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면
이시영
날이 저문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한잔 해야지
붉은 얼굴로 나서고 싶다
슬픔은 아직 우리들의 것
바람을 피하면 또 바람
모래를 퍼내면 또 모래
앞이 막히면 또 한잔 해야지
타는 눈으로 나아가고 싶다
목마른 가슴은 아직 우리들의 것
어둠이 내리면 어둠으로 맞서고
노여울 때는 하늘 보고 걸었다
이시영..... 1949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됐고, 월간문학 신인작품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80년 창작과비평 편집장으로 입사해 24년 동안 주간, 부사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 <만월> <바람 속으로> <길은 멀다 친구여> <이슬 맺힌 노래> <무늬> <사이> <은빛 호각> <바다호수>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등의 시집을 발간했다.
지난 금요일 오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고 집중을 해서 해야 할 일들을 오전시간에 거의 처리했다. 이제 오후에 마무리만 지으면 되는 상황인지라, 가벼운 마음으로 점심을 먹고 한 시간가량의 회의를 마친 후 자리에 앉았다. 일을 빨리 끝내고자 하는 마음은 월요일 월차를 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작성하던 업무 파일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오전내내 진도를 나갔던 세부사항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채, 처음에 세워놓은 뼈대가 되는 항목들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아,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아예 파일이 삭제되어 있었다면 더 이해가 갔겠지만, 이 황당한 경우는 또 무엇인지 갑자기 힘이 쭉 빠져버렸다.
너무 급하게 서둘러서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일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원인을 찾는 것보다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어이없는 상황을 자초한 내 자신을 향해 예전 같았으면 화가 나고 기분이 상했을 텐데, 조금 힘은 빠졌지만 그렇다고 하여 최악의 기분까지는 들지 않았다.
다시 생각을 가다듬고 집중을 하자, 오히려 오전에 작성한 내용보다 더욱 정리된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떠오른다. 조급하거나 들뜬 마음에 실수가 나오기도 하고,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을 잘 매듭짓고는, 오늘 일에 대해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퇴근길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고생했다면서 저녁으로 치킨을 사 오겠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니, 나보다 먼저 온 남편이 식탁 위에 치킨과 함께 작은 파운드케이크까지 접시에 차려놓고 있었다. 뭐 어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오늘도 꽤 괜찮았던 하루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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