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거지를 유쾌하게 물러나게 한
짜장 짬뽕 탕수육
갑자기 그 아이는 장군이 전쟁터에서 호령하듯 큰소리로 외칩니다.
"왕, 거지, 왕, 거지~~~."
덩치도 제법 큰 아이가 앞장서서 외치자 몇몇 다른 아이들이 주르르 따라서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왕이라 정한 자리에 재빠르게 가서 섭니다. 다음에 들어오는 아이들도 눈치로 알았는지 빈자리에는 서지 않습니다.
<짜장 짬뽕 탕수육> 14페이지 중에서
위에 소개된 대목이 어느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지 이미 짐작하셨죠? 제목부터 재치 있게 다가오는 <짜장 짬뽕 탕수육>의 사건이 발단된 곳은 바로 학교 화장실입니다.
중국 음식점 장미반점의 아들인 종민이는 새 학기에 도시로 이사를 와서 새로운 학교, 처음 만난 친구들이 모두 낯설기만 합니다. 1교시가 끝나고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간 종민이는 아이들이 왕, 거지 자리를 정해놓고 놀림까지 하는 모습에 마음이 상하고 우울해졌습니다. 유리 커피 병에 짜장을 담아주신 엄마의 도시락까지 놀림거리가 되지만, 종민이는 그런 친구들에게 오히려 당당하게 맞섭니다.
이 책의 글쓴이는 김영주 선생님이십니다.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인천교대와 성균관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 1995년에 '오늘의 문학' 동화 부문 신인상을 받았고, '우리교육'이 주최한 문집 공모에서 <함께 하는 교실>로 좋은 학급 문집상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쓴 어린이 책으로는 <짜장 짬뽕 탕수육>을 비롯하여 <만길이의 짝 바꾸기>, <영원한 주번>, <쥐포 반사>, <도망자 고대국>, <개나리반 금보>, <우유귀신 딱지귀신>, <바보 1단> 등이 있습니다.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독자들에게 전하는 글쓴이의 편지가 나옵니다.
요즘 여러분은 무슨 놀이를 하며 지냅니까? 나는 학교에서 시간만 나면 어린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합니다. 놀고 있는 어린이만큼이나 나도 즐거워집니다. 어떤 때는 너무 재미있어 나도 한번 해 보자고 어린이들에게 조르기도 하니 말입니다.
쉬는 시간만 되면 교실 바닥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공기 노는 어린이. 딱지를 치다 쫓겨나 화장실에서 몰래 딱지 치는 어린이. 삐쳐 있다가도 금방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 복도에 나가면 계단 위에서 오르내리기 놀이를 하며 가위, 바위, 보를 소리치는 모습.
너무 신나고 해맑은 얼굴이지요. 왕, 거지, 짜장, 짬뽕, 탕수육을 외치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얼마나 키득거리고 웃었는지 아마 여러분은 모를 거예요.
여러분에게 미리 알려둘 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점심을 어떻게 먹나요? 종민이네 학교는 4학년부터 급식을 한답니다. 3학년 어린이들은 집에서 도시락을 싸옵니다. 또한 '자장'이 표준어로 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짜장'이라 부르고, '짜장'이란 발음이 훨씬 어린이들이 놀이하는 모습과 맞아서 그래도 '짜장'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어떤 친구들이 놀이하는 것을 찾아가 볼까요? 벌써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 1999년 7월 글쓴이 김영주
이 책은 도서출판 재미마주의 학급문고 시리즈이기도 한데요. 아직은 글만 빼곡한 책이 지루한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일깨워 주는 책이라서 그런지, 페이를 넘길 때마다 장면 장면마다의 따뜻한 그림과 함께 읽어 내려가기가 참 재밌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종민이는 어떻게 되었느냐고요?
큰 덩치는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왕, 거지를 정합니다. 늘 하던 모습대로 첫 번째 변기부터 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왕 자리에 줄을 섭니다. ~~~ (생략)~~~ 거지 자리는 주인 없이 텅텅 비어 있습니다.
<짜장 짬뽕 탕수육> 37페이지 중에서
여전히 덩치 큰 친구의 지시대로 왕, 거지 놀이가 계속되나 봅니다. 왕 자리에만 몇 명씩 줄이 늘어서 있고, 거지 자리에는 놀림을 받을까 봐 어느 친구도 그 자리에 갈 용기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던 우리의 종민이.
뭐가 좋은지 종민이는 혼자 히히덕거리며 맨 앞 변기로 갑니다.
"짜장, 짬뽕, 탕수육, 짜장, 짬뽕, 탕수육~~~~."
종민이는 있는 힘을 다해 크게 외칩니다. ~~~(생략)~~~ 그러고는 빨리 탕수육 자리에 섭니다. 다른 아이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짜장 자리에 섭니다.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짜장? 짬뽕? 탕수육? 어떤 게 더 좋은 거야?"
이때 큰 덩치가 다시 앞에서부터 왕, 거지를 크게 말합니다.
"왕, 거지, 왕, 거지~~~."
그런데 아이들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짜장, 짬뽕, 탕수육에만 온 정신을 팔고 있습니다.
"난 짬뽕이 최고야."
"난 짜장이 좋아."
(생략)
"난 그래도 짜장이 최고야!"
"난 얼큰한 짬뽕이 좋지!"
"비싼 탕수육도 먹고 싶어!"
<짜장 짬뽕 탕수육> 38~40페이지 중에서
짜장, 짬뽕, 탕수육이 멋지게 심술꾸러기 왕과 거지를 물리쳤네요. 이 책은 저희 아이가 어렸을 때 함께 읽었던 책입니다. 이제 파릇파릇 봄이 오면, 학교에 입학하거니 새 학년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혹시 아이가 낯선 환경에 힘들어하지는 않은지, 친구들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많은 걱정이 드실 것 같습니다.
혹시 어린 자녀들과 대화를 하실 때 딱딱한 책상에 마주앉아 심문을 하시듯이 말씀하신다고요? 오늘은 포근한 잠자리에서 이 책을 읽어주시면서 살그머니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왕과 거지를 물리친 짜장 짬뽕 탕수육 이야기도 재미 있지만, 어쩌면 아이들이 고단했던 자신의 속마음을 자연스럽게 털어놓을지도 모르니까요.
이 책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유치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어른인 저는 아직까지도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유쾌해지는 것 같습니다. 역시 짜장과 짬뽕, 탕수육은 라이벌이 아니라 서로 뗄 수 없는 절친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은 짜장, 짬뽕, 탕수육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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