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너머/짧은 만남, 긴 여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시인과 촌장 가시나무

난짬뽕 2021. 6. 18. 13:21
728x90
반응형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시인과 촌장  <가시나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라는 낯익은 가사가 길을 걷고 있는 저를 멈추게 합니다. 그 노래를 처음 듣게 된 것이 언제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할 수 없었지만, 가끔씩 무의식적으로 그 구절을 읊조리고 있는 제 자신을 종종 발견하고는 했습니다. 여느 유행 가사와는 다른, 마치 세상과 멀리 떨어진 인적이 드문 조용한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제 자신을 향해 행하는 고해성사처럼 그 가사는 이미 노래,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가시나무>. 말하지 못할 어떤 아픔을 업고 살아가기에 그 나무는 다른 사람들의 손길을 거부하며 온몸에 가시로 된 옷을 입고 있어야만 했을까요.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굴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가시나무를 지켜보는 숲의 모든 친구들 역시 어설픈 위로조차 건넬 수는 없었지만, 바로 앞의 노송만은 가시나무의 아픔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몸을 바쳐 아름다운 빛을 선사하는 양초는 그래도 언제나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있지만, '너도밤나무과의 상록 활엽 교목'이라는 딱딱한 이름을 지닌 가시나무는 그 몸이 가구재로 땔감으로 용이하게 쓰이는 목재이면서도, 더욱이 그 열매는 '가시'라 하여 식용까지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한 번도 따뜻한 시선조차 들려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가시나무는 마음이 너무나 외로워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그 떨리는 몸을 녹이기 위해 남향의 골짜기에서만 자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1년 전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 사진 양우성

 

21년 전 3월, 경칩이 지난 봄날에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으로 한 그루의 가시나무가 옮겨졌습니다. 월요일인 6일부터 11일 토요일까지, 그리고 주말 늦은 저녁에는 다시 그곳 남향의 골짜기로 되돌아가는 그 짧은 외출 동안, 가시나무는 조금은 환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매년 봄이 되면 그 숲에서 황갈색 꽃을 피우듯, 그해 봄에는 이곳 서울의 공연장에서 피운 그 꽃향기로 우리들을 아름답게 마취시킬 지도, 그래서 황량하게 시작되었던 우리들의 그 한 해가 조금은 촉촉한 사랑스러움으로 물들어 가는 그런 풍경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했었습니다.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그런 자유가 그리워질 때면 저는 으레 양희은의 <한계령>을 아주 조그마한 속삭임으로 토해내놓곤 했습니다. 아주 가끔씩은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라며, 때로는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와 이 노래의 가사를 서로 섞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들은 마치 그것이 하나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가사의 이어짐이나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 더욱이 그 온화한 침묵 속에서도 가슴을 시리게 가르는 냉정한 자기 성찰이 이들 노래 안에는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잘 몰랐었습니다. 가수 양희은이 부른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이 바로 <가시나무>를 부른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느 날 TV를 통해 우연히 흘러나온 뮤직비디오 한 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설원이 우거진 어느 곳에서의 유명한 배우들의 화려한 연기. 그들 뒤에서 잔잔하게 스며드는 42인조 오케스트라가 꾸미는 또 하나의 미성 앞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갈망하던 그 만남을 듣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다른, 마치 너무나 멋있는 초호화 극장에서 세련된 이미지의 주인공이 펼쳐놓는 아주 완벽한 시대적 흐름의 한 단편이었습니다. 그 당시 선보인 이은미와 남성 듀엣 유리상자의 이 노래를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 만난 조성모의 이 노래 옆에서, 저는 시인과 촌장의 그 노래를 떠올렸습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배어 나오는 <가시나무>. 많은 사람들에게 저는 그들의 이 노래를 한 번만이라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재회, 시인과 촌장

채 일주일도 허락되어 있지 않은 공연장에서의 만남 이후, 우연히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덕규와 함춘호라는 이름과 함께 동반된 가눌 수 없는 아주 오래간만의 설렘을 억누르며, 저는 그들을 장식할 화려한 수식어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그 사고의 마지막까지 다른 어떠한 형용사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 대명사 밖에는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시인과 촌장>,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러한 수식어를 생각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설명이, 보다 나은 덧붙임의 치장도 필요 없이 오직 그 모습 그대로만으로도 너무나 큰 아름다움을 그들은 이미 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바로 <시인과 촌장>, 그 이름으로 말입니다. 

