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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카루소, 세상 밖 어딘가에서 웃고 있는 외로운 광대

난짬뽕 2020. 11. 20.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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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밖 어딘가에서 웃고 있는 외로운 광대

엔리코 카루소

Enrico Caruso

 

 

오페라 역사에 있어 '전설의 가수'로 대변되는 엔리코 카루소(1873.2.25~1921.8.2). 무대 뒤에 앉아 종종 주변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그려주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모습은 항상 바나나처럼 입만을 크게 강조하여 만들어 놓곤 했다. 그래서인지 카루소를 떠올리는 나의 기억은 그의 굳게 닫힌 입 언저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열정의 목소리. 카루소에 의해 오페라는 절정의 시기를 구가하게 됐으며, 그를 정점으로 성악계의 계보는 다시 쓰여 왔다. 

글 엄익순

 

 

전성기 시절 카루소에 관한 몇 가지 일화들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 지를 짐작케 한다. 1918년 한 해 동안 그가 낸 세금은 무려 15만 4천 달러. 경제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를 지금의 화폐가치로 정확히 환산해 낼 순 없지만 상당한 수준의 금액일 것 같다. 그가 공연장에 들어설 때면 주먹세계의 보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반주자는 물론 개인 비서와 회계사, 운전사와 의상, 메이크업 담당자들이 무리 지어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의 인기를 탐한 나머지 '블랙 핸드'라는 갱단으로부터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편지를 받기도 했으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한 관계자는 그의 공연에 대한 개런티로 백지 수표를 제시한 적도 있다고 한다. 

 

"모든 것에 너무 지쳤어. 세상 밖 어딘가에서 사람들도 나를 잊고 나도 사람들을 잊은 채 살고 싶다." 낙천적이고도 따뜻한 성격. 자주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이 웃음을 지어 보였고, 어느 장소에서도 좌중을 즐겁게 만드는 유쾌한 사람이었으며, 사랑에 쉽게 빠져드는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47세에 이루어진 결혼 전에 이미 유부녀인 소프라노와 동거한 적이 있었으나, 그들이 헤어진 후 카르소의 명성이 치솟게 되자 그녀는 카루소가 보냈던 연애편지들을 공개하면서까지 법정 소송을 벌인 적도 있었다. 

 

웃으며 노래를 부르기도,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카루소. 그는 스스로를 희화화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같은 무대에 오른 동료들은 때때로 그의 목소리에 취해 넋을 잃어버린 채 자신들의 차례마저 놓쳐버리곤 했다. 힘차면서도 섬세한, 그러면서도 현실감 있는 연기력이 충분히 녹아 있는 남다른 광대적 자질. 어쩌면 무대 위에서 노래하며 웃고 우는 그의 모습은 단지 연기가 아닌 카루소 자신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웃고 있는, 그러나 그 이면에 가리어진 왠지 슬픈 표정의 나이 든 광대처럼 말이다. 

 

 

쓸쓸한 입장, 슬럼가에서 일어선 소년

신진 성악가가 새롭게 발굴되었을 때,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카루소의 재래'라는 대명사를 덧붙인다. 카루소 위에 또다른 성악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수급 불균형의 시대가 바로 그 시절이었으며, 아무리 잘 부른 노래라 할지라도 카루소와는 비견되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와 함께 한 무대에 서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다. 그 당시 역시 여러 타입의 성악 스타일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탈리아 타입의 테너들은 그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일반적일 만큼 카루소의 목소리는 모든 성악가들의 참고서가 되어 있었다. 

1920년 크리스마스 이브 공연을 끝으로 무대에서의 은퇴를 결심할 즈음, 그는 이미 늑막염이 심각한 상태였으며 결국 이듬해 여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결혼한 지 3년, 은퇴한 지는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8월 2일 49세의 젊은 카루소의 시신은 여섯 필의 검은 말이 끄는 마차에 실려 나폴리 시가를 행진한 후 인근 묘역에 묻힌다. 태어난 곳 역시 이곳 나폴리. 1873년 2월 25일 일곱 형제 중 셋째로 전형적인 슬럼가 지역에서 태어난 카루소. 그의 아버지 마르첼리아노는 부둣가 창고 기술자였는데 벌이의 대부분을 술로 소비했다. 물론 아들을 학교에 보낼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으며, 그로 인해 카루소는 어린 시절부터 공장에 나가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나마 읽고 쓰기를 익힐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 안나 발디니의 덕분이었다고 한다. 

 

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채 돈벌이에 뛰어들었던 카루소가 노래를 하게 된 것은 10살 때. 그가 다니던 성당의 브론제티 신부는 카루소의 목소리가 제법 쓸만하다고 여겨 노래를 가르쳤는데, 당시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단지 부자들의 연회나 결혼식 축가로 밖에 잘 쓰여지지 않았으며 그 대가마저도 모두 브론제타에게로 돌아갔다. 어린 카루소도 자신이 돈벌이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에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으로만 만족했다. 

