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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시선으로 가장된 잔잔한 밝음, 파트리크 쥐스킨트 콘트라베이스

난짬뽕 2021. 6. 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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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시선으로 가장된 잔잔한 밝음

파트리크 쥐스킨트 <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이미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으로 <향수>와 <좀머 씨 이야기>가 각각 1991년도와 그 이듬해에 초판 발행되었지만,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93년 3월 10일 초판 1쇄된 <콘트라베이스>를 통해서였다. 나만의 세계에 빠져 철저히 의도된 주변인 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강의실에서 이름만 알고 지내던 동기 한 명이 내 생일 즈음에 책 한 권을 스윽 건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쥐스킨트의 작품이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하게 된 이유는 서점에서 이 책을 보는 순간 문득 내가 생각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는데, 왠지 그 말에 조금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나는 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콘트라베이스>의 주인공인 그 연주자는 바로 나의 모습이었으며, 그의 일상은 나 자신의 무기력한 생활의 복사체인 동시에 콘트라베이스는 내 등에 짊어진 나의 그림자였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였는데, 어느 극단의 연극 제목이 바로 <콘트라베이스>였기 때문이었다. 그 작품의 주인공인 배우 명계남은 이 연극에 심취되어 연주 기법도 잘 알지 못하는 그 악기를 거액의 금액으로 구입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모든 공연의 맨 마지막 시간대를 즐기는 나는 그 작품 역시 마지막 공연 시간에 맞춰 자리에 앉았는데, 그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나는 너무나 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노련한 연기자 명계남은 나름대로 그 작품을 소화해내고 있었지만, <콘트라베이스>를 책을 통해 좋아하게 된 나로서는 그의 연기가 단지 과도한 자기표현으로 치장되었을 뿐, 결코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자아내고 있는 그 색깔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연극은 무려 10번도 넘게 다시 보고 또 보는 열렬한 팬이 고정석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성황리에 막을 내렸지만, 그 사람 역시 연극으로부터의 끌림이었다기보다는 아마도 원작의 매력 때문일 것이라고 혼자 거만한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잠깐만~~. 지금! 이 소리 들리지요? 이거요! 들리세요? 조금만 있으면 다시 나올 겁니다. 똑같은 마디거든요. 잠깐만요. 이거요! 들으셨지요! 베이스 소리 말입니다. 콘트라베이스요~~

 

이렇게 시작되는 <콘트라베이스>에서 작가 쥐스킨트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배우가 연극을 통해 그 악기가 가지고 있는 속성과 오케스트라에서의 신분적 위치를 바탕으로 한 평범한 소시민의 생존을 다루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비록 역할은 중요하나 아무도 그것을 선뜻 인정하여 주지 않는 것에 대해 느끼는 한 평범한 시민의 절망감과,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이 제도와 관습과 인식의 굴레에 얽매이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자화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음악 분야에서는 몇 가지가 정말로 불공정합니다. 독주 연주자에게는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지는 것이 상례고, 관중들은 박수를 칠 수 없게 되면 마치 무슨 벌이라도 받는 듯한 느낌마저 갖게 됩니다. 박수갈채는 지휘자에게도 쏟아집니다. 지휘자는 악장의 손을 적어도 두 번은 쥐고 흔듭니다. 대개의 경우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런데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미처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 제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어떤 시각으로 살펴보아도 최후의 쓰레기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오케스트라의 구성을 인간 사회의 모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계에서나 그 세계에서 쓰레기와 관련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기 마련이지요. 더구나 오케스트라의 세계는 인간 사회보다 더 나쁩니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에서는 -- 이론적으로만 보자면 -- 언젠가는 나도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가서 꼭대기에서 내 밑의 벌레 같은 것들을 내려다볼 날이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이 작품을 번역한 유혜자 씨는 쥐스킨트의 글은 적어도 세 번은 읽는 이를 놀라게 한다는 말을 했다. 우선은 이야깃거리가 될 성싶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소재를 다루었다는 것에 놀라고, 다음은 집요하게 소재를 추적하여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국 제법 실팍하게 만들어 내어놓는데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것에 대해 놀라고, 일반적으로 평범하다고 치부하여 무심코 지나친 것들의 속성에 담겨 있는 심오한 의미들을 깨달으며 또 한 번 놀라게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만 받는 사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주연급의 위치에 서 있는 또 다른 사람, 그리고 저편에 서 있어도 아무도 별다른 시선을 보내주지 않는 그저 보통의 사람들. 어쩌면 이 책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역시 우리들의 삶과 다른 바 없는 그러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일에 너무나 성실하고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그리 큰 피드백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회생활에 지친 우리들의 아버지들. 막상 그 자리가 비었을 때 비로소 그 부재를 느끼며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던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주부의 자리. 때로는 몇몇 학생들의 들러리가 된 듯한 씁쓸한 기분이 들곤 하는 우리 시대 교육환경의 학생이라는 외로운 신분 등, 바로 이들의 모습이 그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그가 말하는 희망, 그 희망 사항이 결국 조금이나마 이루어질 수는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오케스트라에서는 희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는 냉엄한 능력별 계급 제도, 옛날 옛적에 내려진 결정을 그대로 고수하는 잔인한 계급 제도, 재능에 따른 냉혹한 계급 제도, 진동음과 음의 빛깔에 따라 절대로 번복 불가능하기도 한 자연의 질서이며, 물리적인 계급별 차별화 제도 등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오케스트라에는 들어가지 마십시오!~~.

