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사보 <한일>에 실렸던 원고입니다. 재즈보컬리스트 웅산 님과의 인터뷰는 그해 5월 27일 대치동의 어느 커피숍에서 있었는데요. 매체를 통해 바라볼 때도 좋았는데, 직접 만났을 때는 더더욱 좋았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정말로 많이 많이 느껴졌거든요. 인터뷰 내내 곁에 있는 사람을 배려해 주는 마음이 정말로 기억에 남습니다.
오래된 음악의 정원에서 속삭이는 위로의 목소리
재즈보컬리스트 웅산
재즈보컬리스트 웅산의 음악은 그녀와 닮아 있다. 섬세한 부드러움 속에서 힘이 넘치는 강렬함이 느껴지는가 하면, 애잔한 감성이 흐르는 가운데 햇살 같은 싱그러운 미소가 비치기도 한다. 무대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노래 안으로 끌어들이는 그 깊은 매력. 그녀의 음악 안에서 우리들의 지친 마음들이 위로받고 있다.
글 엄익순
음악의 나래를 펴고 비상하는 소리꾼
"재즈라는 음악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나는 당신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저에게 있어서 재즈는 마치 제2의 수행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이 음악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았는데요. 그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통해 위로와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제가 음악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목적은 유명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나의 음악으로 세상에 따뜻한 메시지를 건네주고 싶은 거예요."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최고의 재즈보컬리스트로 인정받고 있는 웅산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소리꾼'으로 남고 싶다. 자신이 갖고 있는 소리가 악기가 되어 어디서든지, 누구를 만나도 다양한 장르의 스펙트럼 속에 자유롭게 나래를 펴고 비상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그래서인지 재즈보컬리스트보다는 소리꾼이라는 수식어가 그녀의 폭넓은 음악세계와 조금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재즈뿐 아니라 싱어송라이터로서도 인정받고 있는 그녀는 본인의 자작곡 <Yesterday>로 2008년 한국대중음악시상에서 최우수 재즈&크로스오버 음반상에 이어 노래상까지 영예의 2관왕을 차지했다. 또한 같은 해에 리더스폴 베스트 보컬로도 선정되었고, 2010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스윙저널 '골든디스크'의 기쁨을 안았다. 2011년에는 일본 재즈비평 '제5회 재즈오디오디스크대상' 보컬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당당히 한국을 대표하는 진정한 재즈 디바로 인정받고 있다.
"내 마음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또한 나의 음악이 흘러가는 방향이 어디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곡을 쓰기 시작했던 거예요. 제 안에서 처음 만들어진 노래가 <Call me>라는 곡인데, 가만히 들어보면 멜로디나 노랫말이나 목소리가 모두 하나같이 '고요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 같았죠. 마음을 굉장히 고요하게 해주는, 마치 명상을 하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생각해보니 <Call me>를 비롯하여 제가 만들었던 <Yesterday>, <Tomorrow>, 그리고 얼마 전에 완성한 <Someday>라는 곡까지 모두 주제는 하나였어요. 바로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게요. 당신이 힘들 때, 언제나 나를 불러주세요'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죠."
그런 이유에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웅산의 노래를 들으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말하곤 한다. 그녀의 음악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마치 자신이 따뜻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창법으로 노래를 할 수는 있어도, 진심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려면 노래하는 사람의 마음이 간절하게 음악에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신비한 음악의 보물섬을 향한 여행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좋았고, 은은하게 울리는 풍경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던 20년 전. 그녀는 불교공부를 하기 위해 절에서 수행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웅산'은 그때 스님께서 지어주신 법명이다. 그러나 그녀를 다시 세상 밖으로 불러내는 알 수 없는 소리가 있었다. '관세음보살'을 반복해서 외우는 기도시간에도 입가에 맴도는 것은 관세음보살이라는 단어에 음이 실린 노랫소리. 스님이나 절을 찾는 사람들까지도 그런 웅산의 노래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결국 그녀는 음악에 대한 열망으로 하산한다.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고, 록음악 동아리를 찾아 오디션에 합격하여 밴드 창단 이래 최초로 여성보컬을 맡기도 한다. 매일같이 밤을 새워 노래연습을 하는 것이 즐거웠고 행복했다. 결국 1993년 MBC 대학가요제 강원도 예선에서 가창상과 인기상을 받았다. 록음악이 인생의 전부로 여겨지던 어느 날 친구가 우연히 건네준 빌리 할러데이의 앨범에서 'I'm A Fool To Want You' 노래를 듣게 된다.
