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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화된 이상화와 객관현실과의 규정력, 태백산맥

난짬뽕 2021. 6. 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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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화된 이상화와 객관 현실과의 규정력

조정래 <태백산맥>

 

 

장편소설 중에서 역사적 구체성과 시대적 필연성을 중시하는 하위 장르는 역사소설이다. 장편소설이 대상의 총체성 확보를 지향한다면 역사적 진실을 그리지 않을 수 없으며, 아직 어느 것이 시대의 본질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동시대보다는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인식 가능한 과거사를 대상으로 택했을 때 목표에 도달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재검토를 통하여 오늘의 '출구 없는 시대' 정세를 되짚어볼 수 있다는 데서도 역사소설의 현재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태백산맥>을 읽을 때, 나는 처음 그 명성에 비해 저으기 실망한 적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작품이 흥미롭게 읽히는 반면 기대했던 역사적으로서의 명분, 곧 전형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태백산맥>에 대한 기존의 연구 자료를 살펴보면, '이념적 갈등의 뿌리를 찾아서', '분단극복 문학의 한 분수령', '분단 상황의 총체적 모습에 도전', '한국 분단 소설의 새로운 진전', '참담한 죽음의 역사현장', '비극적 역사의 전환을 위하여'에서와 같이 항상 역사를 전제로 하여 그 연구가 전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소설이 역사 대하소설인 만큼 역사적 배경을 떠나서 논의된다는 것 또한 참으로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나 역사주의 비평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작품 자체가 그 외적 요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끌려다녔다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역사의 진실성을 바탕으로 작품 밖의 외적인 조건들, 이를테면 작가와 사회, 독자, 창작 경위, 독자에게 미친 영향 등과 관계된 환경으로부터 작품을 분리하여 작품 자체의 형식적인 구조 등을 객관적으로 분석 해명함으로써 철저한 내재적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즉 작품 표면에서의 형식과 구성 원리를 통해 발산된 내용의 형상화와 인물 전형을 사실적으로 살펴보는 형식주의 비평의 관점이 될 것 같다. 

 

역사적 진실과 문학적 가공

역사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과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의 역사가 시대에 따라 달리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시각이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 어떤 목적을 위해 또는 특정 시각의 정당성 입증을 위해 역사적 사실 자체를 뒤바꾸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의 왜곡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는 <태백산맥>에 대해, 그것이 상상력만에 의한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사실에 바탕을 둔 역사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시대적 배경이 왜곡과 굴절이 심한 '현대사의 실종시대'임을 전제하고 그 시대의 진실과 참모습을 '객관적으로' 복원하고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서문인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는 그 작업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여러 현장을 찾아다녔다. 소설은 단순히 상상력의 산물일 수만은 없으며 엄연한 역사 사실 앞에서 소설을 쓰는 자는 제멋대로일 수가 없는 것이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그렇게 증언을 토대로 하고, 확인을 거친 것들이다.


<태백산맥>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현장을 찾아보고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쓰였다는 작가의 말은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던 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방전후사에 대한 재인식 경향이 최근 두드러지고 있음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지만, <태백산맥>에 의한 체험은 역사 기술서 또는 해설서를 접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역사 해설서 등은 그것이 하나의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며, 다만 역사의 또 다른 측면을 이해하기 위한 참고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구체적 상황이나 사건을 형상화시킨 소설의 경우 그것이 곧 독자들에게는 역사적 사실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증언과 확인을 거쳤다는 작가의 말이 그러한 인식을 강제하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리얼리티에 의문이 가는 점이 적지 않다. 물론 한 편의 문학작품을 감상함에 있어서 '소설'이라는 특수성을 배제한 채, 그 속에서 지나친 객관적 사실과 논리적 이론을 대비시킨다는 자체가 폭넓은 감상의 깊이를 제한시킨다는 문제점 또한 없지는 않다. 