 

이 글에서 말하는 오케스트라는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콘트라베이스 때문에 언제나 불편함을 느끼는, 더욱이 사랑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든 그 악기를 원망하면서도 이 연주자는 결코 오케스트라를 떠나지는 않고 있다. 비록 자신의 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 채 불만 불평을 늘어놓는 우리들 자신 역시 쉽사리 이 사회에서, 자신의 일상적 궤도에서 쉽게 이탈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절대로 오케스트라에는 들어가지 마십시오!, 라며 외치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떠날 용기가 없으면 있는 곳에서 당당히 그것과 맞서십시오!"라며 나태한 우리들을 꾸짖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표면적으로 무기력해 보이는 이 작품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 누구나의 마음속에는 내색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아픔이 있을 것이며, 숨기고 싶은 열등감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의 콘트라베이스 때문에 고개가 숙여지고 상대방 앞에서 행동이 당당해질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연주자가 콘트라베이스를 버릴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들 역시 그러한 괴로움 안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나 자신이 그 정신적 혼란을 지배하는 것으로 사고를 전환시켜 보는 것이 어떨까.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지는 않을까. 

 

~~ 야, 이 멍청아 조심 좀 해! 왜 맨날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야, 바로 얼간이 같으니라고! 여러분, 삼십 대 중반이나 된 제가 왜 항상 이렇게 훼방만 놓는 이 따위 악기와 함께 살아야만 하는지 그 까닭을 좀 설명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세상살이에 지쳐 힘들어하면서도 그다음 날이면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동일한 공간 안에서 어제 만났던 사람들과 여전히 부딪히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결코 콘트라베이스를 떠나지 못할 그 연주자처럼 말이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 쥐스킨트가 비록 한껏 낮은 목소리로 우울함을 토해내고 있지만, 그러나 이 작품은 처음부터 이미 아주 밝고 희망이 넘치는 그러한 용기를 심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껏 툴툴거리고 있는 <콘트라베이스>는 이미 그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화려한 도약을 꿈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러한 기분 좋은 웃음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1984년 문단에 데뷔하게 된 이 작품은 어느 극단의 제의로 쓴 1인 남성 모노드라마로서, 발표 당시 '희곡이자 문학 작품으로서 우리 시대 최고의 작품'이라는 격찬을 받았으며, 한때 독일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기도 했다. 특히 <콘트라베이스>에서는 모노드라마라는 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배우의 목소리를 높게, 아주 높게, 혹은 낮게, 아주 낮게 처리하여 독자의 정서적 흥분도(감정상태)를 조절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마치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하는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이 쓰인 것은 1984년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향수>와 <좀머 씨 이야기>에 이어 세 번째로 번역되었으며 그 후 <비둘기>와 <깊이에의 강요>, <로시니>와 같은 쥐스킨트의 작품이 연이어 발표되어 꾸준히 인기를 모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연약한 체격, 지나칠 만큼 반짝거리는 가느다란 금발 머리에다 유행에 한참이나 뒤떨어진 스웨터 차림을 즐기는,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49년 독일 암바흐에서 출생, 뮌헨 대학과 엑상프로방스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바로 <콘트라베이스>를 통해서였다. 그 후 유럽 평단으로부터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매스컴의 초점이 되기도 했지만 쥐스킨트는 모든 문학상 수상도 거부하고 사진을 찍는 일조차 피하고 있으며, 자신의 일에 대해 발설한 사람이면 친구와 부모를 막론하고 절연을 선언해버리며 은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흔히 독일 문학은 사변적으로 전개되는 난해한 내용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많이 읽히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다른 독일 작가들에 비해 국내에서 참으로 많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예외적인 유일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모든 작품들을 다 읽어보았지만,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떠올리면 첫사랑인 <콘트라베이스>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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