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너머/짧은 만남, 긴 여운

그들의 180초, 이미 5라운드는 시작되고 있었다

난짬뽕 2021. 7. 2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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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180초, 이미 5라운드는 시작되고 있었다

<규철 권투 체육관>의 챔피언들

 

 

오래전 잊고 지냈던 꿈 하나를, 나는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무표정한 침묵으로 온몸을 흥건히 젖신 땀방울을 밀쳐내는 그들의 눈동자가,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해져 너무나 쉽게 무감각해버린 작은 희망들을 깨우고 있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려가고 있는 그들의 목표는 비록 한 가지 색깔의 형상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또 다른 이름으로서의 자신감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도 눈여겨보아주지 않는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 그들 모두는 <규철 권투 체육관>이라는 이 하나의 응결체 안에서 자신들의 작은 꿈들을 그렇게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정진성

 

1994년 9월, 일본에서 열린 WBA. Jr. 밴텀급 세계 챔피언 결정전에 모인 1만 9천여 명의 관중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중 1만 5천여 명에 달하는 일본의 여성팬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7차 방어 앞에서 무릎이 꿇린 자신들의 영웅인 오니즈카 카쓰야를 위한 작은 격려의 표시였으며, 그를 너무나도 당당히 쓰러뜨린 한국의 도전자에 대해 굳이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던 또 다른 모습으로의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하나 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모든 조명들이 꺼져갈 즈음까지 그 링 위에는 몇몇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상대방과의 대전이 결정된 후, 그들은 매스컴의 시야를 벗어나 이곳 일본을 무려 3번이나 방문하여 챔피언 오니즈카 카쓰야의 모든 경기 모습과 연습 내용을 상세히 분석하고 또다시 해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굳게 약속했다. 이곳을 다시 찾게 되었을 때에는 반드시 이 경기장을 자신들의 축제로 만들 것이라는. 그리고 그때 긴장을 감추지 못하던 제자 이형철을 향해, 그의 사범이 말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다 너의 팬인 것이다!"

 

그리고 그 며칠 후 그들이 챔피언 벨트를 안고 귀국했을 때, 많은 세인들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잔잔한 미소를 띄며 자리를 떠나는 한 노신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린 선수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 가라앉혀 줌으로써 최상의 플레이를 구사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으며, 그 영광의 감격이 전이될 즈음 어느새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묵묵히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그는 바로 김규철(63) 사범이었다. 

 

왕십리에 자리한 한국 복싱의 산실

"그렇지. 모두가 내 자식들인데, 누구 하나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런데 말이야, 정말 너무나도 착한 녀석이었는데 내가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해서 마음이 아픈 선수가 있어. 1973년도인가, 일본으로부터 한국 최초로 50kg 800g인 플라이급 동양챔피언 타이틀을 빼앗아 온 주인공이었지. 아주 진념이 강했어. 

한 번은 덴마크에서 시합이 있었는데, 체중을 조절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 하루에 주스 한 잔밖에 말이야. 숙소에서 잠을 자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어머니도 아니고 할머니를 부르면서 괴로워하잖아. 그걸 옆에서 지켜볼 수가 없어서, 그 밤에 무작정 숙소를 나왔어. 

 

다음날 개체량 장소로 가는데, 그만 홍수는 탈진이 된 상태여서 코치가 업고 가더라고. 내가 멀리서 헛기침을 했지. 그 소리를 들었는지, 힘이 빠질대로 빠진 그 녀석이 나를 의식해서였는지 코치 등에서 내려오더라고. 물론 실력도 있었지. 동양 챔피언으로 그치기에는 아까운 선수였어.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었거든. 그런데 내가 기회를 제대로 마련해 주지 못한 것 같아. 그것이 지금까지 너무나도 미안하다고. 양홍수. 홍수, 그 녀석만 생각하면 말이야."

 

오후 2시. 그리 화려하지 않은 이 작은 체육관의 하루는 달력의 빨간 숫자를 제외한 모든 날들에게 어김없이 찾아든다. 그래서인지 몇몇 상가가 함께 자리한 이 건물 2층에서는 일 년 내내 젊은이들이 뿜어내는 열기만으로도 꽤나 분주한 듯하다. 