 

문학작품 속에서 단지 사실성에만 입각한 현실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무궁무진한 생산의 신비로움을 배출할 수 있는 작가의 상상력을 묵살시켜 버리는 것은 물론, 간접체험의 환희와 탐색에 빠져들 수 있는 독자들의 권리의 폭을 제한시키는 위험하면서도 무모한 지적 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기존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작품에 표출된 리얼리티의 모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태백산맥>에 있어서의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가공 사이의 형식적 거리감을 통해 발산될 수 있는 독자의 심리적 동요를 되짚어 보고자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보다는 전체적 흐름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어느 정도의 진실성을 인지한 능력을 갖춘 독자라면, 문학작품 속에 숨겨진 작가의 말장난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만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능동적 입장에서 독자 자신이 주체가 되어 여유 있는 감상의 폭을 넓힐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전개는 단지 이 작품의 사실적 타당성만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으며, 이러한 우려를 배재한 채 먼저 아주 사소한 착오부터 예시한다. 

 

먼저 연대가 맞지 않는 경우로, 소화의 어미 월녀는 1권 1장에서는 1943년에 49살이었다. 

그녀가 딸 소화에게 대물림굿을 장만한 것은 해방되기 이 년전이었다. ~~~ 그런 처녀가 무당이 될 대물림굿을 받는 것이고 마흔아홉 살의 늙은 어미무당은 울며울며 굿춤을 추었는데 ~~~ 대물림을 받은 열일곱 살 소화가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그런데 2권 12장에 소개된 소화의 출생담은 다음과 같다.

가슴에 허전한 구멍이 뚫린 것도 마흔으로 치달아가는 나이 탓만이 아니라 그 나이 되도록 피붙이 하나 갖지 못한 까닭인지도 몰랐다~~

이때 이미 월녀의 나이가 사십 줄이라고 했으니, 앞뒤가 어긋난다. 

 

제1장 정하섭이 벌교 외곽에 도착한 장면으로 돌아가자. 그는 우선 은신처로 어린 시절에 연모하던 무당 소화의 집을 선택하여 잠입한다. 그런데 병든 어미 무당 월녀와 함께 거쳐하는 소화의 집이 이상하다. 

그 기와집들은 현부자네 제각을 겸한 별장이었다. 그 자리는 더 이를 데 없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현부자네는 제각을 짓고 오 년이 다 못되어 살림이 거덜나고 말았다. ~~~ 현부자네가 망한 이유에 대해서 분분한 소문이 떠도는 가운데~~~ 호화로운 별장은 일시에 밤마다 귀신이 나오는 폐가로 변하고 말았다. 현부자의 소실들이 거처했던 기와집들은 인적이 사라진 채 문이 꼭꼭 닫혔고~~~ 밤마다 온갖 귀신들이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두 여자가 거기서 줄곧 살고 있었다. 무당 모녀였다. 현부자가 제각을 신축하면서 그들이 거처할 조그만 집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1권)

작가는 제각과 별장을 혼동한 것일까? 제각이란 무덤 근처에 제청(1. 장례식 때에 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마련된 곳 2. 제사를 올리는 대청) 소용으로 지은 집이니, 천하의 패륜아라도 제각을 별장으로 겸용하지는 않을 터이다. 명당 옆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을 짓고 거기에 첩 살림을 차리고 더구나 전속 무당까지 살게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희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작가는 왜 이러한 무리한 설정을 했을까? 아마도 정하섭의 은신처로서 이 괴기한 폐가가 임시변통으로 꾸며진 것 같다. 

 

소화가 사는 곳도 그렇지만, 그녀의 무적 성격에도 문제가 있다. 유명한 무당 월녀의 딸인 소화는 1943년, 그녀의 나이 17살 때로 "그녀의 딸 소화에게 대물림굿을 장만한 곳은 해방되기 이 년전이었다. ~~ 대물림을 받은 열일곱 살 소화가~~"(1권)라는 배경 설정이 나오는데, 한국의 향토 신앙에 따르면 이는 전라도 단골의 전형이 아니다. 