 

 

시련의 연속, 정상의 고독

브론제티 신부에 이어 카루소에게 찾아온 또 한번의 악연은 베르지네 선생일 것이다. 그가 15살이 되던 해,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깨달은 것은 자신이 훌륭한 가수가 되는 것만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당시 성악 코치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베르지네이다. 그러나 그는 카루소의 재능을 키워주기보다는 교묘한 계약을 이용해 수익을 챙기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 계약의 내용은 카루소를 만난 시점으로부터 4년간 가르침을 주되, 그가 본격적으로 노래하게 되면 5년 동안의 수익금 중 25%를 자신의 몫으로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르지네는 '노래를 부르는 시간만으로 5년'이라는 터무니없는 고집을 내세워 수시로 카루소의 돈을 갈취해 갔으며, 자신이 가르치기로 약속한 4년의 기간 중 3년 동안은 카루소를 군대에 보내기도 했다. 

1894년 베르지네는 카루소를 무대에 세워 하루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친구인 메르카단데 극장 매니저인 다스푸로에게 부탁한다. 그때 맡은 역이 오페라 <마뇽>의 빌헬름 마이스터 역. 그러나 일반적인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던 카루소는 자신이 시작할 대목을 놓치는가 하면, 가사를 잊어버리기도 했으며, 목소리마저 갈라지게 되어 결국 카루소의 출연은 취소되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자신의 재능마저 의심하며 좌절에 빠진 카루소는 불안정한 음색을 교정하며 확실하게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데, 1895년 5월 15일 나폴리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올려진 오페라 <아미코 프란체스코>는 그의 공식적인 데뷔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목소리는 고음부에서 곧잘 갈라지는 불안감을 드러냈는데,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1897년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목소리는 확연히 달라진다. 당시 유럽의 오페라 무대를 대표하던 대 작곡가 푸치니의 작품 <라 보엠>에 출연하게 된 카루소를 처음 보게 된 푸치니는 자신이 직접 반주를 하며 그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그는 '신이 보낸 선물'이라는 극찬을 하며 카루소를 높이 평가했다. 

 

 

레코드로 담아낸 최초의 오페라 

데뷔 5년만에 이태리 최고의 무대 라 스칼라 극장에 입성한 카루소는 1903년 11월 23일 작품 <라골레토>로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서게 된다. 줄곧 시즌 첫 공연의 주역을 차지하며,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져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먼저 그의 카멜레온 같은 목소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서정적이거나 장식적인 성향에 지나지 않았던 대부분의 테너들과 비교하여, 카루소는 무대 아래의 오케스트라와 당당히 맞붙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소리만을 고집하기보다는 작품의 성격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폭넓은 시야를 지니고 있었으며, 상대 배역에 따라 자유자재로 음을 조절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공연장에서의 생생한 현장감을 원하는 관객들이 카루소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의 우리들이 카루소를 기억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그의 리코딩에 관한 일이 될 것 같다. 물론 카루소 이전에도 어떠한 형태의 녹음은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되지만, 상업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진 오페라 가수의 녹음은 그가 최초라고 전해진다. 1877년 말 토마스 에디슨은 원통에 감은 은 종이에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는데, 이것이 곧 레코드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190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레코드에는 연주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으며 취입료 역시 무척이나 낮았다고 한다. 

 

1903년 당시 명 프로듀서이던 프레드 가이스버그는 라 스칼라에서 '게르마니아'를 부르는 카루소의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녹음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 제의에 카루소가 요구한 녹음료는 총 10곡에 480달러. 그러나 보통 2~3달러에 지나지 않았던 대개의 경우로 미루어 볼 때 런던의 그라모폰 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말도 안 되는 액수라며 리코딩을 취소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루소의 음악에 자신이 있었던 가이스버그의 고집으로, 그 이듬해 2월 1일 카루소와의 첫 리코딩이 이루어진다. 카루소가 생전에 리코딩으로 걷어들인 수입은 약 2백만 달러 정도였고, 그라모폰 사는 그것의 약 2배 정도의 이익을 얻었다고 하니 그의 음반이 얼마나 화제가 되었느냐 하는 것은 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카루소가 남긴 레코딩으로는 매끄러운 음질을 자랑하는 RCA의 12개짜리 전집과 그 밖의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별히 추천하고자 하는 것은 Nimbus에서 발매된 '프리마 보체 시리지'를 권하고자 한다. <NI 7803>은 카루소의 녹음이 이루어진 1904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20년까지 부른 아리아 중 가장 아름다운 곡들만을 선곡해 놓았으며, <NI 7809-카루소 인 송>은 총 19곡의 민요와 가곡들이 69분 31초 동안 흘러나오고 있다. 이 음반들을 듣고 있노라면, 카루소의 목소리가 다른 테너들에 비해 기교적이거나 멋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감정의 표출을 스스로 자제해낼 수 있는 그의 여유로움이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그러한 잔잔함이 바로 그의 사후에도 지금까지 카루소가 변함없이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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