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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희랍어 시간>, 철학책을 읽는 듯한 삶의 문제의식들에 대한 질문들

난짬뽕 2025. 2. 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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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지은이: 한강
  • 1판 1쇄: 2011년 11월 10일
  • 펴낸곳: (주)문학동네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p 44

 

침묵 속에 갇힌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상실과 고통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을 읽는 내내, 나는 작가가 이 책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서도 왠지 철학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은 침묵 속에 갇힌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작품 속에서 그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상실과 고통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 속에서 다소 복잡하게 교차되며, 그러한 상처가 일상에서 어떻게 버텨내지고 있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서로의 아픔을 함께하며 삶의 연약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고단한 기억들과 고통스러움을 우리들의 삶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꾸만 일깨워주는 듯하다. 그래서 <희랍어 시간>은 2백 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작품이었지만, 나에게는 깊은 울림과 여운을 안겨준 무겁고도 묵직한 책이었다. 

 

거듭되는 작가의 질문과 질문들

한강 작가는 <희랍어 시간>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거듭 질문과 질문을 계속한다. 나는 그러한 작가의 질문들이 문장 속에서 터져 나올 때마다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그것들에 대한 대답들을 찾아보느라, 이 책을 읽는 속도가 빠르지는 못했다. 그래서 읽어 내려가기가 결코 녹록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이나 표현들, 문장의 흐름과 어휘들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문체는 담백하게 건조했고, 생소한 언어유희를 펼친 것도 아니었으며, 소재나 주제 역시 어떠한 꼬임 없이 평면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나의 감정적인 소비는 매우 컸던 것 같다. 

 

그것은 작가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건넨 질문들이었을까. 아니면, 한강 작가 스스로에게 던진 문제의식이었을까. 문장만 읽어 내려가면 그냥 쉽게 읽힐 책일지도 모르겠지만, <희랍어 시간>은 행간을 읽어야만 그 깊이를 안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실과 고통을 버텨내는 깊은 울림과 여운

소설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감정에 흡입되는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희랍어 시간>을 읽는 동안 두 주인공들의 감정이 나에게로 다가오는 길은 울퉁불퉁 순탄하지 않았다. 그 여자와 그 남자 스스로에게 틈이 있었고, 또한 그들 두 주인공 사이에서도 간극이 있었지만, 독자로서 그들을 바라보는 나 사이에도 엄청 큰 파도가 일렁거렸다. 그래서 이 책은 빠르게 읽을 수 없었다.

 

따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이야기. 상처받은 이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 한국과 독일 사이를 오가며 서로 불규칙적으로 뒤섞이며 교차된다. 그래서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처음에는 매우 복잡하게도 느껴진다. 

 

이렇게 따로 평행선을 걷던 그 여자와 그 남자가 서로 겹쳐지는 지점은 책의 후반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이 서로를 의식하게 되는 계기는 우연히 날아든 새 한 마리를 통해 비롯된다. 그리고 그러한 그 둘의 만남은 서로에게 위로의 시간이 된다. 

 

그렇다면 한강 작가는 수많은 언어들 중에서 왜 '희랍어'를 선택했을까. 

동기가 어떻든,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걸음걸이와 말의 속력이 대체로 느리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아마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일 테지요). 오래전에 죽은 말, 구어로 소통할 수 없는 말이라서일까요. 침묵과 수줍은 망설임, 덤덤하게 반응하는 웃음으로 강의실의 공기는 서서히 덥혀지고, 서서히 식어갑니다.  p 40

 

그 여자에게 있어 희랍어는 어쩌면 다시 말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그리고 그 남자에게는 낯선 독일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 한 희망의 매개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인 '희랍어'는 이들 두 사람이 지금을 살아가게 하는 마지막 그 무엇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 속의 문장에서도 언급되지만, 희랍어는 '오래전에 죽은 말, 구어로는 소통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제목이 '희랍어 시간'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현실적으로 소통할 수는 없지만, 이미 그 여자와 그 남자는 희랍어를 통해 서로의 상처와 고통을 보듬어 주고, 더 나아가 내일을 향한 또 다른 삶을 함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희랍어 시간>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언의 대화를 통해 지난날의 상처와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해주는 치유의 순간이 아닐까 싶다. 

 

<희랍어 시간> 줄거리

4세 때 한글을 깨친 여자는 가장 작은 소리의 단위인 음운의 미세한 차이까지 구별할 만큼 언어적 감각이 뛰어나다. 그러나 갑자기 17세에 말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 그녀가 말을 내뱉게 된 것은 학교 불어시간, 한 단어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낯선 언어를 배우게 되면 말을 다시 내뱉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희랍어를 배우게 된다.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출생 과정과 어른들이 무심코 건넨 말에 상처받았던 유년시절, 그리고 이혼과 자녀 양육권에 대한 소송에서 남편이 끄집어낸 십 대 시절의 그녀의 정신과 기록 등에 이르기까지 여자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처 속에서 괴로워하며 침묵 속에 살아간다. 

희랍어를 가르치는 그 남자는 15세에 독일로 이민을 간다. 타국의 낯선 환경에서 희랍어를 잘하던 그는 주목을 받게 되어 그때부터 희랍어를 공부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질환인, 40대 전후가 되면 실명을 하게 되는 유전병을 갖고 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이러한 유전병으로 인해 시력을 잃게 되고 우울증에 빠진 모습을 성장과정에서 보게 된다. 그가 17세에 병원을 다니면서 보게 된 병원장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는 청력이 없어 필담으로 대화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들려달라는 말을 했다가 화가 난 그녀로부터 쫓겨난다. 함께 산행을 했던 친구를 잃게 된 사건 이후, 그 남자는 가족을 떠나 홀로 한국에 돌아와 희랍어 강사를 한다. 

이들 두 사람, 그 여자와 그 남자는 희랍어 수업을 계기로 만나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자신들의 상처와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희랍어 시간>이 우리들에게 건넨 질문들

 우리가 일상에서 위로받을 수 있는 소소함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심코 건넨 말 한마디에 대한 상처와 공포심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 폭력을 가하는 사람과 그 고통에서 괴로워하는 피해자의 삶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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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문장들

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 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 감촉 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p 8

당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희랍식 논증의 장식으로 이따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보이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p 43~44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했을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목소리, 당신의 목소리, 지난 이십 년 가까이 잊은 적 없는 소리.  p 44

완전한 어둠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갈 때, 이 끈질긴 고통 없이 당신을 기억해도 괜찮겠습니까.  p 49

캄캄한 암흑 속에서 수많은 변수들이 만나 우연히 허락된 가능성, 아슬아슬하게 잠시 부풀어오른 얇은 거품일 뿐이었다.  p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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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

1970년 이른 겨울 광주에서 태어났다. 열한 살이 되던 겨울, 서울 수유리로 옮겨와 성장기를 보냈다.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93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4편을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1998) <그대의 차가운 손>(2002) <채식주의자>(2007) <바람이 분다, 가라>(2010) <소년이 온다>(2014) <흰>(2016) <작별하지 않는다>(2021), 소설집 <여수의 사랑>(1995) <내 여자의 열매>(2000) <노랑무늬영원>(2012),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2013)를 출간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인터내셔널 부커상, 말라파르테 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산클레멘테 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대산문학상, 메디치 외국문학상,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 참여 작가로 선정되었다. 2024년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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