중부 이북은 신이 지핀 새 무녀인 신딸과 그 신딸을 가르치는 큰 무당인 신어머니 사이의 사제계승이다. 이에 비해서 전라도의 단골은 사제계승이다. 시어머니·며느리들, 여자가 무녀로서 ~~~ 남편들은 북, 장고 등의 음악 반주를 한다. ~~~ 고부계승제인 전라도 무속에는, 사제계승제인 중부 이북과 달라서~~~

이러한 점에서 모녀계승으로 설정된 월녀와 소화의 모습은 전라도 단골의 전형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쫓기는 혁명가, 폐가에 사는 미모의 무당, 신당에서 이루어지는 정사 - 이 작품은 서두부터 전설적 분위기 속에서 엽기적이다. 

엽기성은 2권 12장에서 소화가 정참봉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강화된다. 정참봉은 바로 정하섭의 조부이니, 소화는 하섭의 서고모이다. 소화의 어미 월녀와 하섭의 조부 정참봉의 결연담(2권 12장) 역시 작위적인데, 이 예사롭지 않은 결연이 더구나 딸까지 얻게 되는 지속적인 관계가 그처럼 감쪽같이 그 좁은 바닥에서 숨겨질 수 있을까? 그것이 다시 소화와 하섭, 곧 서고모와 조카 사이의 근친상간으로 이어지다니, 운명의 희롱치고는 참으로 끔찍하다. 

 

앞에 제시한 점들을 토대로 생각해 볼 때, 작가 조정래는 사건의 전후 사정은 배제한 채 단지 결과 위주로 서술함에 따라서 독자로 하여금 주요 사항의 간결 나열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진실과의 괴리감은 '소설'이라는 큰 울타리를 방어막으로 자연스럽게 흡수되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에서 작가의 의도와 개성에 따라 변용된 사실성을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독자의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행동이며, 반면에 진실을 왜곡한 작가의 노련한 속임수에 빠져들어 사고의 폭을 축소시키는 것 또한 독자의 미숙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글을 매개체로 한 작가와 독자 사이의 끌고 당기는 지적 탄력성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책 읽기의 깊은 묘미가 좌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는 작가보다는 오히려 독자 자신에게 부여된 작은 권리이며 동시에 의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층위 비장미의 인물 전형

조정래는 작품을 통해서 각 계층의 인물을 많이 등장시키면서 그들이 그들의 계급성을 대표하는 동시에 시대적, 역사적 전형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그것은 곧 인물의 개성과 독창성을 획득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요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물의 형상화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점을 내재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염상진이다. 그는 너무나 완벽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 비현실적 영웅화로 태어난 주인공으로, 지적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인간으로서 조금의 회의나 주저 없이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는 삶을 한치의 어긋남 없이 이끌어 간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장렬한 패배를 맞는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지만 그의 그 같은 삶의 여로는 영웅소설의 주인공들이 걷는 그것과 동질적이다. 그 여로의 성격은 출발 시 이미 규정되어 마지막까지 변화하지 않는다. 

 

물론 때때로 중요한 국면의 전환이나 전술 변화가 생기는 대목에서 염상진은 부하들이나 잠재되어 있는 민중 역량과는 고립된 채로 매우 고독하고 외로운 자기 상념에 곧잘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활동과 투쟁을 결정하는 대목은 토론보다는 주로 염상진의 독단적인 상황판단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이런 민중적 연대의 느슨한 고리와 그의 지식인적 고립성에도 불구하고 염상진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와 존경은 거의 절대적이다. 결국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인 등장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염상진의 경우는 철저한 민중적 지식인의 형상과는 거리가 있으며, 작가와 등장인물(염상진) 사이에 비판적 거리가 확보되지 않음으로써, 많은 부분에서 이상화된 주인공의 기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가 전개되면서는 그나마 전반부에 보여주었던 그러한 결속들은 급속하게 흐트러지고, 투쟁 과정에서 독특하게 맺어지는 개인적 인연이나 친분에 얽힌 삽화가 그것을 대신하게 된다. 한마디로 염상진은 너무 일찍 완결된 인물로 그려져 있으며, 그러한 완결성을 검증받거나 보완받을 수 있는 소설 내적 장치는 어디에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 완결성은 소설의 마지막에 염상진의 죽음으로서 종결된다. 이 점이 비극적 결말과 관련되는 염상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理想化' 방식과 관련이 깊다.