 

"스물여덟 살에 은퇴했지.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거든. 그리고는 명동에서 곧바로 인쇄업을 시작했어. 그런데 말이야. 어쩔 수가 없었어. 나의 모든 마음이 링을 향하고 있었던 거지, 뭐야. 그래서 1965년부터 인쇄업과 함께 매니저 일을 하게 됐지. 처음에는 하고 싶은 마음 하나 때문에 겸업을 하게 됐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내가 너무 이쪽에 소홀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후배를 키우고 싶었거든. 그래서 체육관을 열게 된 거야, 1977년에."

 

1955년 전국 신인 선수권대회 우승, 서독에서 열린 세계 군인 선수권대회 은메달 획득. 김규철 관장의 경력은 권투 애호가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만한 이름의 그의 제자 김태식과 이형철, 양홍수 선수만큼이나 화려했다.

 

"열두 살 때였어. 친구들과 동네 권투를 하고 있었는데, 미군이 와서는 먼저 코피를 터뜨리는 사람한테 초콜릿을 준다고 하잖아. 그때부터 권투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아.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체육관이라는 곳에 가 보았지. 서울에 있는 <일성 체육관>이었어. 생각나지, 고봉아 관장님. 선생님은 한쪽 다리가 불편하셔서 목발을 짚고 다니셨는데, 링에 오르셔서는 한쪽 다리로 연습 상대가 되어 주셨어. 

 

 

나? 내가 좋으니까 이렇게 지내는 거지, 뭐. 젊은 시절 내 모든 것을 바쳐 도전했고, 그리고 지금도 변치 않고 사랑하는 내 권투를 위해서 말이야. 정말 많이들 부러워했지.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우리 체육관은 정말 톱선수들의 장이었거든. 그런데 말이야. 세계 챔피언은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하나의 추억거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권투는 어느 정도의 나이가 들면 할 수 없는 운동이야. 그렇다면 그 이후에 사회에 나가서 어떠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꿈을 실현시키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겠어. 우리 애들? 하하, 그 얘들이 항상 이렇게 말한다고. 우리들은 남을 때리기 위해 기술을 배우지만, 그것은 링 안에서만의 일이라고 말이야.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야."

 

탤런트 최재성과 천호진 역시 이곳 출신이다. 그때 하루도 빠짐없이 던진 그의 한마디는 항상 '얼굴 조심'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난, 한국 최초의 라운드 걸을 바로 김규철 관장이 도입했다는 사실을 언젠가 들은 기억이 났다. 

 

"내가 명동에서 인쇄업을 했다고 했지. 그때 우리 가게 옆에 양장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아가씨였어. 아마도 1971년이지. 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는데, 양장점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학비를 스스로 마련했어. 그때 라운드 걸을 설명 하면서 주위에서 권유하게 되었지. 그게 우리나라 최초였던 거야."

 

하루 종일, 3분 땡! 1분 땡!

몸풀기를 시작으로 줄넘기 3R을 비롯해 링 8R, 백치기 6R, 링 2R, 위밍 2R, 로드윅, 줄넘기 3R, 체력훈련 그리고 다시 몸풀기. 체육관을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흑칠판에는 이러한 연습과정이 적혀 있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경기장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벨 소리가 일정한 간격에 따라 울리고 있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그것은 매번 3분과 1분 그리고 다시 3분으로 이어졌다. 아마도 프로대회의 1라운드 경기 시간이 3분, 그리고 휴식 시간을 의미하는 1분이었던 것 같았다. 또한 더욱 특이했던 것은 금방 가수 김현정이 부르는 댄스 음악이 들려오는가 하면, 조금 느려진 트롯가요가, 그리고 어느 사이에 팝송에 이어 클래식으로 음악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의 의아함에 강승엽 코치(33)가 설명을 덧붙였다. 

"각기 다른 리듬에 맞춰 몸의 유연성을 기르기 위한 거죠. 서로 다른 장르에 따라 연습 스타일이나 강도에 있어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때로는 부드러우면서도 완만하게, 그리고 점차 빠르면서 힘 있게, 그것 모두가 다 연습을 위한 하나의 도구들이죠."

