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요, 나의 왕국이다
기타리스트 안드레스 세고비아
클래식에 대해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세고비아'라는 어휘가 그리 낯설지 만은 않을 것이다. 세고비아 기타를 비롯하여, 세고비아 주법과 세고비아 음악원 등, 그 모든 대명사의 출발점인 안드레스 세고비아 토렌스(1893.2.21~1987.6.3). 단지 춤과 노래의 반주로 등장하는 대중악기에 지나지 않았던 기타를 클래식의 영역 안으로 부활시킨, 그래서인지 기타라는 악기는 세고비아 안에서 가장 아름답게 발현되는 작은 동반자인 동시에 그의 분신이기도 했다.
글 엄익순
1928년 미국에서의 첫 연주회를 기다리고 있는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마음은 적잖이 흥분되어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연주회장. 그러나 그곳은 여느 공공장소가 아닌 버몬트의 한 개인집이었음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무거운 마음으로 거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또 한 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곳에는 나이 많은 여주인과 그녀의 친구, 그리고 그녀의 남동생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의 명성에 비해 단 3명의 청중.
"지난 파리 연주회에서 당신의 음악에 깊이 매료되었지요. 그 감동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살고 있는 이곳 미국에서의 첫 연주회를 준비하게 되었답니다. 당신은 연주중 절대적인 정숙을 고집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당신의 연주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지만, 그 아름다운 연주만큼이나 최고의 분위기를 만들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청중은 저희 세 사람뿐이지요."
여느 악기에 비해 가장 작고 섬세한 소리의 소유자, 기타. 그러한 이유에서 세고비아는 언제나 자신의 연주에 있어서 지극히 조심스러워 했음은 물론 청중들로 하여금 완벽한 침묵을 요구하였다. 일반 콘서트 홀에서의 연주료와 같은 금액이 지급된, 그러나 단 세 명의 청중 앞에서 기타를 안은 그러한 미국에서의 첫인사는, 세고비아가 기억하는 가장 행복했던 연주회라고 1972년 <리더스 다이제스트> 10월호는 말하고 있다.
독학으로 거장이 된 기타의 선지자
그 시절, 거리의 뒷골목 선술집이나 살롱에서 플라멩코를 연주하는 서민의 악기로만 간주되었던 기타를 당당히 세계 유수의 무대에서 연주되는 악기로 변신시킨 세고비아. 그의 유년시절부터 조금은 품이 많이 넉넉해진 말년의 모습을 살펴보노라면 왠지 차이가 있다. 머리가 희끗해진 노년의 얼굴에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주치게 되는 잔잔한 여유로움에,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함이 건네진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의 표정은 마치 무엇에 쫓기는 듯한 불안함이 엿보이며, 어떠한 고민에 휩싸인 듯 자기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있는 것만 같다.
1893년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리나레스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세고비아. 가난한 목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출생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그의 나이 2세가 되던 해 자식이 없었던 그의 형에게 보내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세고비아에게 있어서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인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부모와는 달리 그의 백부는 세고비아를 끔찍이 아껴주었다고 하는데, 기타에 대한 세고비아의 첫 기억도 다름 아닌 백부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었다고 한다.
