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다, 듣게 한다, 그러나 듣는다 / DJ 배철수

 

어느 해, 어느 달 <목소리>라는 주제로 연극배우 박정자, '옛 시인의 노래'를 부른 가수 한경애, 그리고 어릴 적 친구였던 삐삐의 성우 주희, 멀더와 스컬리의 성우 이규화와 서혜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또 한 사람, 목소리 하면 빠질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지요. 바로 DJ로서의 배철수입니다. 그들의 목소리에 빠져들었고,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 카리스마에 마음이 저리기도 했습니다. 1999년, 아주 오래전에 만난 배철수 진행자와의 목소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들리다, 듣게 한다, 그러나 듣는다

DJ 배철수

 

 

하루에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목소리들에 취한 채 무심코 잠들곤 한다. 그 침묵의 짧은 휴면기 동안 그들은 자신들에게 스쳐간 수많은 울림들을 지워버리기 위해 고민하기도 하고, 때로는 냉정한 자정작용으로 삭제해 버리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도 남아 있는 작은 기억들. DJ 배철수의 모습은 언제나 바로 그 기억의 연장선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 정진성

 

인간 언어의 기본 형태가 음성으로 전달되는 소리말. 그 사람의 말소리를 연구하는 음성학에 의하면, 단지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 또는 교양이나 직업까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만큼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각인각색 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목소리 자체만으로 좋고 나쁨이 평가되기보다는, 듣는 상대방에게 어떠한 인상으로 전이되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때 영상 매체에 밀려 제 나름의 매력을 과시하지 못했던 라디오. 부족한 채널 수와 청소년 취향의 편협한 음악 선곡, 더욱이 지루한 신변잡기식의 말장난으로 외면받았던 라디오가 1천만 대 이상으로 급증한 자동차 문화로 인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에 따라 화려한 독주를 계속했던 MBC를 비롯한 KBS와 SBS의 한판승은 더욱더 치열해지는 가운데, 각 방송사는 그들 나름대로의 차별화를 도모하고 있는 듯하다. 손숙 · 김승현, 강석 · 김혜영, 이종환 · 최유라 등 관록을 자랑하는 콤비 플레이어의 MBC는 이러한 커플 진행자를 바탕으로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는가 하면, KBS는 자사 아나운서를 적극 활용함에 따라 참신하면서도 안정된 인상을 가미하고 있다. 반면 가장 늦게 출발한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약진을 과시하고 있는 SBS는 신세대 특유의 발랄함이 돋보인다.

 

때때로 혹은 매일, 우리는 그들을 같은 장소에서나 또는 가끔씩은 서로 다른 공간 속에서 무소유적인 공유를 실행한다. 똑같은 시간, 일정한 위치의 채널 그 안에서 마주치게 되는 낯익은 목소리.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이러한 수많은 청각적 자극제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혹은 어떠한 이유에서 들어야만 하는 의무감에 휩쓸려 그들과의 공생은 반복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능동의 의미가 배제된 피동과 사동의 개념이다. 숫자를 떠올리며 재생시키는 주파수의 하위 개념 안에 DJ가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예외다. 우리들의 뇌리 속에 그의 목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를 떠올리게 하는 또 하나의 각인체로서 우리들의 사고와 행동에 너무나도 깊게 인식되어 있다. 그것은 곧 들려지기 때문에 수용할 수밖에 없는, 더욱이 듣도록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강제도 아니다.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선택하는 것,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통해 배철수를 느낀다. 그것은 바로 '듣는다'라는 능동의 의미인 것이다. 

 

ON AIR 10년 - 배철수의 음악캠프

"자유로움요. 그것이 바로 제 방송의 색깔일 것입니다. 이미 그릇에 담겨 있는 요리, 그래서 그 맛만 보면 되는 그러한 고정적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죠. 기본적인 양념은 마련해 두되, 대부분의 재료는 청취자와 함께 하는 호흡으로 그때마다 준비합니다. 물론 메뉴 역시 그 날의 분위기에 맞춰 요리하죠."

 

시계는 정각 2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루를 단위로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2시간 동안의 숨 가쁜 어울림에서 조금은 여유로워진 것 같다. 어느덧 10년, 단일 프로그램으로는 최장수 DJ. 방송을 끝내고 스튜디오를 나서는 그의 손에는 보통의 진행자와는 달리, 구성안이 적힌 메모지 한 장 눈에 띄지 않았다. 

 

"그 날의 선곡은 방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루어지죠. 청취자들께서 보내시는 팩스나 전화, 혹은 금방 틀어놓은 음악을 들으면서 연상되는 또 다른 곡들··· 그래서인지 저희들의 2시간은 한치의 여유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멘트요? 음악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따로 있는데, 굳이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할까요? 방송을 처음 시작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방송시간보다 한 시간 전에 스튜디오에 들어가 있으려고 노력해요. 청취자들의 엽서를 읽어 보고, 그 날의 분위기에 맞는 음악들을 선곡하면서 항상 보다 좋은 곡들을 들려드리기 위해 고민하죠.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그 시간을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프로그램이 다 그러하겠지만, 정작 주가 되어야 할 것은 음악이기 때문이죠. 멘트는 사연에 따라, 또 그때의 상황에 따라 부수적으로 곁들여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너무 많은 말은 자칫 프로그램의 방향을 흐릴 우려가 초래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방송 중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의 군살도 느껴지지 않은 채, 화려하게 치장하려는 작은 미사 어구에게까지 역시 인색하기만 하다. 그런데 최대한으로 자제된 그의 어휘 사용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작은 여운의 위력은 어디로부터 발산되는 것일까. 

