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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 세계 성악사의 영원한 디바

난짬뽕 2020. 12. 3.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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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성악사의 영원한 디바

마리아 칼라스

 

 

"오페라에서 'B.C.'는 곧 칼라스 이전 시대를 의미한다."라는 말이 전해질만큼, 마리아 칼라스는 오페라의 신화 같은 존재이다. 많은 오페라 가수들에게 있어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자,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도전이었으며, 끊임없는 호기심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마리아 칼라스(1923~1977). 오늘날까지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간직된 살아있는 프리마돈나임에 틀림없다. 

글 엄익순

 

사진_EMI / 장티프스로 아들을 잃은 그녀의 부모는 칼라스의 출생을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자태.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어린시절에 대한 고독을 과식으로 해소함으로써, 한때 몸무게가 90kg에 육박하기도 했다.

 

세계 성악사에서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마리아 칼라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8년 3월 예술의전당에 올려진 <MASTER CLASS>라는 공연을 통해서였다. 일류 음악가들이 지도하는 실기 수업을 일컫는 용어의 그 공연은 1996년 토니상 최우수 희곡상을 수상한 테렌스 맥날리의 작품이다. 칼라스 역시 1971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었다. 금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와 사랑 등 열정적인 그녀의 삶을 담고 있는 그 작품이 계기가 되었지만, 사실 나를 유혹한 것은 그 공연의 포스터였다. 당시 배우 윤석화는 그 공연의 주인공이었는데, 검은 바탕에 아주 진한 붉은색 립스틱을 바른 얼굴 윤곽만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당당한 얼굴 표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작은 우울함을 애써 태연한 척하려는 고독함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그 공연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어느 레코드 가게로 옮기게 되었다. 

 

뚱뚱하고 못생긴 더욱이 목소리도 곱지 못한, 미운 오리새끼

수수한 옷차림으로 머릿단을 한쪽 옆으로 내린 채 누워있는 마리아 칼라스. 그 모습이 여느 때보다도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게 느껴졌던 1977년 9월 16일, 그녀는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 그러나 세간에는 극심한 공허와 고독이 몰고 온 자살이라는 추측이 더 강했다. 

한 세기를 풍미한 성악가로서, 그리고 지독한 사랑을 꿈꾸었던 한 여인으로서 그가 보여준 자신의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에 비해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허무한 죽음. 세상을 경악하게 했던 그녀의 죽음을 나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들이 알고 있던 칼라스는 언제나 어느 장소에서나 항상 자신감이 넘쳐 있었기에 그녀의 내면에 가리어진 보이지 않는 그늘을 미처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1923년 12월 뉴욕 맨해튼의 웨스트사이드 병원에서 태어난 그녀의 세례명은 '마리아 체칠리아 소피아 안나 칼로게르 폴로스'. 그리스에서 약국을 운영하다 파산, 미국으로 건너온 그녀의 부모가 성을 칼라스로 바꾼 1년 후 태어난 아이가 바로 마리아 칼라스였다. 어린 시절 예쁜 옷이 맞지 않을 만큼 뚱뚱하면서도 언제나 막 먹어대는 별로 귀엽지도 않게 생긴 소녀 칼라스는 그래서인지 언니 재키와 늘 비교되면서 부모의 온갖 구박을 다 받아야 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매혹적인 모습의 칼라스를 보고 있노라면, 그 이야기가 좀처럼 믿기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칼라스는 비만과 못생긴 외모로 인해 부모로부터 받은 천대와 무관심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극단적 피해의식과 좌절감을 갖게 되었고, 모든 일에 있어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편집증세로까지 발전하곤 했다. 초인적으로 감행한 다이어트는 물론 세인의 최대 관심사였던 그녀의 러브스토리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때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고, '나도 그만큼 날씬해지겠다'라고 결심한 칼라스는 90kg에 육박하던 체중을 단 2년 만에 무려 37kg이나 줄이는데 성공, 자신의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헵번 스타일의 옷을 결국에는 입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라스는 평생 <카르멘>을 공연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살이 빠지지 않은 굵은 다리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크랭크 시나트라와 콜 포터의 노래 등을 좋아했던 칼라스는 성량이 뛰어났지만 실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가 아테네 음악원에 입학, 본격적인 성악 수업을 받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가수의 꿈을 지닌 그녀 어머니의 성화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지난날 메트로폴리탄과 라 스칼라에서 프리마돈나로 명성을 날렸던 엘비아 데 이달고를 만난다. 음악원 시절의 칼라스에 대해, 이달고 역시 '사나운 폭포 같은 음성'이라고 꼬집을 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었던 것이 사실. 

