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매 순간 해야 하지만,
생각에 빠지면 죽어.
<파쇄> 중에서 / p 10
지난 5월 초, 구병모 작가의 장편소설인 <파과>가 일본에서 제15회 미스터리 번역 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파과>의 외전인 단편 <파쇄>도 다음 달 6월 하순에 일본어판이 나올 예정이라고 했다.
얼마 전 소설 <파과>를 흥미롭게 읽었던 나는 외전 <파쇄>의 내용도 궁금했었지만, 이러저러한 게으름을 피우다 보니 바로 읽지는 못했었다. 마침 지난 주말 도서관에 갔다가 <파쇄>를 빌려오게 되었다.
파쇄
- 지은이: 구병모
- 장편소설 <파과>의 외전
- 초판 1쇄 발행: 2023년 3월 8일
- 펴낸곳: (주)위즈덤하우스
그녀는 두 개의 손 안에 한 세상을 움켜쥐고 부숴버린다. 세상은 불과 한 번의 총성으로 인해, 짓무른 과일처럼 간단히 부서진다. 그 파열음이 벼락처럼 귓전을 갈기지만 그녀는 소리에 무너지지 않는다. 눈앞이 맵다. 이걸로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고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 목에서 피를 흘리는 짐승이 코앞에서 나자빠져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색색, 숨을 몰아쉬고 그것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그녀는 한 발을 더 써서 숨통을 끊어버린다. 손안에 쥔 - 애당초 쥔 게 있었던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 과일과 같은 세상은 씨앗조차 남지 않고, 과육은 진작 분해가 끝난 시신과 같은 흔적도 없다. p 84-85
이 작품 <파쇄>는 소설 <파과>의 외전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먼저 <파과> 작품을 접하고 난 후에 읽는 것이 문맥의 전후 흐름을 이해하기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파과>를 읽지 않고 바로 <파쇄>를 읽게 된다면,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 '쓸모 있는 업자가 되는 데에 필요한 기술 연마서' 정도로만 여길 수도 있겠다고 느껴졌다.
실제로 이 책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과 묘사는 모두 깊은 산중에서 치러지는 '킬러들의 합숙 훈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 <파쇄>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단순한 시간적 전개와 이야기의 흐름이 결코 아니다. 소설 <파과>의 주인공인 그녀 자신이 험한 세상의 한가운데에서도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단단한 감정에 대해 무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파과>의 주인공인 예순다섯의 여성을 이 책 <파쇄>에서는 10대의 소녀로 만나보게 된다. 의뢰인의 부탁을 받아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살아가는 방역업자, 조각. 40년 넘게 청부 살인을 해온 그녀는 냉혹한 킬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린 마음을 지닌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파쇄>에서 그 완벽하지 않은 주인공과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에 단단하게 머물러 있는 앙금 같은 돌덩이까지.
그의 말이 공이가 되어 뇌관을 때리는 바람에 그녀는 끝내 통곡하고 만다. 몸 안에서 이제 막 펼쳐진 깃발이 구조 요청이나 항복 선언처럼 나부낀다. 앞으로 수많은 시체의 산을 쌓아나갈 손, 자르고 찌르고 태워버릴 불모의 손, 과녁 아닌 생명을 쏘고 나서야 약탈과 섬멸의 언어로밖에 표현할 길 없는 삶을 시작했음을 알게 되고 지나온 보통의 시간과 평생을 걸쳐 이별하게 되리라는 예감, 높은 확률로 예정된 자기 침몰의 방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죽임으로써 무릎 아래 깔린 사람을 살려낸 손이라는 총체적 아이러니가 콧속을 시큰하게 찔러오다 뒤흔든다. p 89-90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구병모 장편소설 <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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