세고비아의 연주는 여느 다른 악기의 유명한 연주자들의 그것과는 사뭇 그 느낌이 다르다. 왠지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려는 지극히 기교적이거나 무엇인가를 과시하려는 교만도, 또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위한 조그마한 행동 역시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듣는 이로 하여금 귀를 쫑긋 세우며 한 음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하는 그만의 주술이 청중들에게 전이되는 것만 같다. 그가 자아내는 선율의 화음이, 또한 기타와 함께 걸어간 그의 인생이 너무나도 긍정적인 삶의 모습으로 비쳤는데,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백부의 그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1903년 세고비아가 10세가 되던 해, 백부는 그의 학교를 위해 그라나다라는 큰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며, 음악가로 키우고 싶어했던 마음 때문에 세고비아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백부의 기대와는 달리 세고비아는 왠지 이들 악기에 대해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떠돌이 플라멩코 기타리스트의 연주를 들은 세고비아는 첫눈에 기타의 매력에 빠져, 그가 마을을 떠나기 전까지 단 한 달간 연주법을 배우게 되는데, 기타 속으로의 그의 입문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기타의 선율이 내 몸의 모든 구멍을 통해 침투하고 말았어."라며 그때의 감흥을 떠올리는, 그래서 한동안 가슴벅차 했던 그의 행복은, 그러나 그리 길게 유지되지는 못했다. 세고비아를 아껴주던 백부의 죽음으로 그는 큰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에게조차 외면당하게 된 것. 그로 인해 그의 정식 교육 또한 그 시기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혼자가 된 그에게 있어 유일한 벗은 바로 기타 하나였다. 세고비아는 기타를 품에 안고 줄을 퉁기는 것만이 자신의 온갖 시름과 외로움을 달래는 유일한 탈출구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만난 이웃집 소녀 라우라. 기타와 더불어 또 한 명의 친구로 다가온 그녀는 기타에 관심이 있던 세고비아가 클래식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고비아는 바로 라우라의 피아노 연주를 통해 쇼팽과 슈만, 멘델스존의 음악을 배우게 되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타 연주법을 개발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고비아는 라우라를 통해 그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편곡 작업과 독특한 운지법의 기초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과 멘델스존의 <현악 4중주를 위한 칸초네타 1번> 등이 바로 그 결실들이다.
피아노 연주에서 클래식적인 주법을 개발, 계속적인 클래식 기타 개발에 매달렸던 세고비아. 물론 그에게 있어 라우라라는 친구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단지 그의 조력자에 불과, 기타에 대한 세고비아의 모든 것은 바로 그의 집념 하나로 이루어진 독학 그 자체였다. 소르, 줄리아나 등의 교칙본을 닥치는 대로 구해 연습했으며, 화성과 대위법도 혼자 힘으로 파악했으며, 피아노 운지를 통해 기타의 음계 연습을 완성해 나가기도 했다.
그의 첫 연주회는 16세 때 그라나다의 예술회관에서, 1916년 1천 여명의 청중을 수용할 수 있는, 이전 그 누구도 이렇게 큰 홀에서 기타를 연주할 수 있으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바로셀로나의 팔라우 홀에서 기타 리사이틀을 개최하게 된다. 아무도 클래식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주목하지 못했던 기타라는 악기가 당당한 독주 악기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 그 연주회의 레퍼토리 중 눈에 띄는 것은 바흐의 <부레>를 비롯하여 하이든의 <미뉴에트>와 슈만의 <자장가>, 멘델스존의 <무언가>, 쇼팽의 <왈츠>와 <녹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1악장>, 비외탕의 <알레그로 A장조>, 차이코프스키의 <마주르카> 등에 대한 편곡들. 세고비아는 독학으로 기타를 배운 지 단 7년 만에 이러한 엄청난 양의 명곡들을 자신의 레퍼토리로 발산해내는 저력을 몸소 보여주었다.
하루의 연습량은 오직 5시간, 그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
손톱과 손끝을 같이 퉁기는 주법을 사용한 세고비아의 손가락은 항상 한 음을 퉁기고 나면 다음 음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는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타카토라든가 박자의 유연함이 주는 생동감 등이 지금까지도 다른 여느 연주자와 확실히 구분된다고 한다. 바이올린과 같은 찰현악기와는 달리 현을 퉁겨야 하는 발현악기인 기타는 그 연주 스타일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음을 구사하는 데 있어 점묘적인 방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고비아의 연주에서는 그러한 점묘적인 단절성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절히 액센트로 가미된 포르타멘토와 루바토, 비브라토 등으로 인해 자연스러우면서도 한층 멋스럽다.
