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된 이미지에서 피어나는 새로움
퓨전
사물과 공간을 비롯한 우리들의 의식주는 요즈음 그 성격이 서로 다른 것들의 만남으로 인해 전혀 새롭게 탄생하는 퓨전 스타일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다. 고전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 만나 한데 어우러져 탄생하는 현대의 변모된 생활양식은 만남이 산출해 놓은 제3세계이다.
오래전 테크노에 국악을 접목시킨 <와>라는 곡으로 한해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가수 이정현. 빠른 리듬에 비해 춤은 느림보 거북이처럼의 모습으로 언밸런스의 묘한 매력을 선사했던 그녀는 검고 긴 머리채와 비녀, 그리고 한복과 기모노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의상에 대나무 부채를 소품으로 들고 나왔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러한 음악 이외에도 음식이나 패션, 미술, 인테리어 등 우리들의 생활 속 전반에서 새로움의 제3세계는 손쉽게 만날 수 있었다.
집안에 변화를 주고자 하는 인테리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2000년 초부터 각광을 받았던 여백과 자연미를 중시했던 동양의 젠 스타일 대신에 서로 다른 요소를 교차하면서 색다른 느낌을 전하는 퓨전 스타일이 주목을 받고 있다. 차가운 느낌의 금속과 투명한 유리, 녹슨 철이나 부서진 돌 등을 적절히 조화시켜 차가움과 따뜻함, 거침과 부드러움 등 자연적인 요소와 가공의 이미지를 서로 교차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느낌을 탄생시켜 왔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젊은이들의 옷차림을 살펴보면, 드레시한 원피스에 청재킷을 걸치거나 또는 청바지에 정장 상의를 입기도 한다. 예전에는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캐피스(캐주얼과 정장을 접목시킨 스타일) 룩도 마찬가지로 퓨전 패션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티웨어'라 하여 첨단소재가 사용되는 등산복에 평상복의 패션감각이 접목된 고기능성 의류가 새롭게 등장하여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렇게 패션에서도 퓨전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다기능과 다목적 기능을 한꺼번에 얻고자 하는 소비자의 욕구가 강하게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 생활 속에 퓨전 스타일이 침투하게 된 것은 20세기 교통과 통신의 급격한 발달을 그 원인으로 본다. 세계는 인터넷을 통해 지역과 민족을 구분 지을 수 없는 새로운 문화와 생활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세계가 점점 좁아지고 새로운 것을 향한 사람들의 기호는 하루게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으므로 앞으로의 문화 역시 이러한 퓨전 스타일이 좀 더 변화 발전하는 추세로 흘러갈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퓨전은 일시적인 유행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보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퓨전문화의 시조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에 록 비트와 전자 사운드를 가미해 만든 <비치스 브류>라는 앨범으로 알려져 있다. 제임스 골웨이가 플루트로 한국 가요를 연주하기도 했으며, 국악기인 가야금에서 비발디의 사계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어색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신선한 느낌이다.
우리나라에서 퓨전 스타일이 나타나게 된 것은 패션이나 인테리어, 음악 등의 분야보다는 음식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다. '누벨 뀌진'이라고도 불리는 퓨전 푸드는 1980년대 LA의 '시누아 온 메인'이라는 중국 음식점 주방장이었던 볼프강 퍽이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는 야채를 많이 쓰고 상대적으로 고기와 기름을 적게 쓰는 아시아 요리와 프랑스식 요리를 접목하거나, 혹은 한 지방의 요리법에 다른 지방의 요소를 가미했다.
이러한 퓨전 푸드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97년. 살구잼을 바른 갈비구이가 생겨났고 대나무 속에 숙성시킨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했으며, 닭을 주제로 달걀 라이스 팬 케이크나 닭살 김치 오믈렛, 닭안심 명란 치즈구이 같은 독특한 요리도 등장했다.
물론 대표적인 퓨전 음식은 부대찌개이다. 김치와 양파, 콩나물, 소시지와 햄, 고추장 등과 기호에 따라 치즈 한 조각을 넣고 라면이나 떡을 사리로 첨가하기도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서양과 동양, 숙성된 음식에서 인스턴트 재료까지 총망라되어 있는 것이다.
'융합 또는 융해'라는 뜻의 명사인 퓨전 현상은 바로 부대찌개처럼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 간의 조화와 그로 인한 놀라운 상승작용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다양한 종류만 섞어 있다 하여 퓨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뤄 시너지 효과를 발산할 수 없다면 단지 혼란과 에너지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상반된 이미지에서 피어나는 새로움. 그렇기 때문에 퓨전은 만남이 건설해 가는 제3세계가 아닐까 싶다. 오늘도 세상은 각양각색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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