 

목소리도 곱지 않고, 몸매도 볼품없이 뚱뚱했던 마리아 칼라스. 내세울만한 것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그녀가 세계 음악인들로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투명하면서도 강렬한 음색, 엄격하면서도 정밀하게 조탁된 음악성에 격정적인 감동까지 발산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강한 의지와 집념, 그리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사진 EMI

 

사랑과 성공만이 자신을 지탱해주던 유일한 자존심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 에반겔리아와 함께 아테나에서 살던 칼라스가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게 된 것은 1941년 오페라 극장이 아닌 영화관에서 올려진 <성>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곧이어 주피의 <보카치오>에 출연했으며, 이듬해에는 <토스카>를 맡으면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형편이 썩 나아지지 않았던 칼라스는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더 넓은 무대에서 뛰어보고 싶은 생각에 돌연 1945년 아버지가 있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러나 뉴욕에 오긴 왔으나 그녀의 재능을 인정해주는 오페라단은 한 군데도 없었다. 단지 <오텔로>의 데즈데모나나 <나비부인>의 단역을 제의 받을 정도였을 뿐,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의 한 담당자는 '아직 젊으니 고국으로 다시 돌아가 더 많이 배워오라.'며 그녀의 자존감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칼라스의 삶을 전환시킬 두 번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그녀의 진가를 발견한 명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칼라스를 두고 크지만 못난 소리라는 뜻의 '그란데 보차차'라고 혹평했지만, 1947년 베로나 극장에서 공연된 <라 조콘다>에 칼라스를 추천하기에 이른다. 이 공연을 계기로 칼라스는 단숨에 유럽 무대를 휩쓸게 된다. 성량이 큰 것 이외에는 별다른 매력이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목소리에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감정이 이입되면서 관객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사진 EMI / 53세의 사업가 조반니 바니스타 메네기니. 그리고 24세의 아름다운 칼라스. 1947년 6월, 첫눈에 그녀에게 빠져든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신화를 만든 조력자인 동시에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세라핀이 칼라스 음악의 시작을 함께 했다면, 그녀의 시대를 활짝 열어준 것은 이탈리아의 중년 사업가 메네기니였다. 대단한 음악 애호가이자 그녀의 남편이기도 했던 메네기니는 경제적 안정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녀의 헌신적인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칼라스가 그와의 만남을 통해 최정상의 음악인으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라 페니체 극장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푸치니의 <투란토르>에 출현, 성공을 거두자 칼라스에게는 훨씬 더 큰 기회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1948년 바그너의 <발퀴레>의 브룬힐데 역과 사흘 뒤 맡게 된 벨리니 오페라 <청교도>의 엘비라 역이 그랬다. 더욱이 주연 엘비라 역을 맡은 가수가 갑자기 병이 나자 세라핀이 대리 출연을 요청했고 이를 수락한 칼라스는 나흘 만에 전곡을 마스터하는, 실로 이탈리아 오페라 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일으키면서 전 세계 음악 팬들의 시선을 끌어안게 되었다. 

 

그 후 1951년 12월, 엘비라 역을 대신했던 경우와 같이 칼라스는 당대의 라이벌인 레나타 데발디 대신 아이다 역을 맡아 드디어 스칼라에 입성하는 행운을 누렸다. 당시 객석에는 세라핀, 토스카니니, 줄리니 등 기라성 같은 대지휘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순히 곡예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장식음에 풍부한 감성과 극적인 효과를 불어넣으며 철저히 자신만의 노르마를 연출시킨다. 물론 그 공연은 대성공이었으며, 이를 발판 삼아 칼라스의 화려한 전성시대가 펼쳐지게 된다. 

