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나침반/그 곳

진주성 촉석루에서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난짬뽕 2022. 10. 7.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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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에 업무와 관련해서 진주에 가게 되었다. 진주는 처음 가보게 되었는데,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이 드는 도시였다. 그리고 지난주에도 1박 2일로 다시 다녀오게 되었다.

 

처음에 진주에 갔을 때에는 경황이 없어 차 안에서 진주성을 바라만 보기만 해서 많이 아쉬웠었다. 그런데 함께 일하고 있는 담당자께서 진주까지 왔으니 진주성은 꼭 봐야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셔서,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진주성에 가게 되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첩(진주대첩,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의 현장이자,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였다.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과 3,800여 명의 군사와 성민의 힘으로 왜군 3만여 명을 상대로 크게 이겼으나 그다음 해, 왜군 9만여 명이 재침하여 7만의 민관군이 순절한 장소이다. 

공북문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와 진주지도에 북쪽으로 나 있는 문이다. 공북문의 공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고, 북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를 뜻한다. 따라서 공북문은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문이다. 

 

공북문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이며, 주 출입문으로 도청 격인 관찰사영과 경상도 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주된 문이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임금님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백성들에게 소식을 알리던 자리라고 한다.

 

나는 공북문을 지나 성곽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성 안 곳곳에 아기자기한 등들이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10월 10일부터 21일까지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빛으로 되살아난 진주성'이라는 주제로 진주성 역시 아름다운 빛 축제가 펼쳐진다니, 가을밤의 정취가 저절로 느껴질 것만 같았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를 보러 올라가는 길목에는 기품이 느껴지는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김시민 전공비(왼쪽)와 진주 촉석 정충단비(오른쪽)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이다. 김시민 장군의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한 것이 바로 김시민 장군 전공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고목사김후시민전성각적비'라고도 부른다.

 

선조 임금은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을 무찌른 공으로 김시민 장군에게 선무공신교서를 내렸는데, 이는 보물 제1476호로 지정되어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 옆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가 있다. 촉석정충단비는 임진왜란 당시 계사년(1593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조선 숙종 12년(1686)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인물에 대해 기술하고,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호국종각

호국종각은 진주성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문화재 육성 기금으로 1980년에 제작한 범종이다. 종신에는 각종 문양이 부조되어 있고, 이은상 시조 시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종신은 2.7m, 지름은 1.7m이며 매년 연말에 제야의 종 타종 행사를 호국의 종각에서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호국종각의 오른쪽에는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이 있는데, 이는 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계사년에 순국한 7만 민관군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제단으로 1987년에 세워졌다. 

 

1592년 10월 임진왜란 진주성 1차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800여 명이 왜군 3만여 명에 맞서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친 임진년의 진주대첩을 기리고, 그 이듬해인 1593년 6월 진주성 제2차 전투에서 성안의 민관군이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절한 의로운 넋을 기리는 장소라고 한다. 

촉석루

진주성의 남쪽 벼랑 위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촉석루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66호이다. 신발을 벗고 올라갈 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앉거나 서서 남강을 바라보았다.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서 참 좋았다. 단, 촉석루에서는 음식물과 술은 반입할 수 없고, 엠프나 악기 등을 이용하여 연주하는 것은 안된다고 준수사항이 적혀 있었다. 

 

하륜의 <촉석루기>에 따르면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지은 까닭'에 누의 이름을 촉석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 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로, 또 과거를 치르는 고사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진주목사 기미대가 창건한 후 몇 차례 불타 없어졌고,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기도 했다. 1950년 6. 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국보 제276호였는데, 전쟁 후 불탄 것을 진주 시민들이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어 국비와 도비, 시비와 시민 성금으로 1960년에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고, 2020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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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사

의기사는 조선 선조 26년(1593)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 사당은 영조 16년(1740)에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처음 세운 뒤 수차례 고쳐졌는데, 지금의 사당은 1956년 진주의기창렬회에서 힘을 모아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현판은 관찰사 이지연이 썼고, 진주 기생 산홍과 황현의 시판, 다산 정약용의 기문이 걸려 있다. 

