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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 필요한 인생의 마음 처방전, 조언

난짬뽕 2021. 4. 1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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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 필요한

인생의 마음 처방전

 

조언

 

 

누군가의 진심 어린 사랑과 관심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험난한 세상에서 한줄기 등불이 된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인생의 질문들에 대해서 답을 구할 때, 우리들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조언(助言)은 꼭 말이 아니어도 괜찮다.

글 엄익순

 

 

내 인생

최고의 조언

지금도 마른오징어와 귤을 먹을 때마다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 대학 입학 학력고사의 마지막 세대였던 나는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원한 대학이 어렸을 때부터 내내 선망했던 학교라서 무척이나 마음이 설렜다. 시험을 보고 난 후, 가채점한 점수가 예상했던 합격선보다 높았기 때문에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여유로웠다. 친구들과 선생님들로부터 미리 축하인사까지 받으며, 겨울방학을 맞아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 당일이 되었다. 아침부터 수험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한꺼번에 통화가 몰려서인지, 계속 연결이 되지 않았다. 연락을 주신 담임선생님의 합격은 당연하다는 말씀에 나는 불안감 없이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 날 저녁, 퇴근하신 아버지께서 오랜만에 산책을 가자고 하셨다. 오빠 둘이 있었지만, 막내딸이었던 나는 늘 가족의 사랑을 넘치게 받아왔다. 워낙 공부를 잘했던 오빠들은 타지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했지만, 그에 비해 나는 지극히 평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늘 나에게 질책보다는 칭찬을 더 많이 해주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도시의 고등학교로 나가 처음 받은 충격적인 시험성적을 보시고도, 오히려 부모님께서는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용기를 주셨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동네 어귀를 한 바퀴 돌았을 즈음이었다. "아빠는 우리 딸이 자랑스럽단다. 지금까지 잘 해왔어.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꼭 자신이 원하는 길로만 갈 수 없을 때도 있어. 때로는 실수도 하게 되고, 뜻하지 않게 넘어지기도 하거든. 그렇지만 그것이 실패는 아니란다. 다시 일어나 걸어가면 되거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께서는 불합격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으셨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지원한 학교에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았다. 퇴근 전 대학교에 전화를 걸어 합격자 확인 통화를 하신 아버지께서는 딸의 불합격 소식을 이미 알고 계셨다. 

 

 

해답은

이미 마음속에

원했던 학교에 합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의 산책에서 돌아온 후, 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다음날 출근하셨던 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와 내 방문을 열고는 아무 말씀도 없이 쑥 종이봉투를 들여놓으셨다.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누워있던 나는 살그머니 봉투를 펼쳐보았다. 그 안에는 마른오징어와 귤 몇 개가 함께 들어있었다. 오징어를 쭉 찢어 한 가닥 입에 물고는, 곧 턱이 아프도록 씹었다. 어느새 오징어 한 마리를 다 먹고 나니 입안이 텁텁해졌다. 귤 한 개를 집어 들고 껍질을 벗겨 통째로 입에 넣었다. 

 

 

 

그다음 날에도 퇴근하신 아버지께서는 전날처럼 종이봉투를 내 방에 놓고 나가셨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이 되었을 때에도 아버지께서는 어제와 똑같은 종이봉투를 들고 집에 오셨다. 나는 매일 밤 아버지께서 사다주신 오징어와 귤을 먹으면서 밤을 보냈다. 아무 생각 없이 오징어를 씹었던 첫날과 두 번째 밤과는 달리 하루하루 오징어와 귤을 먹으면서 나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어떤 위로나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대신 매일 밤 똑같은 간식을 전해주실 뿐이었다. 

 

마른오징어를 씹으면서 나는 불합격이라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의 실패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을 나갔을 때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다시 한번 또박또박 떠올랐다. 비록 지금은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서면 된다는 기분이 들자 입에서 톡 터지는 귤 향기가 전해졌다.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 채 꾸역꾸역 씹었던 마른오징어와 귤을 일주일 넘도록 먹고 난 후에야,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날 이후 아버지께서는 더 이상 종이봉투를 들고 퇴근하지 않으셨다. 

 

 

짧은 말,

깊은 여운

아버지께서는 그때 왜 나에게 마른오징어와 귤을 사다 주셨을까? 가끔씩 그 이유가 궁금해질 때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아버지께 여쭤 본 적은 없다. 대신 가끔씩 속상한 일이 생긴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연락해 오면, 나는 평소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식당으로 함께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좀 더 분위기 있는 찻집에서 오랫동안 차를 마신다. 부끄럽지만 나는 불혹을 넘기고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을 몇 년 앞둔 아직까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언변과 지혜를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좁은 나의 식견을 어설프게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으려고 한다. 장황스러운 말보다는 마주 앉은 사람의 감정에 조용히 공감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다. 

 

저희 아들 방 책상 위 벽면에 붙여진 문구입니다. 저희 부부가 꾸민 거냐고요? 아뇨. 아이 스스로 붙여 놓았더라고요. 

 

 

조언(助言)의 한자어는 '도울 助', '말씀 言'으로 되어 있다. 글자 그대로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 말을 거들거나 깨우쳐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은 남에게 조언을 한다는 것을 '가르치다'라는 의미로 바꿔 쓰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고, 그 방향이 서로 다르면 끝까지 설득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조언이라고 여겨진다. 인생에서 꼭 마주치는 질문들에 대한 100점짜리 답은 거의 없다. 사람마다 놓인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과 그에 따른 부수적인 사연들이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획일적으로 정리 정돈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모습의 조언은 흔들리는 상대방을 끝까지 신뢰하고, 그가 사고의 힘을 길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다. 그러한 거친 과정을 견뎌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신에 대한 든든한 믿음으로 예기치 않은 삶의 험난한 비바람도 이겨낼 수 있게 된다. 마른오징어와 귤은 어쩌면 딸을 위한 아버지의 마음이셨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Vol. 475 APRIL 2018 MG 새마을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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