"삶이 여행이라면, 음악은 그 여정의 또 다른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그들이 말한 그 여행의 어느 한 곳에서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그래서 그들과의 이 해후가 이처럼 반가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인과 촌장 - 다시 만난 이야기 <풍경>>이라는 공연명처럼, 시인 하덕규와 촌장 함춘호의 만남은 그 당시 2번의 정규 앨범과 10여 회에 이르는 프로젝트 앨범 사이에서 참으로 오래간만이었습니다. 서로 묶이지 않아 더욱 자연스러우면서도 그 어울림으로 인해 가장 밝게 빛나는 이들이 바로 <시인과 촌장>, 그들이 아니었을까요. 

 

"많이 달라졌죠. 언제나 같은 모습이기를 바라지만, 굳이 <시인과 촌장>이라는 그 색깔만을 고집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서 그 가치관이 변하듯, 세상을 보는 진리도 달라지니까요. 물론 때로는 그러한 것에 대해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추상화 같은 거잖아요. 보는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느냐, 노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 시대에 맞게, 젊은이들의 표현에 맞게, 듣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그들 나름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21세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질까,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모르는 것이 없는 지식인,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성공한 사람들 등,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비록 지쳐 있어도 가슴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마음이 따뜻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게 말이에요. 아마도 저희들 음악의 색깔은 바로 그즈음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음반을 출시해 놓고도 그것을 잘 듣지 않는 채 그대로 내버려 두는 성격의 하덕규에게 이 노래만큼은 예외였다고 합니다. <가시나무>. 마치 산고를 느끼듯 태어난 이 노래를 녹음한 것은 그 당시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는 함춘호의 스물 다섯 기억 속으로 더듬어집니다. 15년간의 세션 활동 동안 일 년에 천장이 넘는 연주 참여 앨범까지, 그의 기타 연주를 듣고 자신의 미래를 음악 안으로 바꾼 연주인들 또한 적지 않을 만큼, 그는 기타 연주에 있어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그때 함춘호는 공연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두려워지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는 말을 건넸습니다. 은근히 부담도 적지 않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연하는 곳이 참 예쁜 극장이니, 많은 분들이 오셔서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고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비췄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어느 봄날 늦은 저녁으로의 초대장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놓았던 것 같습니다. 

 

21년 전 <시인과 촌장>의 함춘호 / 사진 양우성

 

The Bridge, 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발표했던 앨범은 그 시절 그들의 공연과 함께 어우러질 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1986년 <푸른 돛> 이후 14년 만에 선보인 <The Bridge>의 모든 곡은 하덕규에 의해 그리고 함춘호는 편곡과 어쿠스틱, 일렉트릭 기타, E-Bow를 연주, 서정적이면서도 깔끔한 어쿠스틱 포크 음악과 포크에 바탕을 둔 얼터너티브와 프로그래시브 성격이 강한 포크록을 들려주었습니다. 특히 이들 시인과 촌장과 함께 우리 대중음악 세션계에서 최고의 팀으로 불리는 조동익, 김영석, 박용준이 각각 베이스와 드럼, 건반 세션으로 참여한 것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이 앨범은 두 장의 연작 앨범으로 나뉘어 발표되었는데, 첫 번째 앨범은 20세기를 되돌아보는 성격이 강한 회고적인 성격이 짙은 곡들과 사람들에 대한 얘기, 자아성찰적인 곡들이 담겨 있고, 두 번째 앨범은 시인들에 대한 노래들과 21세기에 대한 생각들 등이 전체적으로 '다리'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앨범의 처음과 끝은 모두 '다리 #1/ 다리 #2'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리 #1'은 감성 어린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 이 앨범의 주제를 생가하면서, 그 고민의 대답을 '다리 #2'로 담아내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깨어진 사이사이에 사랑의 다리가 놓였으면 해요."

 

그들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일상과 내면적 갈등 속에 <시인과 촌장>은 마음의 다리를 띄우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여유롭게, 조금 더 아름답게, 조금 더 행복하게, 그렇게 스스로를 향해 건너가는 그 다리 위에서 잠시 올려다본 하늘 저쪽에서 일곱 빛깔 무지개가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불현듯 20여 년이 더 지난 즈음에 갑자기 <가시나무> 노래가 떠오른 것은 아마도 요즈음 제 안에 제가 너무도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비 내리는 날의 이야기

 

커피, 달콤하고도 씁쓸한 감정이 보내는 신호들

커피, 달콤하고도 씁쓸한 감정이 보내는 신호들 커피 한 잔을 마주한 채 앉아 있는 우리들의 삶은 현재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매혹적인 맛과 향미가 부드러운 입맞춤처럼 달콤한 인연을 떠올리

breezehu.tistory.com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