 

그에 비해 '염상구'의 형상화 방식은 비평가들이 하나같이 이 소설 전체를 통해 가장 훌륭한 인물형상의 전형을 이루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염상구는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다가오게 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염상구'가 완결된 인물로 그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지략과 총명함이 그것을 제한적인 것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총체적 인식의 결여나 지적 면모의 결핍과 훌륭하게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염상구는 이 작품에서 작가가 창조한 가장 탁월한 성격이다. 

 

염상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원칙은 "너는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너는 네 의무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보답을 바라고 있어서 기대하고 있는 바를 달성하지 못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잃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의 본성에는 복종은 주요한 덕이고 불복종은 주요한 죄라는 사실이 가로놓여 있다. 따라서 (복종하지 않으면) 그 벌은 아버지의 사랑의 철회이다. 

 

작품 전체를 통해 나타난 염상구의 사고와 행동의 원천은 자아개념 속의 자존감을 획득하지 못한 데서 나타난 자신의 존재 의식에 대한 가엾은 반항이다. 인정받지 못하는 실체, 소외당하고 있는 의식에 대한 비극의 발로인 것이다. 

그에게 나타난 여성편력 또한 일종의 투사현상으로 자신의 가치를 상기시키고자 하는 작은 발버둥으로 표출되며, 그가 형인 염상진과의 대립된 행동을 보이는 것은 자기가 실현할 수 없는 적응을 우수한 타인이나 집단과 동일한 것으로 느낌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동일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손을 싸잡은 경찰도 어리둥절해졌다. 상대방은 틀림없이 청년단장 염상구였던 것이다. 
"요런 개좆 거은 새끼덜아, 살아서나 빨갱이제 죽어서도 빨갱이여! 당장에 못 띠내리겄어!"
염상구가 두 경찰의 어깻죽지를 동시에 치며 외친 소리였다. 
그려, 그려, 니가 사람이다 하면, 느그 성인디.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호산댁은 솟구치는 서러움을 눈물로 쏟아내고 있었다. 워메, 워메, 아즘찮은거 시동상이 인자 사람이시. 예상이 뒤집히자 죽산댁도 비로소 고마움과 서러움이 범벅된 눈물을 줄줄이 흘리고 있었다. 
(중략)
"저것 띠나레라!"
염상구가 명령했다.

염상구가 보여준 마지막 행동은 이 책의 결말을 더욱더 돋보이게 한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염상구'라는 하나의 인간상을 우리는 결코 비난으로만 간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도 또한 역사가 낳은 비극의 한 희생자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 <태백산맥>은 우리 문학사의 어느 작품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작품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소설은 80년대의 산물로서 충분히 훌륭한 것이고, 보는 관점에 따라 그 당대적 제한성을 뛰어넘은 부분조차 지니고 있기도 하다.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도모하며 미래의 전망을 이끌어낼 예지를 어떻게 취하는가 하는 한 모범을 이 어려운 시기에 시사해 주고 있는 바로 그러한 작품인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작품 내의 사건 전개과정이 너무나 논리 주장적이기 때문에 작가의 독재적 전개 양상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특히 원인을 철저히 배제한 채 후반부로 갈수록 줄거리만을 나열하거나 배경 묘사에 치우침으로써 단지 결과 나열에만 급급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가 스스로 느끼고 작가와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공감대 형성의 폭을 축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의 최대 권리인 작품에 대한 사고의 기회를 무시하는 작가의 오만이다. 물론 이러한 전개 양상은 전체 글의 흐름을 위한 하나의 매개체 수단이기 때문에 형상화의 간결 서술이 어느 정도까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설이 단순히 결과를 정리하는 메모로만 끝나지 않으려면 작은 것의 세부적 진지함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지게 된 불만이며, 더 나아가 이제 태어날 새로운 소설들이 딛고 나아가야 할 한계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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