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와 함께 한 어느 날 오후
추리소설 같은 사진이야기
우리가 무엇인가를 담아내는 방법 중 가장 진실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사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유명한 문학가가 빼어난 구성으로 뽑아낸 개연성 있는 허구의 묘미나, 목소리 고운 성악가가 내려놓는 깊은 저음의 감동과는 비교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부분의 것들은 보이는 그 대상보다는 그것을 담아내고자 하는 객체의 입장에서 휘둘러지는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진 역시 카메라라는 통과의례를 거쳐 여과되긴 하지만, 최소한의 가감으로 있는 그대로를 옮겨 놓을 수 있는 이 안에서 만큼은 포착되는 그 대상이 완벽한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세련되지 못한 편견 때문인지, 저는 꾸미는 사진에는 왠지 마음이 잘 가지 않습니다. 요즈음에는 기술이 발달하여 사진 분야 역시 하나의 완벽한 성형이 되어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 번 보기에는 이유 없는 지루함이 동반됩니다. 유독 이러한 기울어진 시각으로 사진을 접하는 저에게 있어 <피카소와 함께 한 어느 날 오후>의 출현은 신선하기만 했습니다.
2000년에 세상에 나온 이 책은 사진에 관한 책입니다. 그러나 사진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지적 긴장감을 던져주는 책, 그 안에서 한 시대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하는 역사서와도 같은 다중의 모습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 책의 화두는 '사진'으로부터 출발됩니다.
사진에 관한 호기심에서
출발된 책
1019(창조집단 시빌구)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첫선을 보인 이 출판사의 등장은 2000년 당시 적지 않은 마니아 층이 형성될 만큼 많은 독자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었습니다. 다른 곳과 차별화되는 그들만의 독특한 색깔은 그들이 발표한 책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습니다. <육 명심 사진집>과 <김 호성 사진집>, <하늘땅 815-여섯 번째 1999>, <권 순평 사진집 '1990-1999'> 등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창조집단 시빌구)의 방향은 예술분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고집이었습니다. 책의 좋고 나쁨을 떠나 독자의 구매력만을 최우선으로 지향하는 출판계의 흐름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소신대로 그들만의 책을 선보인다는 것은 우리들과 같은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행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의 준비된 작업만큼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무언의 믿음 같은 것이 그 만남의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의 책은 전문지식이 부족한 저 같은 사람들이 그 분야에 접근하기 위해 어떤 자료를 들춰봐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는 그 수고스러움까지 함께 덜어주고 있었습니다. 철학에 대한 혹은 클래식 음악과 관련된, 또는 비평 등과 같이 자신이 필요로 하는 분야를 만나게 되면 우선적으로 그러한 전문 출판사의 목록들을 검색해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한 사고의 길목에서 마주친 1019(창조집단 시빌구) 역시 이러한 상쾌한 첫인상을 안겨주고 있음은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78년 나는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금세기 초 몽파르나스에서 생활했던 예술가 공동체의 기록 사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은 1989년 <키키의 파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거기 실린 대부분의 사진들은 익명의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찍은 것이었는데, 나는 각기 출처가 다르며 서로 무관한 것 같던 그 사진들이 사실은 같은 날 찍은 몇 개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그룹은 여기 실린 5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후 2, 3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이미 출간된 사진 중에서 이 그룹에 속하는 사진을 찾았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동일 인물이고 사진마다 같은 복장에 같은 액세서리 -파이프, 모자, 지팡이- 를 지니고 있었다. 넥타이를 맨 방식이나 칼라의 주름진 각도도 같았다.
1981년 봄, 파리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모딜리아니 전시회의 카탈로그에 실린 10번째 사진(같은 날 찍은 시리즈 사진 중에서 24번 사진)을 입수했다. 배경에 찍힌 건물의 그림자가 매우 선명한 사진이었다. 나는 만일 그 건물의 정체를 밝힐 수만 있다면 빌딩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사진을 찍은 명확한 날짜와 시간을 밝혀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나는 사진의 다른 내적 단서들을 서로 연관 지어 이 사진을 언제 어디서 찍은 것인지 조사했다.
(p15, '사진에 얽힌 이야기' 중에서)
일반적으로 제목에는 문장부호가 동반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책은 작은따옴표 속에 제목이 묶여 있습니다. 간단하면서도 예쁜, 그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출판사명과 함께 책명에서 또한 이러한 특이한 시도를 보여준 그 이유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피카소와 함께 한 어느 날 오후'> 이 책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과 같이, 어느 화창한 날 찍어 놓은 아주 자연스러운 몇 장의 사진에 관한 작은 호기심에 대한 결과물입니다.