"엄청난 전율이 느껴졌죠. 마치 제 마음에 폭풍우가 밀려온 것처럼 충격적이었어요. 그날 이후 재즈는 제 인생의 새로운 화두가 되었고, 곧바로 재즈클럽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사이 재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제가 느닷없이 어설픈 오디션을 보게 되었고, 이렇게 재즈보컬리스트로서의 웅산이 된 것이죠."
재즈를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났을 때 '오모리 밴드'라는 일본 재즈 팀의 내한공연에 게스트 보컬로 협연하게 되는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일본 공연 관계자가 곧바로 일본에서의 공연을 제안했고, 그렇게 우연히 일본 무대로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 무대는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다. 콰르텟이나 피아노 편성에 치우쳐 있는 우리나라 무대와는 달리 재즈 편성이 매우 다양했기 때문. 처음 일본 공연 때만 해도 무대 위에서 그녀와 함께 한 것은 베이스와 색소폰뿐이었다. 나머지 소리의 빈자리를 목소리만으로 채워야 했기 때문에 그때의 부담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사실 3~4년 전만 해도 음악적인 고민이 없었어요. 그냥 재즈가 좋아서 계속 해왔기 때문에, 어떤 갈등을 느끼거나 힘겨워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음악 안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재즈의 향연을 펼쳐보고도 싶고, 중국이나 인도 혹은 네팔 등 각 나라만의 독특한 악기와 어우러지는 무대를 만들고도 싶어요. 재즈라는 음악 장르는 한정된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원하는 곳으로 비상할 수 있는 준비자세가 되어 있다고 봐요. 그것이 바로 재즈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요."
보다 넓은 시야로 세상 바라보기
웅산의 음악은 단지 재즈 마니아들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산사음악회에서 만난 어린아이들과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도 이미 그녀의 팬이 되어버렸다. 웅산의 재즈는 자연스럽게 듣는 이의 마음을 자유롭게 이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일들은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해질 때 가장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 자연스러움의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재즈라는 음악. 그래서 그녀의 노래는 부드러우면서도 가볍지 않고, 진실하며, 늘 잔잔한 감동이 스며있다.
뛰어난 곡 해석력으로 섬세한 발라드부터 강한 비트의 노래까지, 블루스는 물론 펑키와 라틴 등 모든 장르를 자신이 가진 특유의 감성으로 음악 안에 불어넣는 웅산은 재즈보컬리스트뿐만 아니라 싱어송라이터, 뮤지컬배우, 음악 프로그램 방송 MC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대학에서 제자들의 꿈을 키워주는 것은 그녀에게 가장 의미가 깊다.
"저는 학생들에게 음악은 이런 거야, 노래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가르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대신 이 노래는 이렇게도 가능하다고 말하죠. 그리고는 한 곡의 노래를 각기 다른 색깔로 불러줘요. 어떤 때는 같은 곡을 연거푸 열 번 정도 부를 때도 있어요. 그중에서 학생들 개개인의 마음에 통하는 코드의 노래를 찾아보라고 얘기해요.
절대 우리는 유명한 가수가 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좋은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저는 음악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좋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좀더 세상을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죠."
웅산은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서 돌아봤을 때 조금은 후회되는 일이 있더라도 스스로를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보다는 가장 힘든 순간에도 스스로가 행복해야 한다는 그 자체에 기준을 두면 보다 자신감 있게 내일을 향해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20년 동안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매개체는 재즈였다. 수많은 공연과 10장의 앨범, 그리고 올여름 새롭게 선보일 노래들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열정은 멈춘 적이 없었다. 웅산의 음악은 아주 오래된 정원에서 피어나 새벽 창가를 따스하게 비춰주는 아침 햇살 같다. 바람에 실려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다가오는 웅산의 목소리가 지친 우리들을 위로해준다.
'그 모든 아름다움 >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클라라 하스킬, 척추장애를 이겨낸 제2의 모차르트 (2) | 2020.11.27 |
---|---|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불완전함, 글렌 굴드 (3) | 2020.11.25 |
피아니스트 강지은, 음악의 향기가 삶의 자양분이 되다 (6) | 2020.11.23 |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지휘자로 부활한 또 다른 이름으로의 베토벤 (5) | 2020.11.20 |
엔리코 카루소, 세상 밖 어딘가에서 웃고 있는 외로운 광대 (3) | 2020.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