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아름다움/책

배우,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백세개의 모노로그

난짬뽕 2022. 2. 16.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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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백세개의 모노로그

최형인 엮음

 

 

 

<배우,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백세개의 모노로그>가 1쇄 발행된 것은 1990년이었고, 내가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1994년 11월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 이듬해 이 책을 원작으로 하는 <백세개의 모노로그>라는 연극도 무대에 올랐지만, 그 당시 공연은 보지 못했다. 

 

 

대학시절, 이 책을 스윽 건네던 내 친구는 지금은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이웃사촌이 되었다. 가끔씩 피곤해하면 맛있는 밥도 사주고, 집으로 불러 먹고 싶은 것을 손수 해주기도 한다. 그때 내 친구는 나에게 왜 이 책을 선물했을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를 내 생일 즈음에 건네준 것도 바로 이 친구이다. 

 

자취를 하던 우리는 각자의 방 삼면을 온통 책으로만 도배하기를 원했었다. 그래서 생활비와 용돈을 아껴 사고 싶은 책들을 구입했었다. 하지만 결국 자취방의 삼면을 바닥부터 천정까지 책으로 가득 채운 것은 바로 그 친구였다. 한문학에도 실력이 빼어나 졸업을 하고 나서도 계속 한문학을 공부했고, 지금까지도 이 분야에 있어서는 많은 교수들이 함께 공저를 하고 싶어 할 만큼 조예가 깊다. 

 

그러나 내 친구는 결혼과 함께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 실력이 너무 아깝다는 내 말에, 늘 자신은 지금의 생활이 가장 좋다는 말을 한다. 아직도 나만 만나면 커피에 디저트까지 먹이면서, 늘 새로운 책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내 친구. 송파도서관을 내 집 드나드는 내 친구의 오래된 글씨를 이렇게 만나는 것도 반갑기만 하다. 

 

책을 소개한다는 것이, 내 친구 소개로 빠져들었다. ㅎㅎ 어쨌든 이렇게 멋진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고 자랑스럽기만 하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백이나 장면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배우들이 이 책에 모아 놓은 글들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조금 더 가까워지는 훈련을 했다는 인터뷰들을 본 기억이 난다. 

 

'햄릿' 중에서, 햄릿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도 참고 있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밀려드는 재앙을 힘으로 막아, 싸워 물리칠 것인가? 죽어, 잠들다. 그것뿐이겠지. 잠이 들어 만사가 끝나 가슴 쓰린 온갖 심뇌와, 육체가 받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면, 그건 정말 바라는 생의 극치가 아닌가! 죽어 잠을 잔다. 잠이 들면 꿈을 꿀 테지? 이승의 번뇌를 벗어나서 영혼의 잠이 들었을 때, 그때 어떤 꿈을 꿀 것인지, 이게 또 망설임을 주니~~~ 그러기에 이 고해 같은 인생에 집착이 남는 법. 그렇지 않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의 사나운 채찍을 견디며, 폭군의 횡포와 세도가의 멸시, 버림받은 사랑의 고통스러움, 재판의 지연, 관리들의 오만, 유덕한 사람에게 가하는 저 소인배들의 불손,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참고 지낼 것인가? 한 자루의 단검이면 쉽게 끝낼 수 있는 일. 그 누가 이 인생의 지루한 길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진땀을 뺄 것인가? 다만 한 가지 죽은 뒤의 불안이 있으니 이것이 문제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

 

실제로 이 책의 독백 모음은 크게 국내 작품과 외국 작품으로 나뉘고, 이는 다시 남녀 배우들의 독백으로 분류되어 있다. '겨울새', '봉숭아 꽃물', '세 자매 이야기', '심연의 다리', '한 씨 연대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가을 부근', '모가지가 긴 두 사람의 대화', '벽과 창',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한만선' 등의 국내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나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는 여름이 낫다고 하죠. 하지만 저는 여름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 없이 살기는 우리보다 더할 사람들이 없겠지만 자기 옆사람을 증오하게 만드는 여름보다는 겨울을 택하겠어요. 옆사람의 체온을 고마워하며 살을 맞대고 자는 원시적인 우정이 증오의 감정으로 변해야 하는 여름은 정말이지 징역살이가 내게 줄 수 있는 최대의 형벌입니다. 자기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존재, 체온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행한 건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하지 못한 채로 그저 말초 감각으로만 느끼는 미움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미워할 수밖에 없는 자기혐오입니다. 그러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내일, 비 한줄기가 내리고 나면 불행한 증오는 서서히 걷히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서로의 따뜻한 가슴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신영복 작

 

또한 외국 작품들로는 '갈매기', '결혼생활의 장면들', '베로나의 두 신사', '불어를 아세요?', '세일즈맨의 죽음', '오셀로', '오이디푸스 대왕', '위기의 여자', '햄릿', '유리동물원', '마담 꼴롱브',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니스의 상인', '안나 프랑크의 일기', '어머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인형의 집', 한여름밤의 꿈' 등의 독백 모음을 만날 수 있다. 