 

김규철 관장의 제자인 그 또한 80년대에 운동을 시작하여 전국 학생 신인선수권 준우승, 1997년 신인왕 장려상을 수상한 바 있는, 선수생활만 10년을 채운 베테랑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죠. 김태식 선수의 경기 모습을 보고 한눈에 매료되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 선수를 보기 위해 재미 삼아 놀러 오게 된 거죠. 그 선배가 이 체육관 소속이었거든요. 글쎄요. 아직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지는 못할 것 같군요. 다만 선수 시절에는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됐는데, 지금에는 각 선수마다의 특기를 찾아내고, 또 그에 따라 새로운 기술들을 함께 개발해줘야 하는 것의 차이가 있죠. 더 부담스러운 것 같아요, 지금이."

 

그 부담 때문이었을까. 강승엽 코치는 한 일 년간 잠시 이곳을 떠났었다. 

 

"미련이 남았었나 봐요. 이 세계에 대한. 그래도 코치 생활을 하면서 너무나 많은 행운을 만났었죠. 신인왕 성양수를, 한국 챔피언인 김태형과 세계 챔피언인 이형철까지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동양 챔피언을 길러내지 못했던 겁니다."

 

그때 큰 운동가방을 어깨에 걸친 한 선수가 들어서며 우리들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보통 사람들보다 강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던 그 선수는 바로 신인왕을 거머쥔, 그리고 지금은 세계 무대를 목표로 연습하고 있는 예비 챔피언이라 했다. 4년 전, 이형철 선배의 파워를 실현해 보고자 권투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그의 지금까지의 경기 전적은 13전 10승 2 무 1패. 그가 바로 무서운 완 투를 구사한다는 성양수(21)이었다. 

 

"밴텀급요. 한 달 만에 10kg을 감량한 적도 있어요. 하루에 사과 하나, 콜라 반 컵만 먹었었죠. 눈싸움요? 처음에는 많이 의식했는데요. 지금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서 요즈음에는 일부러 눈을 맞추지 않죠. 아, 저의 귀요? 시합하다 보니까, 몸싸움도 치열하고... 그래서 양쪽이 서로 달라요. 있어요, 하나. 시합 전날 우리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잠을 자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이 저의 징크스죠."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 그는 매일 아침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린다고 한다. 남들이 다 쉬는 날에도 한번 제대로 놀아보지 못하고,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들과도 어울릴 시간이 적은 그는 그것이 늘 아쉽다고 했다. 잠시 우울해하는 그를 위해 나는 세계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그때를 위해 소감 한마디를 연습해 보라는 부탁을 했다. 

 

"어떡하지, 음... '먼저 지금까지 저를 아껴주신 관장님과 코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의 시합이 있을 적마다 일주일 전부터 절에 가셔서 불공을 드리시는 부모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렇게 할 것 같아요. 후후."

 

그즈음, 우리들의 시선은 링 위에서 혼자 스윙 자세를 가다듬는 샤도 복싱에 몰두해 있는, 갸름한 체격의 한 학생에게 집중되었다. 정국현(19). 만화 <드래곤 볼>에 등장하는 박박 머리의 크리닝을 떠올리게 하는 국현이는 54kg의 밴텀급이다.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3km의 거리를 달리는 그의 권투 입문은, 멋있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데 나중에 들은 후문으로 그는 무척이나 이 운동에 소질이 있다고,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다. 우리나라의 최용수와 주먹이 빠른 호야 선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그는 이달 3일에 개최되는 서울 아마추어 선수권 신인왕 대회에 참가할 예정, 관심이 모아지는 기대주라 했다.

 

"지금까지 약 4차례의 스파링을 가졌어요. 많이 맞았죠. 아뇨,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 겨를이 없었어요. 또 한 번 상대방 선수에게 많은 것을 배웠구나, 하는 뿌듯함 때문에 맞고도 기분이 좋죠. 참 시원한 느낌이에요. 아마 그 기분, 잘 모르실 걸요. 참, 저 엄마한테 드릴 말씀이 있는데... 엄마! 저 이번에 시합에 나가서 꼭 신인왕이 되기 위해 열심히 뛸게요. 지켜봐 주세요."

