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의 사랑에 대한 감정과 그 기복들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긴다는 건 일상생활에는 재앙일지 몰라도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사랑을 믿다>는 2007년 여름 「한국문학」에 발표된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그 이듬해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대상작으로 선정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권여선 작가의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은 꽤나 놀랄 만한 소식으로 기억된다. <사랑을 믿다>와 함께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작품으로 박민규의 <낮잠>, 정영문의 <목신의 어떤 오후>, 천운영의 <틈> 등이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가자, 그동안 잔잔하게 독자층을 형성해 나가던 소설가 권여선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다.
그에 대해 이상문학상 측은 권여선 작가의 <사랑을 믿다>가 대상을 받게 된 이유에 대해...... "<사랑을 믿다>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감정과 그 기복을 두 겹의 이야기 속에 감추고 있다. 이 작품은 서사의 기본이 되는 '드러내기'와 '숨기기'의 방법 가운데 특히 '숨기기'의 방식에 역점을 두고 있다. 권여선이 보여주고 있는 서사의 기법은 소설이 빠져들기 쉬운 상상력의 경솔함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심사위원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라고 전했다.
<사랑을 믿다>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연애의 실패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바로 자신들이 서로 모른 채 지나쳐버린 사랑의 느낌을 알아차린다...... 는 내용이다.
<사랑을 믿다> 책 속의 문장들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온 인류가 그런 일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손쉽게 극복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른 채 늙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드물게는, 상상하기도 끔찍하지만, 죽을 때까지 그런 경험만 반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삶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겼다는 건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지만 청춘에 대해서는 만종과 같다. 사랑을 믿던 한 시기가 끝났으며,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지금 서른다섯이라는 인생의 한낮을 지나고 있다.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거리지만 이미 저묾과 어둠을 예비하고 있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멜로디가 있다. 이십 대 후반 무렵 나만큼이나 겁이 많고 감정에 인색했던 그녀가 내게 보내온 사랑노래는 매우 낮은 음역의, 들릴 듯 말 듯한 작고 희미한 멜로디였으리라. 나는 그것을 나와 무관한, 그녀의 희한한 개성으로 간주했다.
...................................................................................................................................................................................................................................................................................................................................................................................................................................................................................................................................................................................................
스물아홉의 봉우리에서 그녀는 너무 일찍 철들었고 다가올 어둠에 너무 일찍 눈이 익어버렸다.
...................................................................................................................................................................................................................................................................................................................................................................................................................................................................................................................................................................................................
삼 년 전 그녀는 이미 오후를 사는 사람의 나른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지금의 내 대낮 같은 기다림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작은 노랫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다른 여자의 높고 새된 노래에 혹한 내 귀의 어두움에서 비롯된 일이다.......................................................................................................................................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기억 속에 드러난 어긋난 사랑
헤어지기 전 그녀가 나에게 "괜찮지?"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 나는 "괜찮네."라고 답한다. 괜찮지? 괜찮아. 이제 모든 것이 소소한 과거사가 되어 버린 지금에, 소설 속 나는 정말 괜찮아졌다고 느낀다.
연인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렇지 못했던 나와 그녀. 그녀는 나에게, 나는 다른 여자에게 실연을 당한 후 3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이미 사랑을 믿던 한 시기가 끝나 있었으므로 무엇인가 놀랄 만한 영화 같은 스토리도 전개되지 않았고, 열린 결말로 이어질 희망도 작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는 마지막 문장으로 이 소설은 마무리된다.
오래전 그때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그러한 마음을 보여주지 못한 그녀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뒤늦게 그녀에 대한 사랑을 알아차려버린 나는 다시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 여자와 그 남자가 대화 속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지금에서야 나누는 이야기들은 과연 사랑일까? 시작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긋난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던 그녀와 나는 결국 이 책에서 아무런 일도 벌일 수 없었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소설은 끝난다.
권여선 작가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사랑을 믿다> 이 소설 역시 결말은 오로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누군가는 이 소설의 제목처럼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을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들은 사랑을 믿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이 소모적인 논쟁은 어쩌면 불필요한...... 왜냐하면...... 그냥...... 사랑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고유명사이므로......
권여선 단편소설집 <각각의 계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의 진실
'그 모든 아름다움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병모 단편 <파쇄>, 장편소설 <파과>의 외전 (142) | 2024.05.30 |
---|---|
마티아스 뇔케 삶을 위한 안내서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 (162) | 2024.05.29 |
이꽃님 장편소설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그날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157) | 2024.05.10 |
일상에서 작은 희망을, 김창완 에세이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140) | 2024.05.07 |
문학과 지성사 김혜순 시집 <날개 환상통> (147) | 2024.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