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에서 들려온 설렘
<수요예술무대> 진행자 김광민
가끔씩 방송을 통해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모습을 보게 되면, 아주 오래전 그를 만났던 일이 생각난다. 1999년 3월의 인터뷰였으니,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고도 남은 옛날이야기이다.
글 엄익순
당시 MBC 라이브 음악프로그램인 '수요예술무대'를 진행하던 김광민과 나는 거의 두 달 가까이 약속을 잡지 못했다. 핸드폰을 갖고 있지 않았던 우리들은 항상 호출기의 음성 사서함과 자동 응답 전화기에 서로의 목소리를 나름대로 녹음해 둘 뿐이었다. 내가 그의 집으로 전화를 할 때 그는 항상 부재중이었으며, 그가 나의 호출기로 번호를 눌렀을 때에는 내가 잠들어 있는 자정이 훨씬 넘어간 시간대였으므로,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통화를 하지는 못했었다.
그러던 중 우리가 제대로 된 통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촉촉이 비가 내리던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그의 집으로 전화벨을 울렸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잔잔한 피아노 선율. 김광민은 나와 통화를 하면서 계속 피아노를 치고 있었는데, 내가 수화기를 들면서부터 시작된 그의 연주는 전화기를 내려놓는 그 순간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가끔씩 TV 화면을 통해, 혹은 그의 앨범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연주자의 피아노 선율을 수화기를 통해 듣는다는 것은 적지 않은 설렘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들의 만남은 한 달 뒤로 약속 날짜를 잡았는데, 우연하게도 이날 역시 아주 오래간만에 조용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들은 전화기에서 흘러나온 김광민의 피아노 연주는 지금까지 들어온 어떠한 선율 보다도 가장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
1980년대 서정적 가사의 노래 '하나가 되어요'라는 곡으로 꾸준한 인기를 모았던 <동서남북>이라는 대학생 그룹사운드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가 처음 피아노 의자에 앉은 것은 4세 때. 성장기 시절, 그는 클래식을 비롯한 록과 프로그래시브 악기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재즈가 아닌 클래식 연주자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나의 질문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고등학교 때였어요. 클래식이나 다른 영역의 음악은 쉽게 이해도 가고 직접 연주하는 데 있어서도 별다른 무리를 느낄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재즈라는 장르는 제가 소화해 내기에 무리가 있더군요. 그런 마음으로 갖게 된 재즈에 대한 관심의 깊이만큼 자꾸만 매료되더라고요.
그러던 중 어느 날 재즈하는 사람들이 연주하는 스틀린 댐이라는 팝 그룹의 곡을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그 미묘함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정했죠. 한 번 재즈에 대해서 공부해 보자고요.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린 퓨전 재즈에도 심취하게 되었고, 밥 제임스의 곡도 참으로 많이 들었답니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김광민은 나의 취재 수첩을 자신의 손으로 가져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들이라면서 몇 곡을 추천해주기 위해서였다. 때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의 이름이 보였고, 간혹 가다 마주치는 잘 알지 못하는 아티스트인 경우에는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도 덧붙여 주었다. Pat metheny의 off the ramp와 Bill Evans의 You must believe in spring, Bob James의 Touch down,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비창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과 바흐, 쇼팽 등에서 비틀즈에 이르기까지 나의 수첩은 그의 필체로 가득 채워졌다.
"재즈요? 그것에 대해 잘 알거나 혹은 모른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또한 음악을 감상하는 데 있어 그 장르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것은 단지 그때의 감정을 표현해내는 하나의 매개체에 불과한 것인데 말이에요. 다만 다른 음악적 영역보다 좀 더 연주자의 자유가 확대된 만큼, 듣는 사람들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에 잘 어울리는 재즈곡인 빌리 홀리데이의 스토미 웨더와 소니 클라크의 쿨 스트러팅, 그리고 에롤 가너의 미스티 등이 있지만, 나는 가끔씩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릴 때면 김광민의 1집 앨범에 수록된 Rainy Day의 2번 트랙을 선곡한다. 그 날 전화기에서 들려온 김광민의 피아노 선율이 아직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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