 

논개의 영정은 처음에는 김은호의 작품이 모셔져 있었으나 화가의 친일 행적으로 철거되고, 지금은 2007년 표준 영정심의위원회에서 통과되어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받은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의암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인 의암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이다. 논개의 의열을 기리고자 진주의 선비와 백성들은 이 바위를 '의로운 바위'라는 뜻에서 '의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인조 7년(1629)에 진주의 선비 정대륭이 바위의 벽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의암사적비

의암사적비는 진주 관기 논개의 행적을 기록한 빗돌이다. 경종 2년(1722)에 세운 것으로, 진주의 선비 정식이 비문을 지었다.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진주 사람들의 입으로 전승되다가 1620년에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인조 7년에 정대륭이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영조 16년에는 사당인 의기사를 세웠으며, 그 이듬해에는 비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짓고 처마 밑에 '의기논개지문'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가족과 함께 온 어린 꼬마가 옆에서 엄마와 아빠에게 논개가 누구냐고 물었다. 의암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남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목숨을 던진 논개의 모습이 떠올랐다. 

성곽을 비집고 나온 저 돌은 무슨 용도였을까 궁금하다.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날이라서 진주남강유등축제를 보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국종각 앞에 로봇 태권 V와 로봇 깡통의 모습이 보인다. 남강유등축제의 프로그램 중 많은 사람들에게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바람의 뜻을 전하는 평화존 등이라고 한다. 

진주성 성도

돌담길 아래에서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진주성의 옛 모습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27년 촉석루

우물가 건너 광장에서는 '평화와 치유' 초성 등으로, 나무 등과 물고기(잉어) 등의 조화로 여유로움을 더하는 힐링존이 조성되어 있었다. 

10월 10일 진주성대첩 승전일이자 '시민의 날'을 기념하여, 이번 축제의 모토인 평화를 위한 숭고한 투쟁의 정신을 기념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마련된 역사존은 야외공연장 주변에 만들어져 있다. 

통통한 저 아저씨의 얼굴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몇 배나 컸지만, 참 귀여웠다. 

진주남강유등축제는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저지하고,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남강에 유등을 띄운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역사의 강 평화를 담다'는 주제로, 진주성과 진주 남강 일원에서 10월 31일까지 열린다고 한다. 

영남포정사 문루

영남포정사 문루는 진주성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이며, 망미루라고도 불렀다. 진주목 시대에는 진주성 내성의 관문이었고, 고종 32년(1895) 관찰부가 설치될 때는 진주관찰부의 관문으로 영남의 정사를 선포하는 행정중심지를 뜻하는 말로 '영남포정사'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1896년 진주관찰부가 경상남도청으로 바뀌면서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의 정문으로 사용되었으며, 1925년 도청 소재지가 부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도청의 정문 역할을 했다고 한다.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고, 2020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이밖에도 진주성에서는 쌍충사적비와 북장대, 진주성 우물,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포루, 국립진주박물관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볼거리가 많았는데, 시간에 쫓겨 모두 둘러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김시민 장군 동상

2000년 1월 1일 제막한 김시민 장군의 동상은 높이 7m, 면적 255㎡이다. 김시민 장군의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 시호는 충무이다. 무과에 급제, 훈련원 판관이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가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천, 고성, 진해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금산(김천)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왜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진주목사가 되어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하고 대첩을 이루었으나, 이마에 적탄을 맞고 순국했다. 

 

진주성은 <한국관광 100선>에 4회 연속 선정되었으며, 촉석루는 2012년 미국 'CNN GO'에서 선정한 한국관광지 BEST 50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사전 예약제로 관광 해설사의 안내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좀 더 깊이 있게 둘러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진주성 개방시간

하절기(3월~10월)  05:00~23:00 / 동절기(11월~2월)  05:00~22:00


입장료

유료: 성인 2,000원 / 청소년 1,000원 / 어린이 600원

무료: 진주시민, 6세 이하 어린이, 65세 이상 어르신, 장애인복지카드, 국가유공자증 소지자


주차안내

진주성 주차장(진주시 남강로 626)

유료: 공복문 주차장, 종합사회복지관 옆 주차장

무료: 진주성 관광버스 주차장(서문매표소 도로 건너편)


주차료

소형: 500원(30분 초과 시 매 10분마다 200원)

대형: 1,000원(30분 초과 시 매 10분마다 400원)

 

다음에 진주에 다시 갈 기회가 있다면, 그때에는 천천히 진주성을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으로만 읽었던 김시민 장군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이 알게 되었다. 특히 촉석루에 앉아 남강의 바람을 시원하게 느끼며, 처음 오게 된 진주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진주의 상징인 진주성을 또 만나고 싶다. 

진주성 야외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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