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지난주 점심시간에 회사 앞의 자주 가는 백반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그리 크지 않은, 4인용 테이블만 여섯 개 놓인 그곳은 노부부가 오래전부터 꾸려온 작은 식당이다. 아내는 주방에서 주문받은 음식들을 만드시고, 남편은 서빙은 담당하신다. 이곳의 제일 인기 있는 메뉴는 오삼불고기이다. 물론 여러 가지 메뉴들이 있지만, 열의 아홉은 모두 이 음식을 먹고 있다. 처음 식당을 준비하실 때, 제일 먼저 시도하신 것이 바로 이 메뉴였다고 한다.
이 식당은 오삼불고기만 인기 있는 것이 아니다. 주방으로 향하는 길목의 벽면에는 화장대와 비슷한 조그마한 탁자가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참 오래되었다 싶은 빛바랜 검은색 카세트테이프가 올려져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갈 때마다 늘 카세트테이프에서는 그 옛날의 오래된 노래들이 흘러나오곤 한다.
♬ ♬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오삼불고기를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하면서 흘러나오는 가사를 속으로 읊게 되었다. 함께 밥을 먹는 후배들이 나에게 이 노래의 제목을 물어보았다. <세월이 가면>이라고 내가 말하자, 옆에 있던 초딩 아들 둘의 아빠가 나에게 말했다. "어, 그런데 가사가 이상하네요. 제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데요."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밥은 네 명이 같이 먹고 있었는데, 이 노래를 알고 있는 것은 나 하나뿐. 모두들 최호섭 가수의 <세월이 가면>만 알고 있었다. 그 노래는 1988년,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 박인희 가수의 <세월이 가면>이 발표된 해는 1977년. 아~~~ 가끔씩 세월이 몸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이 노래는 도시 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시로 표현했던 박인환 선생의 <세월이 가면>을 노래로 만든 것이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세월은 가고 오는 것~~~'이라는 어휘만 들어도 떠오르는 <목마와 숙녀>로 잘 알려진 박인환 시인. 그는 1956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일주일 전에 그의 시 <세월이 가면>이 노래로 만들어졌다.
박인환 시인은 1926년에 태어났으니, 향년 29세. 너무나 젊은 날에 떠나갔다. 생전에 위스키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좋아했던 그의 시를 다시 한번 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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