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 지은이 / 한강
- 표지 사진 / 이옥토 'a paper', 2019
- 디자인 / 박정민
- 초판 1쇄 발행 / 2007년 10월 30일
- 펴낸곳 / (주)창비
세 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쓰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그렇게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고,
종내에는 스스로 식물이 되었다고 믿으며
물 외에 어떤 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
여주인공 영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습니다.
사실상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혜와 인혜 자매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악몽과 부서짐의 순간들을 통과해
마침내 함께 있습니다.
이 소설의 세계 속에서 영혜가 끝까지 살아 있기를 바랐으므로
마지막 장면은 앰뷸런스 안입니다.
타오르는 초록의 불꽃 같은 나무들 사이로 구급차는 달리고,
깨어 있는 언니는 뚫어지게 창밖을 쏘아봅니다.
대답을 기다리듯,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 노벨문학상 강연 중에서 -
불편한 소설, 채식주의자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모두 세 편의 중편소설이 이어진 연작소설이다.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 <나무 불꽃> 작품은 그 발표 시기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며, 각기 저마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세 작품을 한데 모으면 이야기의 줄기가 같은 하나의 장편소설로 몸집이 커진다.
작가가 2022년에 새로 쓴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출간 후 십오 년의 시간이 세찬 물살처럼 흐르는 동안, 고백하자면 이 책에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세간의 관심도 오해도 뜨겁고 날카로워,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채식주의자>는 논란이 적지 않은 작품이었다. 독자들의 호불호가 많이 갈렸고, 청소년 유해도서로 지적되어 모 교육청이 학교 도서관에 폐기 논의를 권고하기도 했다.
사실 이 책의 흐름과 문장들 속에서 읽어 내려가기 거북한 부분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콧소리를 섞어 내는 처형과의 통화가 성적인 긴장감을 준다는 표현들이나, 처제에게 욕망을 느껴 육체적 관계를 맺는 형부와 그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장면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동생과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의 등장 부분에서는 많은 독자들이 거북함을 느끼기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친정 식구들과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가족들은 영혜에게 고기반찬을 먹이려 든다. 그러한 가운데 영혜의 아버지는 큰 소리로 채근하다가는 딸의 뺨을 때리면서 그녀의 입에 탕수육을 억지로 밀어 넣는 장면이 있기도 하다.
나는 너무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장면이 있는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혹이라도 그런 영화를 보게 되면 잔상이 크게 남아 한동안 괴로움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래전에 <채식주의자>를 처음 접했을 때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이 책의 두 번째 시리즈인 <몽고반점>이었다.
<채식주의자>가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후, 나는 다시 이 책을 펼쳤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 30,000부에 그쳤던 판매량은 맨부커상 수상 이후 단 3일 만에 320,000부를 돌파했고, 한강 작가의 다른 책들까지도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는 <채식주의자>를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었다.
그때보다 또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다시 이 책을 펼쳤다. 예전과 같이 이 책을 보기가 여전히 불편했지만, 그래도 보다 담담해진 마음으로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책장을 비로소 넘기게 되었다.
수록작품 발표 지면
- 채식주의자 /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 몽고반점 / 문학과사회 2004년 가을호
- 나무 불꽃 / 문학 판 2005년 겨울호
<채식주의자> 줄거리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은 각각 영혜 남편인 '나'의 시선으로 시작하여,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인 비디오아티스트 '나'의 시선으로 이어지며, 마지막에는 인혜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1부 <채식주의자>
평범하고 별다른 매력이 없는 아내 영혜는 남편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다. 밥을 차려주고 약간의 경제적 도움을 주며, 남편의 늦은 귀가에도 불평함이 없고, 가끔씩 남편과 잠자리를 하는 아내이다. 남편에게 영혜는 인간적인 존재감보다는 아내라는 역할에 충실한 도구적 존재에 불과했다.
어느 날 꿈에 나타난 끔찍한 모습으로 인해 육식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아내의 모든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은 처가 식구들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언니 인혜의 집들이에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고, 그녀의 아버지는 강제로 영혜의 입에 고기를 넣으려고 한다. 혼란스러운 그 상황에서 영혜는 손목을 긋는다.
2부 <몽고반점>
영혜의 언니, 인혜의 남편은 비디오아티스트이다. 어느 날 아내에게서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까지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처제의 몸에 대해 욕망을 느끼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위해 영혜를 이용한다. 영혜를 찾아가 자신이 작업하는 비디오작품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한다. 영혜의 몸에 꽃을 그리고,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듯한 포즈를 취하게 하며, 자신의 욕망을 누르지 못해 처제 영혜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그 당시 영혜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뒤 남편과도 이혼을 한 상태로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형부로부터 모델이 되어 달라는 부탁에 스스로 옷을 벗고 자신의 몸에 형부가 꽃그림을 그리게 한다. 형부가 부탁한, 다른 남자와의 유사 성관계 행위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의 욕정을 참지 못하고 처제와 성관계를 한 다음날 아침, 동생 영혜의 집에 들른 인혜는 벌거벗은 자신의 남편과 동생 영혜의 모습과 맞닥뜨린다.
3부 <나무 불꽃>
영혜는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가족들 모두가 등을 돌린 상황에서 영혜를 살리고자 하는 인혜의 모습이 그려진다. 병원의 모든 노력에 거부하며 오직 죽고자 하는 영혜의 모습을 보여준다. 식음을 전폐하고 링거조차 맞지 않으려 하는 영혜는 자신이 곧 나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한다.
남편과 헤어진 후 아들을 홀로 키우는 언니 인혜는 자신의 현실이 너무나 힘들어 자살시도를 하기도 했다. 동생 영혜의 모습이 자신의 현실과도 오버랩된다.
폭력과 억압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p 237
이 책 <채식주의자>는 여러 모습의 폭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 의한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들에 대한 복종, 부부로서 가장 존중받아야 할 남편으로부터의 억압, 언니의 남편 형부와 성관계를 하게 된 가족 내 폭력에 이르기까지 책장을 넘기기가 어렵고 힘든 상황들이 많이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채식주의자>에서 말하고 있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폭력, 그로 인한 억압과 고통은 어쩌면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는 이분법에 국한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가장 가까운 가족일 수도 있고, 결혼생활이나 사회생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부모나 형제자매, 친구, 이웃, 심지어 온라인상의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영혜는 자신의 몸에 꽃이 그려지고 식물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에 숨을 쉬게 된다. <채식주의자>는 폭력과 고통을 다룬 책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폭력과 고통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그것들로부터 저항하며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 작품 모두를 읽어야 제대로 된 <채식주의자>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감정 소모가 많이 되고 불편하지만, 한 번쯤 마주해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채식주의자>가 던진 질문들
* 우리 사회에서 누가 사회적 약자인가.
*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무엇인가.
* 이 책의 등장인물 중 가장 폭력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기준에서 우리는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는가.
* 누군가의 폭력 앞에서 우리는 방관자가 되지는 않았는가.
한강
1970년 겨울에 태어났다. 1993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4편을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흰> <작별하지 않는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이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 참여 작가로 선정되었다.
한국 작가 최초로 인터내셔널 부커상, 말라파르테 문학상, 산클레멘테 문학상,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2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강 <희랍어 시간>, 철학책을 읽는 듯한 삶의 문제의식들에 대한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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