저자인 빌리 클뤼버는 미국 벨연구소에 근무하면서 10여 개의 특허를 가진 과학기술자이며 동시에 앤디 워홀 등 현대미술가들의 창작활동에도 협력하며 예술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그의 세심한 집념과 치밀한 과학적 접근 방법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진의 배경에 보이는 건물의 구도와 그림자의 깊이를 측정하여 사진을 촬영한 날짜가 1916년 8월 16일임을 밝히고 파리 소재 경도 조사국에서 입수한 자료로 그날의 태양의 위치를 확인하여 각각의 사진에 기록된 시간을 계산해내어 시차에 따라 사진을 적절하게 배열하기까지 했습니다. 카메라와 필름, 노출과 현상, 카메라의 각도에 이르기까지 사진 속 주인공들의 하루는 소위 84년이라는 시간의 거슬러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나는 사진의 다른 내적 단서들을 서로 연관 지어 이 사진을 언제 어디서 찍은 것인지 조사했다. 로통드 카페의 차일이 찍힌 사진 중에는 배경을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나뭇잎이 무성한 점과 사진 속의 인물이 입고 있는 복장으로 미루어 사진을 찍은 계절은 늦봄이거나 여름일 것 같았다. 황폐한 거리와 군복을 입은 한 남자의 모습을 통해서는 사진을 직은 시기가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어느 해일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제일 쉽게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세 사람, 파블로 피카소, 모딜리아니, 모이제 키슬링의 행방을 확인했다.
(p 15~16, '사진에 얽힌 이야기' 중에서)
피카소, 에릭 사티, 모딜리아니, 콕토
그들이 보낸 즐거운 오후
가끔은 멋진 샹송을 작곡하기도 하고, 선술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끼니를 해결했던 기인, 그러나 후에 미니멀리즘의 선두주자로 평가받는 작곡가 에릭 사티. 살아생전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늘 수많은 화제를 남겨 세인을 즐겁게 해 준, 한치의 의심 없이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피카소. 훗날 그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현대미술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지만 살아서는 이름을 날리지도 못했고, 물감은 커녕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기도 힘겨울 만큼 궁핍했던 화가 모딜리아니. 극작가로, 화가로, 연극 연출가로, 시인으로, 또 영화감독으로, 수많은 분야를 넘나들며 그 보석과도 같은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던 파리의 풍운아 콕토.
이들이 서로 어울려 같이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오후를 보냈다면 그건 왜일까요? 무슨 이유로 이들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모였을까요? 그리고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러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저자의 추적은 사진 속 인물들의 삶을 마치 자서전을 기록하기 위한 자료를 찾아내는 듯한 과정에서 모두 29장의 사진들을 발견하였으며, 사진을 찍은 인물과 그것을 촬영한 장소와 시간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진 한 장이 새로 발견될 때마다, 사진 속 인물을 증언해 줄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대륙을 오가며 추적한 20여 년 동안의 노력이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피카소와 함께 한 어느 날 오후'>의 저자 빌리 클뤼버는 1978년, 20세기 초 몽파르나스에 모여 생활했던 일단의 예술가들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수집하다가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았습니다. 피카소, 막스 야콥, 모이제 키슬링, 모딜리아니 등등 오늘날 우리에게 낯익은 화가들의 사진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찍혔다는 거였지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이 사실에 저자는 주목했습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끔은 회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사진 한 장, 한 장, 피사체의 그림자의 깊이며 각도를 측정하여 이 사진이 하루 중 태양이 어느 지점에 떠 있을 때 찍었을 것이고 그날은 날씨가 어땠으며, 카메라와 필름은 어떤 종류를 사용했으며, 사진 속의 인물들이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무엇이~~~ 등등을 밝혀내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노력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순간이 있었고, 과연 이렇게까지 고생할 필요가 있는 작업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번역을 끝내고 난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로서는 감히 흉내도 못 낼, 학문하는 자세의 한 본보기를 보았다는 생각에 사뭇 경건한 마음까지 듭니다.
(p 204~205, '옮긴이의 글' 중에서)
이 책에는 핵심이 되는 콕토의 사진 29장 외에 참고가 될 만한 다른 사진들과 사진 속의 주인공에 대한 간략한 소개, 그리고 금세기 초 몽파르나스에서 이루어진 예술가들의 활동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기록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피카소를 그린 콕토의 스케치와 모딜리아니가 그린 콕토, 모딜리아니가 스케치한 피카소, 브란쿠치가 찍은 에릭 사티의 사진도 함께 즐길 수 있어 한층 흥미를 더해줍니다.
그동안 우리가 접할 수 있었던 고자세의 딱딱함으로 거만하게 치장된 기존의 예술 서적과는 달리 이 책은 어느 연령층이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재미가 배가되었다고 하여 그 깊이가 상업적으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보다 무게 있는 예술 분야의 묘미를 읽는 사람이 친근하게 소화해낼 수 있도록, 마치 편안하게 즐기는 여느 문학 장르처럼 독자에게 다가오는 이 책은 한동안 숨겨오던 지적 공허함을 조금씩 채워주는 좋은 씨앗이 될 것이며, 또한 너무 얕은 말장난에 지쳐버린 사람들에게는 오랜만에 생각하면서 책장을 넘기게 해주는 그러한 한 권의 책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 큰 부담감이 가중되지는 않지만, 결코 가볍게 빠른 속도로 책장이 들춰지지는 않는 <'피카소와 함께 한 어느 날 오후'>를 다 읽고 나면 나 자신 또한 그들과 함께 몽파르나스 로통드 카페에 앉아 피카소와 막스 야콥, 모이제 키슬링, 모딜리아니들을 다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집안에 꽂혀 있는 사진첩에서 잠들어 있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어 이 책의 접근방법을 인용하여 그 사진이 생성된 연도와 날짜, 장소 등을 추적해 보는 것도 좀처럼 맛볼 수 없었던 흥미로운 시도가 될 것 같습니다. 만연체의 본문은 아니지만 빠르게 완독 하기는 어려운, 깊은 사고가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멋진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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