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
- 지은이: 이호
- 초판 1쇄 발행: 2024년 12월 23일
- 펴낸곳: 웅진지식하우스
모든 의사들이 사람을 살리려 하지만,
저는 이미 사망한 사람을 통해
놓친 것이 무엇일까를 되짚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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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자로서의 세월은 죽음보다 주검을 마주해온 시간이었다. 주검을 마주하기 전 고인의 삶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먼저 검토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느낀 단상들을 글로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애써 기억해야만 하는 죽음, 반드시 전해야 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간 죽음, 조금만 주의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죽음, 남은 사람들의 자책감을 덜어주어야 하는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p 8-9
몸을 통해 전하는 마지막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은 수천의 인생을 마주했던 법의학자 이호 교수가 그들의 시신을 부검하며 깨닫게 된 삶의 철학을 담담하게 풀어놓은 책이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그들 삶의 가장 마지막 순간의 대변인으로서 죽음에 대한, 그리고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함께 들려준다.
고인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순간, 이호 법의학자는 부검할 때 놓치는 부분이 없도록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복강을 열었을 때 스쳐 지나가는 어떤 특이한 냄새를 통해 사인을 유추할 수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1989년 조선대학교 학원민주화운동을 주도하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지명 수배되었던 이철규의 시신이 실종된 지 일주일 만에 광주시 청옥동 제4수원지에 떠올랐다. 국과수에서 부검이 진행되었고, 나흘 뒤 '익사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발표를 듣고 당시 학생이었던 이호 교수는 분노한다.
누가 봐도 고문에 의한 죽음이었음에도 국과수 법의학자가 진실을 왜곡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철규 열사 사건을 계기로 그는 부당한 외압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진실을 밝힐 의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는 이호 교수가 법의학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 얼마 후 군입대를 앞두고 있을 때 전남 장성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부 분소로 발령을 받은 그는 자신이 그토록 분노했던 이철규 열사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고, 우리 사회 격변의 시기에 법의학자가 국가 권력의 편에 섰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법의학자는 때로는 죽은 이들을 위한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의 과실로 사랑하는 이를 보내서야 안 되지만, 그 가족을 더욱 괴롭혔던 것은 죽음을 가리고 있던 거짓이었다. 거짓을 밝히기 위해 싸움을 시작한 아버지를 그 누가 도와줄까. 죽음 앞에서 유족들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들이 많다. 그때 내가 같이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싸움을 시작할 때 뒤에 있어주고, 오해가 있다면 풀어주고, 억울하다면 같이 맞서줘야 하는 것까지 나의 일이다. p 92
첫 부검을 마치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아프거나 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사망했는데 뭔가 이해되지 않고 미심쩍다면, 누군가가 나서서 제대로 이해시켜줘야 하지 않을까? 죽음의 진실을 자세히 밝혀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객관적 진실을 전하되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그날, 유가족과 병원을 중재해줄 기관의 필요성을 절실이 느꼈다. p 99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에서 이호 교수는 법의학자로서 그동안 만났던 죽음들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한 시대를 버텨냈던 우리의 역사 속 인물들은 물론 안타까운 개인들의 이야기도 소개된다.
그중에서도 보험금을 노려 아내의 머리를 쇠파이프로 내리치고, 그것도 모자라 정수리 한가운데를 드릴로 뚫고는 낙상 사고로 위장한 남편을 보고는 너무 잔인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또 다른 보험사기를 계획했던 남편의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일 년 전 죽은 아내의 시신을 살펴보기 위해 파묘를 했는데, 놀랍게도 아내의 시신이 거의 부패하지 않고 시랍화가 되어 있어 진실을 밝힐 수 있었다고 한다.
치료만 하는 케어를 넘어 동반하는 큐어가 필요하다. 상실의 아픔을 개인에게만 맡기지 않고 보듬어 안으면서 동반해주는 것, 혼자 일어서기 힘들 때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 이런 문화와 시스템, 그리고 정책이 절실하다. 사회적 약자와 상처받은 자를 외면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p 205
법의학자가 쓴 책이라고 해서 내용이 무섭거나 하지는 않다. 이호 교수는 이 책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에서 죽음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삶이 아닌 죽음에서, 우리 모두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래서 이 책은 '한 법의학자가 수천의 인생을 마주하며 깨달은 삶의 철학'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삶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는 개개인들이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다만 우리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까지 하루하루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결코 당연한 것은 없다. 매 순간마다, 나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모든 죽음들을 통해 내가 배우게 되는 교훈인 것 같다.

생각을 던지는, 책 속의 문장들
최근 심리학회에서 발표된 흥미로운 논문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끝끝내 생존한 사람들은 평소에 강한 인내심으로 많은 고난을 극복해 왔던 사람들이 아니라, 고난이 닥치기 전까지 행복했던 시간이 많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는 순간에도 그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행복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그동안 삶 속에서 바로 그 행복을 자주 경험한 사람들이다. p 123
사람은 두 번 죽는다. 첫 번째는 생물학적으로 숨이 멎었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었을 때다. 즉, 누군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 그 사람의 존재는 완전히 잊혀지게 된다. p 141
검토 시스템이 없다는 것. 객관적으로 사고를 다시 고찰해보는 과정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어떤 과정에서 장애가 발생한 것일까? 혹시 다른 방법으로 사고를 처리할 수는 없었을까? 이런 식으로 사건을 탐구하고 분석하고 의문을 제기해야 진짜 문제를 찾아낼 수 있다. 따라서 시스템의 결함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안전을 위한 국가적 시스템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p 194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 버티는 삶은 불안으로 가득하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불안은 점점 커지게 마련이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즉 죽음을 수용한 상태에서 삶을 다시 바라보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해가 뜨면 일어나 학교에 가고 출근하듯이,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듯이. 때가 되면 태연히 삶을 끝내고 갈 뿐이다. p 222
어떤 태도로 사느냐에 따라 죽음의 모습이 달라진다. 또 얼마나 좋은 죽음을 맞느냐에 따라 좋은 삶이 결정된다. 죽음에 대해 조금은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문화, 고독한 이의 죽음을 함께 나누는 문화, 삶만큼이나 죽음도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문화가 확산되면 좋겠다. 행복하게 사는 것 못지않게 죽음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p 232

법의학자 이호 교수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전북대병원에서 병리학 전문의 수련을 마치고 1998년부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법의학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국과수에 파견된 첫날부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사건' 등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대형 참사 현장에 투입되었으며, 이후로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으로 남은 대형 참사 현장 수습에 발 벗고 나섰다.
또한 수사기관의 잘못으로 애꿎은 시민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삼례 나라슈퍼 사건'과 '약촌오거리 사건' 등의 재심 과정에서 법의학자로서 진실을 밝히는 증언을 하여 피해자들이 누명을 벗고 재심에서 승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04년부터 모교인 전북대 의대에 교수로 임용되었고, 현재 학생들을 가르치며 전북 지역에서 발생하는 변사 사건들의 부검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까지 30여 년간 약 4천여 건의 시신을 부검하며 법의학자로서 억울한 망자들의 마지막 대변인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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