 

양손을 이용해 번갈아 공격하는 완 투, 왼손의 잼과 오른손의 스트레이트, 그리고 옆에서 휘감아 치는 듯한 훅과 올려치는 어퍼 컷. 권투라는 운동에 대해 너무나도 문외한이었던 내게 모델처럼 멋있는 정지석(20)이 권투의 세부적인 기술 내용과 더불어 그에 대한 예찬론을 펼쳐 보였다. 

 

"원래 제가요, 권투를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왜냐고요? 이 잘생긴 얼굴에 흠이 갈까 봐요."

 

태연한 표정으로 상대방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지석이를 모셔놓고, 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의 강의를 들어야 했다. 

 

"일단 몸이 편해져요. 제가 원래 체격이 왜소해서 이 운동을 시작한 것이거든요. 처음에는 흥미 삼아 재미를 붙여본 것인데, 정말 괜찮은 운동인 것 같아요. 우선 폐활량이 좋아지고요. 스트레스도 해소되고요. 그리고 저는 시작한 지 7개월이 채 안되었지만요. 내년에는 신인왕 대회에 도전하려고 해요. 그때를 위해서 열심히 실력을 갈고닦을 겁니다."

 

우리들이 사물함 앞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이 체육관의 가장 어린 막내인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최신형(15)이 나타났다. 운동 삼아 이곳을 찾게 된 지 이제 한 달. 그는 아직 몸을 풀고 줄넘기를 하는 단계였지만, 이곳에서 각각 15분씩 나누어 30분이 소요되는 줄넘기 연습에 너무나도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는, 이곳 형들의 귀염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이름은 챔피언

토요일 오후, 그날 체육관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는 긴장감이 엿보였다. 평소와 그리 크게 다른 모습들은 아니었지만, 되도록 서로 간에 말수를 줄이며 각자 나름대로 자기 스타일에 맞는 연습 방법을 찾고 있었다. 양수는 미트를 낀 코치와 함께 완 투를 던졌으며, 국현이는 나름대로 샤도 복싱에 취해 있었다. 

 

드디어 5시 30분. 오늘은 네 번의 스파링이 계획된 날이었다. 링에 오르는 선수는 그 나름대로, 그리고 로프 옆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다른 선수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날카롭기만 했다. 국현이와 함께 가장 먼저 링에 오르게 될 박두한(18)은 머리를 박박 밀어서인지 인상이 무척이나 강했다. 57kg의 페더급. 취미 삼아 시작한 권투가 이렇게 힘들지 몰랐다는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러나 지금은 그 자신이 이 권투 안에 무척이나 심취되어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아마추어는 완 투를 잘 쳐야 해. 그렇지. 아니, 왼발이 자꾸 뜨잖아. 아니야, 다리가 먼저지. 자꾸 손이 먼저 나가면 안 돼."

 

국현이와 두한이의 4라운드가 진행되는 내내, 한쪽에서는 관장님이 그리고 그 맞은편에서는 코치가 목청을 높여가면 그들을 향해 주문을 계속했다. 그들 뒤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원기준(29) 씨의 표정이 조금은 상기되어 있었다. 라이트 미들급인 정현수(20)와의 한판승. 현수는 이미 킥복싱 대회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뛰어난 운동 감각의 소유자였다. 권투를 시작한 지 채 6개월이 되기도 전에 벌써 여섯 번이 넘는 스파링을 가진 바 있다. 

 

"1년 넘게 킥복싱 도장을 다니고 있었어요. 처음 체육관을 찾게 된 것은 킥복싱을 위해 몸을 풀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재미있더라고요. 흥미도 생기고요. 요즈음에는 매일 이곳에 오는 편이죠. 킥복싱 도장은 잘해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갈까요. 오늘 새로 권투화도 샀으니 잘해야죠."

 

그러나 그에 맞서는 기준 씨의 실력 또한 그리 만만치는 않을 성싶었다. 그에게는 한때 서울시 신인 선수권 대회에서의 5전 5승 5KO승이라는 전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시작했죠. 그런데 그때에는 제가 너무나 경솔했었나 봐요. '이거 아니면 안 된다'라는 각오로 열심히 뛰어들었어야 했는데, 그저 화려한 겉멋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한때 그만두게 된 이유요? MBC 신인왕전에 세 번 출전했는데, 세 번 모두 준결승전에서 패하고 말았죠. 처음에는 상대방을 다운시키고 싶은 욕심을 내다 제가 다운이 되었고요. 또 한 번은 16번째였던 경기 순서가 갑자기 5번째로 앞당겨진 거예요.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다가... 하긴 다 핑계에 불과하죠. 그 일이 있은 후, 권투를 그만두었죠. 그리고는 회사에 다녔어요. 한 3년간. 그런데 운동을 하다가 중단해서인지, 몸이 좋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건강  때문에 다시 시작하게 되었죠."