 

"좀 투박하죠? 어떤 사람들은 제 목소리에서 막걸리 냄새가 난다고 말하더군요. 사람의 목소리도 하나의 주파수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좋은 어휘만을 사용한 문장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귀가 거부감을 느끼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오래 듣고 있노라면 생리학적으로 짜증이 나는 음성도 있잖아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두가 선천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는 없겠지만 말이에요. 그런 걸 보면, 저는 행운아인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제 목소리가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하. 아뇨. 그것이 아니라, 저의 모습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뜻이죠."

 

그 말에 나 또한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그의 냄새가 나고, 배철수라는 그에게서는 그만의 목소리가 자연적으로 그려진다. 물론 그의 얼굴이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한 사람과 그 안에서 자아내어지는 목소리가 등식으로 느껴지는 이 경우가 말이다. 또한 그 둘이 하나로 묶어져 생각되는 것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 이미 배철수라는 인물에 대해 익숙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생각을 돌려봐도, 그의 목소리는 역시 그답다, 라는 명제로 종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음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음-음' 하는, 혹은 스타카토로 처리되는 '예-예'라는 의성어 또는 짧은 대답의 어투는 물론 청취자와 나누는 전화 데이트에서의 따뜻함과 겉으로는 무뚝뚝한 것 같은, 그러나 그 경계 뒤로 자꾸만 빠져드는 듯한 묘한 끌림과 깊이가 그의 목소리를 통해 전이된다. 

 

"어느 순간,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무심코 던진 말에 대한 책임감. 특히 청소년 시절에는 어느 누군가에 의한 불특정 대상으로부터 쉽게 영향을 받곤 하죠. 저의 방송의 청취자 중 일부는 학생들도 많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인위적으로 말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방송이 청취자를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1년 365번의 만남. 그 시간 동안 나누는 수많은 얘기들 속에, 때로는 제가 무슨 내용을 토대로 말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죠. 그날그날의 방송에 최선을 다할 뿐, 방송이 끝나고 나면 다시 그날을 기억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속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정직하지 않게 방송을 하면 청취자들이 더 먼저 외면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아는 것만 말하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자문을 얻기도 하고요. 들어보지 않은 음악을 마치 너무나도 잘 아는 것처럼, 그냥 다른 사람이 알려준 대로 그대로 읊조리기는 정말 싫습니다."

 

그래서 역시 그의 신조는 '정직하고 솔직하게 방송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만 9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PD만도 9명, 방송시간 역시 처음 큐 사인이 들어갔던 20시에서 한 시간이 앞당겨지기도 했고, 지금은 그보다 빠른 18시에 그를 만날 수 있다. 10대로 편중되었던 초기의 청취자 분포는 이제 20대와 30대, 그리고 그들의 부모까지 함께 즐길 만큼 연령층이 확대된 것도 큰 변화일 것이다. 문득 그의 음악이 떠올랐다. 78년 대학가요제와 해변가요제를 열광케 만든, 그 뒤 10년을 80년대 최고의 록그룹으로 군림한 <송골매>. 그들의 노래는 여전히 우리들의 애창곡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지금의 모습으로 불려지는 그의 노래는 언제부턴가 만날 수 없었다. 

 

"방송은 매일 먹는 밥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굳이 방송만을 위주로 듣는다기 보다는 다른 일을 병행하면서 일상적으로 틀어 놓는 경우가 일반적이잖아요. 반면 음악은 좋아하는 사람만이 열정적으로 빠질 수 있는 기호식품이고요. 90년대 초반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일까요. 모든 것을 남과 다르게 생각하려는 시각을 갖고자 노력했죠. 음악을 했던 그 시절,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들이 방송을 준비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답니다. 그러나 노래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다만 더 좋은 방송 진행을 위해 많은 것을 배우고자 노력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답니다."

 

 

나의 오래전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가수로서의 그를 오늘 DJ로, 그러나 역시 그러한 수식어를 모두 배제한 채 '배철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건넨 환한 웃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예전에는 하찮게 여겨졌던 일들, 그것을 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작게만 느껴졌던 일들이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 보니 정말로 가장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희망이었던 것 같더군요. 지금요? 내일을 오늘같이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저의 꿈입니다."

 

몇 가닥 눈에 띄는 흰머리카락이 더 멋있어 보이는 불혹의 고개를 넘은, 그러나 여전히 '오빠'라는 대명사가 가장 잘 어울리는 DJ 아저씨. 나는 내일 또다시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들려올 그의 목소리 주파수에 이미 예약을 마친 상태였다. 

Vol. 56 APRIL 1999 IN Seoul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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