 

그러나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칼라스의 화려한 정상. 그 행복했던 시절은 악성 루머와 몇몇 중요한 공연들의 취소, 대공연의 실패와 그에 따른 책임자들과의 갈등 등의 불안한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그녀의 신경질적인 반응과 태도로 옮겨 붙으면서 파국의 길로 내몰리게 된다. 그녀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지면서 목소리까지 높은 포르티시모에서 날카로운 파음 현상이 나타나고, 설상가상으로 언론들은 먹이를 포착한 맹수처럼 칼라스에 대한 혹평을 서슴없이 해대는 가운데, 그녀의 마지막 비극은 선박왕인 오나시스와의 만남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첫눈에 칼라스에게 반한 오나시스, 그녀 역시 메네기니를 저버리고 오나시스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도 잠시, 그녀의 공연은 매번 실패만을 거듭하게 되었다. 메네기니와의 결별 후 오나시스와 함께 살면서부터 칼라스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목소리의 변화였다. 더욱이 모든 언론에서는 '한심한 칼라스의 무분별한 행동'이라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비난했고 궁지에 몰린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아이를 유산하고 자살까지 기도하게 된다. 

 

사진_ EMI / "나는 더이상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아요.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개도 기르는 정상적인 여자로 살고 싶습니다." 칼라스가 그토록 괴로워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그는 가장 평화로운 안식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칼라스가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은 메네기니뿐이었으며, 오나시스에 대한 칼라스의 본심이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끝없는 성공만을 갈구했던 칼라스가 또 다른 도약을 위해 오나시스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추측만이 난무할 뿐이다. 그리고 그 몇 년 후 오나시스는 자신의 아이를 원했던 칼라스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케네디의 미망인인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하게 됨으로써, 칼라스의 몸과 마음은 찢길대로 찢겨 회생 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만다. 

 

1965년 7월 5일, 42살이라는 원숙한 나이에 <토스카> 공연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음악 인생에 종지부를 선언했던 칼라스의 이별 인사는 바로 "다시 시작하기 위해 은퇴한다"라는 단 한마디였다. 지극히 화려하게만 비쳤던 그녀의 명성에 비해 너무나도 고독했던 여인, 마리아 칼라스. 노래를 즐겼으나 결코 노래에 속박되지는 않았던, 무섭게 사랑과 성공을 염원하다 그것을 송두리째 잃게 되자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렸던 그녀를 생각하면 속절없이 서글퍼진다. 무엇이 마리아 칼라스의 삶을 그렇게 옥죄게 했던 것일까. 자신이 만들어 놓은 구속의 틀속에서 좀처럼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래서 남들에게는 항상 강한 모습으로만 비쳤던 것은 아닐까.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비껴간 부모의 사랑을 갈망했고, 성공을 위해 자신의 약점을 과감히 도려낼 수 있는 용기와 도전의식이 강했던, 그리고 그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음악적인 성공과 사랑이 식어갈 즈음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시킨 칼라스. 어쩌면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에 굴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나시스와 함께 한 그녀의 두 번째 사랑에 대해서는 잠시 침묵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단지 그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용했다는 호사가들의 말을 별로 믿고 싶지 않아서이다. 칼라스는 분명 성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시킬 수 있는 승부욕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 자체를 성공 하나에만 묶어두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리아 칼라스의 대표곡으로는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와 <청교도>를 비롯, 베르디의 오페라인 <아이다>와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도니제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그리고 비제의 오페라인 <카르멘> 등과 더불어 <칼라스 전집>을 추천한다. 칼라스의 음악은 어느 작품을 선택하느냐 보다는 그녀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서 감상하는 방법이 더 좋을 것 같다. 그것이 마리아 카라스를 좀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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