 

손에 감는 그의 붕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눈이 부실 정도로 희었다. 

 

"사회생활이나 권투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스스로 인내하면서 열심히 실력을 갈고닦을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 아무런 노력 없이 대가만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운동을 하면서 느꼈죠. 그리고 그것은 제가 한동안 머물렀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됩니다."

 

링 위에서의 경기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내 옆에서는 김성무(18)가 양손에 아령을 들고 손목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나의 시선이 무안했던지,

 

"이것이 팔목의 힘을 강화시키거든요. 이번 신인왕 대회요? 아뇨, 저는 나가지 않기로 했어요. 코치님께서는 나가보라고 권유하셨는데요, 실력이 부족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아직 이렇다 할 기술적인 특기도 없고요. 권투요? 남자다운 운동이잖아요. 아, 정말 아파요. 저는 안면보다는 복부가 더 약한 것 같아요. 한 대 맞으면, 정신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요즈음에는 복부를 강화하기 위해서 연습을 많이 하죠. 윗몸일으키기나, 배를 향해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기도 하고요."

 

성무와 컴퓨터 개인사업을 하는, 키가 190cm 가까이 되는 유광훈(29) 씨와 함께 잠시 작은 목소리로 소곤대고 있을 즈음, 세 번째 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주니어 라이트급 김두성 프로와 맞붙은 태우 씨. 

 

"몸이 그렇게 되면 안 돼. 스톱! 봐, 태우야! 그렇지, 옳지, 옳지, 나가! 그래, 잼만 잘 치면 된다. 저 봐, 겁먹고 있잖아. 네 힘만 빠진단 말이야. 잼, 잼! 피할 생각 말고 앞으로 나가, 거리를 봐야지. 오른손은 왜 안 써, 그래 오케이."

 

링에서 내려오자마자 태우 씨는 줄넘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펀치볼을 가볍게 두들겼다. 한 20여 분을 계속 그렇게 몸을 푼 그가 쑥스럽다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아까 제가 너무 많이 맞았죠?

 

"아뇨, 잘하셨는데요. 괜찮으세요?"

 

"기분 좋아요. 그렇게 많이 맞은 만큼 배울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경기에 임하게 되면 왜 겁을 먹게 되는지... 정말 큰일이에요."

 

 

그때 우리 곁으로 양수가 걸어왔다. 오늘의 마지막 경기의 주인공이 될 그에게서는 긴장감은 물론 아무런 동요도 느낄 수 없었다. 

 

"자신 있어요.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 그런데 형이 파워가 강해요. 국제전도 많이 뛰었거든요."

 

그의 상대는 한국 밴텀급 4위에 랭크된 안용진(28). 중학교 때 처음 시작했으니, 권투 생활이 어느덧 11년이 다 되어 간다고 했다. 

 

"완 투를 짧게 한번 쳐 봐. 그래, 이번에 좋았어. 다시 한번 시도해 봐. 아니야, 많이 때린다고 좋은 게 아냐. 래프트 훅을 치고 라이트로 나가야지. 잼, 옆구리, 마저 봐야지, 뭐해! 용진이!"

 

1회전은 양수가 선배에게 혼이 난 듯했다. 그런 양수에게 관장님의 무서운 목소리가 전해졌다.

 

"영화 촬영하냐! 왜 멋을 부려. 그게 뭐냐. 모양낼 때는 아직 멀었단 말이다. 그리고 자신감을 가져. 너랑 맞붙는 애들은 실력이 다 비슷해. 너보다 센 상대가 아니란 말이야, 자신감을! 하나하나 만들어 가야지. 바른 손은 결정적일 때 휘두르란 말이다."

 

휴식시간 1분이 지나고, 다시 2회전에 들어갔다. 

 

"옳지, 계속, 붙었잖아. 그럼 돌려줘야지, 래프트 훅으로."

