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버스인 바포레토(Vaporetto)를 타러 가기 전에 일찌감치 저녁을 먹어야 했다. 청동 코를 가진 조각상을 설명해주신 아저씨께 "이 동네는 참 조용하다."는 말씀을 드리자, 이 구역이 바로 게토라고 알려주셨다.
'게토(ghetto)'는 예전에 유대인들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은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과거 베네치아 정부는 유대인들이 청동 주물공장 근처에만 거주하게 했는데, 바로 오늘 내가 걸었던 이곳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유대인들을 보호한다는 취지였으나, 그 숨은 뜻은 유대인들을 감시하고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오직 3개의 다리를 통해서만 외부로 나갈 수 있다고 했는데, 내가 건너온 다리가 그중의 하나였나 보다.
베네치아의 또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던 이곳에서 작은 식당과 마주쳤다. 식당 바로 앞은 운하가 흐르고, 그 운하를 바라보며 앉을 수 있는 야외 테이블이 길가에 놓여 있었다.
손만 뻗으면 운하의 물살을 느낄 수 있는 야외 테이블 대신 나는 실내 분위기도 궁금해서 식당 안으로 자리를 잡았다. 알라 폰타나(alla fontana)라는 이름의 트라토리아(Trattoria / 전통식당)인 이곳의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편안하고 친근한 분위기였다.
아직 저녁식사 시간 때라고 하기에는 어중간한 시각이라서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주인에게 밥을 먹을 수 있느냐고 묻자, 환하게 웃으며 맞이해줬다.
메뉴판을 갖다 주시며, 주인이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자신도 한국인 친구가 있다고 하면서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잠시 뒤에 어떤 아저씨가 급하게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주인아저씨가 그를 반기며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내가 말한 친구가 바로 얘야. 이곳에서 태어났어. 그래서 한국말은 할 줄 몰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아저씨를 나에게 소개해주셨다.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 반갑게 인사했다. 아저씨는 우리나라 말을 전혀 하시지 못했고, 영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주인아저씨가 옆에서 친구와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하시고는 나에게 영어로 다시 말씀해 주셨다.
아~~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밝게 웃으시는 아저씨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가는 것이 보였다. 단지 몇 분만의 만남이었을 뿐이었는데, 그런 아저씨를 보면서 나의 마음도 뭉클해졌다.
그리고는 일을 하다 전화를 받고 바로 달려오신 거라서, 다시 일을 하러 가셔야 된다고 하셨다. 그런 친구에게 주인아저씨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콜라를 꺼내시고는 마시면서 가라고 건네주셨다.
먼 이국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곳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어른이 되어서도 잠시 지나가는 한국인을 보며 반가워하시는 마음은 무엇일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우리나라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애잔했다.
그러고 보니, 이러한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나와 주인아저씨는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메뉴를 고르지도 못한 나는 우선 베네치아의 전통 칵테일인 스프리치(Spritz)를 주문했다. 이곳의 스프리치는 더욱 진한 향이 풍겼다.
내가 선택한 베네치아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Tagliata Di Tonno(참치 스테이크)와 Ravioli Au Potiron(라비올라)이다. 두 가지 음식을 다 먹을 수 있을지 잠시 망설였지만, 왠지 하나만 선택하기에는 서운했다. 베니스를 떠나는 지금 이 정도는 먹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촛대 대신 와인병에 초를 꽂아 놓은 것을 보고는, 스프리치를 주문했지만 이탈리아의 와인 한잔을 마시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내내 아쉽게 느껴졌다.
내가 주문한 참치 스테이크와 라비올라이다. 참치 스테이크를 입에 넣는 순간, 그 부드러움에 말문이 막혔다. 늘 회로만 먹던 참치를 이렇게 스테이크로 맛보니 색다르게 느껴졌다.
라비올라는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맛이 깔끔해서 좋았다. 참치 스테이크가 조금 느끼하다고 여겨질 때 라비올라를 번갈아 먹으니, 입속이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참치 스테이크와 라비올라까지 두 가지 메뉴를 함께 먹게 되니, 감자도 많이 먹지 못했고 식전 빵도 하나밖에 뜯지 않았다. 내가 식전빵도 감자도 잘 먹지 않자, 주인이 다가와서는 입맛에 맞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절대 아니라고, 혼자서 먹다 보니 배가 불러서 그렇다고 말했다.
만약 시간적인 여유가 좀 더 있었다면, 나는 이곳 알라 폰타나에서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머물렀을 것이다. 식당 바로 앞의 운하 옆에서 노을도 바라보고, 밤이 되면 촛불까지 밝힌 한층 운치 있는 풍경들을 즐겼을 것 같다.
음식도 맛있어서 다른 메뉴들도 맛보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는 식사와 좋은 분위기, 친절한 주인까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던 베네치아에서의 마지막 만찬.
베네치아에서의 여행은 소소한 일상 같은 평온함이 느껴졌던 시간들을 보낸 것 같다. 일상과 여행이 교차하는 그 순간, 나는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여행은 떠나기 위한 것일지도, 또한 돌아가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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