 

'안나 프랑크의 일기' 중에서, 안나
1944년 5월 3일 수요일, 오후

다른 여자 아이들과 같은 식으로는 살지 않기로 결심했어. 나중에 어른이 돼서도 다른 부인들처럼 살지도 않을 거야. 난 너무 멋있게 태어났거든. 그러니까 이런 위기에서도 웃을 수 있는 거야. 내겐 아직도 겉으로 보여지지 않은 좋은 점들이 많아. 난 젊고, 강하고, 커다란 모험 속에서 살고 있어. 하루 종일 불평만 투덜대면서 살 수는 없지. 난 좋은 운을 타고났어. 난 성격도 좋지. 명랑하고 힘도 세. 매일매일 나는 내면에서 성장하고 있는 걸 느껴. 해방의 순간이 가까워 오고 있잖아? 자연은 아름답고 인간은 착하고, 그런데 왜 내가 절망 속에 빠져 있어야만 하지?

안나 프랑크 작

 

'존 왕' 중에서, 콘스탄스
내가 미쳤다고요? 미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쥐어뜯고 있는 머리카락이 내 머리카락이라는 것도 알잖아요. 내 이름은 콘스탄스, 제프리의 아내, 내 아들은 아더. 비록 지금은 없지만. 아뇨, 난 미치지 않았어요. 차라리 미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미치면 내가 누군지 잊어버릴 수 있겠죠?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슬픔도 잊을 수 있을 텐데. 여보세요, 날 미치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

 

이 책을 엮은 최형인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재학 중 도미, 세인트 죠세프 대학 불문과, 아메리칸 대학 공연예술과, 뉴욕대학 예술대학원 연기과 M. F. A. 를 졸업했습니다. 문예진흥원 공연예술학교 연기지도 및 MBC TV 탤런트 연기지도 교사를 거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후진 양성을 하기도 했습니다. 공연작품으로는 '필부의 꿈', '춘풍의 처', '변방에 우짖는 새', '달라진 저승' 등 다수가 있고,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가을 소나타'를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엮은이는 배우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필수적인 훈련으로 세 가지를 꼽았는데요. 이는 그 작품에 대한 이해와 연기 기술, 그리고 연기자의 내면세계와 연결 짓는 것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은 몸과 마음, 이 둘을 분리해서는 인간을 상상할 수가 없다면서 연극 작품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얘기가 거의 대부분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바로 이 책이 비단 공연을 위한 배우들의 준비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엮은이는 "배우는 자유로운 인간에서 출발한다"라는 제목의 서문을 이렇게 끝맺습니다. 

 

독백 속으로 빠져들어 가야 한다. <나는 지금 이 말을 내 입으로 뱉으면서 어떻게 느끼는가, 내 몸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알아내고 신체가 요구하는 대로 충동을 만족시키는 것이 이 훈련의 목표이다.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 소리를 지르고, 울고 싶으면 울고, 구르고 싶을 때는 구르고, 두려움 없이 자신을 풀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대학시절, 그 예전에 아마도 제 친구는 저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백세개의 모노로그 중에서 여러분의 지금의 마음과 맞는 독백이 있다면, 한번 가슴 시원하게 읊어 보시면 어떠실까요. 엮은이의 말처럼 소리 지르고 싶으시다면 크게 소리 지르시고요, 울고 싶으시다면 크게 우시고요.

 

그렇게 자신을 꽁꽁 묶어두었던 감정의 울타리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마음의 위안이 되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누구라도 모두들 힘든 시기이니까요. 오늘은 나 자신이 마치 배우가 된 것처럼, 나만의 독백을 토해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마음에도 튼튼한 근력이 생겨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 모두의 마음이 편안한 하루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울한 시선으로 가장된 잔잔한 밝음, 파트리크 쥐스킨트 콘트라베이스

 

우울한 시선으로 가장된 잔잔한 밝음, 파트리크 쥐스킨트 콘트라베이스

우울한 시선으로 가장된 잔잔한 밝음 파트리크 쥐스킨트 <콘트라베이스> 이미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으로 <향수>와 <좀머 씨 이야기>가 각각 1991년도와 그 이듬해에 초판 발행되었지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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