버텨냈던 세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건축학과에 재학 중인 재서와 이본은 방학을 맞아 문 교수의 서머스쿨에 참가하게 된다. 두 사람은 문 교수의 과제를 받아 경주로 떠나고, 그곳에서 지어진 지 이백 년 된 낡은 고택을 만나게 된다. 집을 고쳐서 다시 쓰기를 원하는 집주인의 의사와는 다르게 두 학생은 기둥과 보를 무너트리고 주요 구조부를 철근으로 재시공하는 방법을 제시하게 되는데..... 

얼마 전 면천읍성에 갔다가 아주 오래된 은행나무를 봤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경이로운 그 나무는 세월을 인내하고 버텨낸 흔적이 보는 이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수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눈보라에 움츠러들곤 하는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자연은 말한다. 흔들려도 괜찮다고. 휘어지면 어떠냐고. 이 순간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성해나 작가의 이 짧은 소설이 긴 여운을 주고 있는 듯하다.

 

책 속에서 마음이 멈춘 문장들

비름이 말이야. 잡초지만 신통해. 영양분을 끌어모아서 농사를 돕거든. 땅에서 난 것들은 다 쓸모가 있어. 쓸모를 찾는 건 그 땅에 머무는 사람들이고.  p 75-76

사람의 수명을 백 년이라 가정할 때,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어야 비로소 천 년이 흐르는 셈입니다. 참으로 아득한 세월이지요? 이 탑은 그보다 긴 세월을 버텨주었어요. 흔들리기도 하고 기울어지기도 하면서요. 대견하지 않습니까? 재건이나 복원을 거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은 첨성대뿐이라고 부연하며 할아버지는 이본과 눈을 맞추었다.  p 88

줄기가 굵고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가 고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한 그루가 아닌 제법 많은 나무가 고분 둘레를 따라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다. 어림잡아 수령이 수백 년은 될 법한 나무들. 가지에서 줄기를 따라 고분으로 떨어지는 환한 빛줄기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는 동안에도 이어지고 버텨내는 것. 그것을 상기하며 나무를 응시했다.  p 94

현실적인 어려움은 건축가보다 공간에 정주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아. 건축이란 건 설계도 안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 항상 그 바깥에서 이뤄지니까, 정면으로 부딪혀야 할 때도 있지만 타협할 때도 있고 경청해야 할 때도 있는 거야.  p 101-102

높고 낮고 완만하다 굽이치며 험준하다가도 부드러워지는 선들. 건축이 무언지 자문하고 자책하면서도, 연필을 잡고 제도 선을 잇다 보면 늘 무언가 만들어져 있었고, 거창하고 근사하진 않아도 두껍고 얇은 선들을 한데 연결하다 보면 다음에 해야 할 게 무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가늘지만 끊기지 않는 선을 마음속에 고이 그려보았다. 이 선도 조금씩 잇다 보면 언젠가 둥글게 연결된 등고선이 되겠지. 그렇게 우리가 포기 없이 오래, 아주 오래 이어갈 것들을 떠올렸다.  p 110

 

성해나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이 있다. 젊은작가상, 이효석문학상, 김만중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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