조금 특이한 것은 그의 연습시간이 하루에 단지 다섯시간 정도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오전에 두 번, 오후에 두 번으로 나누어 각각 1시간 25분씩 연습했는데, 그 시간은 단 몇 분의 오차도 없었다고 주위 사람들은 전한다. 그의 연습시간만큼이나 절제된 연주. 마치 '듣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들어라'는 식의 당당한 그의 연주는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구수한 옛날이야기에 취해 그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세고비아의 절제성으로 대변되고 있는데, 먹고 마시고 읽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그러했다고 한다. 조금 웃음이 나오는 것은 70회의 생일날 또다시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일생동안 결혼을 세 번 밖에 하지 않은 것은 많은 여인들로부터 동경을 받아온 세고비아의 오히려 절제된 행동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가 사용한 기타를 살펴보면 1912년부터 25년간은 마누엘 라미레스를 사용했고, 그 후 15년 동안은 헤르만 하우저를, 그리고 이후에는 호세 라미레스를 연주했다고 한다. 그의 대표곡으로는 그 옛날 스페인의 왕이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내를 위해 지었다는 알함브라 궁전을 떠올리게 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비롯하여, <바흐 작품집>과 <협주곡과 스페인의 성>, <퐁세 소나타집>과 <기타 리사이틀-바흐, 소로, 토로바, 알베니즈>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추천하고픈 음반은 EMI에서 선보인 1927년에서부터 1939년까지의 불멸의 초기 리코딩으로, 젊은 날의 세고비아를 만날 수 있다. 특히 많은 연주곡 중 위에서도 몇 번이나 언급된 <알함브라의 추억>은 그가 <알함브라의 세고비아>라는 영화에까지 출연할 만큼 많이 알려진 곡이기 때문에 굳이 부언하지 않고자 한다.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소르의 <"마술피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9>도 깔끔한 이미지인데, E단조의 주제와 5개의 변주, 코더가 기타의 여러 기교를 발휘하면서 펼쳐지는 화려한 인상 또한 좋은 느낌이며, 바흐가 류트를 위해 작곡한 몇 안 되는 오리지널 악곡 중 소품이면서도 간결한 아름다움을 갖춘 J.S. 바흐(세고비아 편곡)의 <프렐류드 C장조 BWV. 999>도 더불어 권한다. 그리고 원곡의 장려함과 더불어 발현악기 고유의 여운이 더해진 <프렐류드-무반주 첼로모음곡 G장조 BWV 1007>과 퐁세에 의해 편곡된 최고의 기타곡으로 평가받고 있는 <"스페인의 폴리아"-주제, 변주와 푸가>도 추천한다. 마지막 이 두 곡은 개인적으로 제일 즐겨 듣는 곡이기도 한데, 그 느낌이 듣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백부의 집에 맡겨진 세고비아가 엄마를 그리워하며 울음을 터뜨릴 때, 그의 백부가 기타를 치며 들려준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들어있다고 한다. '기타는/ 연습이 필요치 않아~' 하루에 단 5시간 밖에 되지 않는 연습시간,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그러한 수치상으로 계산되는 악기 자체로만의 연습량이 아닌, 바로 우리들 삶의 모습 그대로를 자신의 연주혼으로 승화시키려는 그 노력을, 하루 중 단 5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들을 바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연주가 바로 그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아름다움 >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즈보컬리스트 써니 킴, 노래가 풍경이 되다 (9) | 2020.12.01 |
---|---|
클래식 기타리스트 장대건, 행복한 연주가가 되는 길을 만나다 (4) | 2020.11.30 |
클라라 하스킬, 척추장애를 이겨낸 제2의 모차르트 (2) | 2020.11.27 |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불완전함, 글렌 굴드 (3) | 2020.11.25 |
재즈보컬리스트 웅산, 오래된 음악의 정원에서 속삭이는 위로의 목소리 (4) | 2020.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