 

그리고 3회가 지나 마지막 라운드의 벨이 울릴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마 내쉬는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그때 우리 모두는 긴장해 있었던 것 같다. 관장님은 3회전이 시작되면서부터, 링 옆에서의 자리에서 조용히 뒤로 물러나셨다. 그리고는 곧 사무실 안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것은 아마도 오늘 후배를 상대로 많은 고전을 면치 못했던 제자가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질까, 하는 염려에서의 배려였음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양수는 링에 오르기 전, 나와 사진기자에게 자신했던 멋있는 한판 승부를 보여주었다. 물론 안용진 프로 또한 끝까지 최선을 다한 그래서 그들 모두가 아름다워 보였던 토요일 오후는 그렇게 조금씩 저물어 가고 있었다. 

 

권투 선수들이 그들의 치아를 보호하기 위해 입안에 끼워 넣는 마우스 피쓰는 원래 처음에는 아무 모양도 아니었다고 한다. 35도의 뜨거운 물에 2분 정도 담근 후에 꺼내 입에 살짝 물어 찬물에 넣은 후에야만, 자신의 구강 구조에 맞는 각자의 마우스 피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 <규철 권투 체육관> 안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고독한 질주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어떠한 색깔의 목표들이었는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에 대해 굳이 그 이유를 궁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의 마우스 피쓰가 각기 다른 것처럼, 그들의 꿈들 역시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에게 건넬 작은 파이팅 만은 마련해 두고자 한다. 2분씩 4라운드로 진행되는 아마추어 대회. 그러나 그들 모두의 노력은 이미 1R 180초의 프로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자신 스스로와의 싸움, 그렇게 그들의 아마추어 5라운드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1999년이 시작될 무렵, KBS '제3지대'라는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던 김우현 PD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권투를 하고 있는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방송으로 담고 싶은데, 그것을 함께 취재하여 같은 소재의 내용을 방송과 지면을 통해 동시에 그려보자는 제안이었다. 그 당시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읽으시던 <뿌리깊은나무>나 <샘이깊은물>과 같은 잡지를 어깨너머로 구경하면서 자연스레 보통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하는 스타일이 맞는 정진성 실장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그 또한 흔쾌히 이 작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나와 사진기자는 김우현 PD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본업의 일이 끝나면, 퇴근하자마자 사진기자와 함께 왕십리 체육관으로 향해 늦은 밤까지 머물렀다. 김우현 PD도, 나 역시도 취재를 위한 취재는 따로 없었다. 일주일간 우리는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 모습들을 스케치할 뿐이었다. 체육관 사람들과 정이 들 무렵, 우리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방송을 통해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고, 같은 시기에 지면을 통해서도 소개되었다. 김우현 PD는 프로그램 영상 속에 그때 우리들이 함께 카메라에 담은 수많은 사진들을 파노라마식 흐름으로 인용하였는데, 그것이 방송에서 보여준 첫 시도라는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 후 김우현 PD는 비디오 저널리스트로서 <친구와 하모니카>라는 인간극장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다.  

 

▶ 김규철 관장과 같은 우리나라 클래식음악의 개척자들

한국 클래식 타악의 선구자 박동욱, 그 깊은 울림

 

한국 클래식 타악의 선구자 박동욱, 그 깊은 울림

한국을 대표하는 타악 1세대 연주자이신 박동욱 선생은 우리나라 현대음악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타악 분야의 대부이십니다. 2011년 7월 선생님 자택에서 인터뷰와 사진 촬영이 있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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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세계에서 음악을 설계하는 창조의 마법사, 작곡가 강석희

 

정글의 세계에서 음악을 설계하는 창조의 마법사, 작곡가 강석희

한남동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지난 2016년 4월에 찾아뵌 적이 있는 작곡가 강석희 교수님이십니다. 당시 한남동에 자리한 일신홀에서 처음 뵙게 되었는데요. 그곳에서는 현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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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클래식계의 영원한 스승, 피아니스트 정진우

 

한국 클래식계의 영원한 스승, 피아니스트 정진우

피아니스트 정진우 서울대 명예 교수님을 찾아뵙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포근한 미소와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시는 말씀들은 마치 어린 시절 할아버지 곁에서 옛날이야기를 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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