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너머/볼록 렌즈

어느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망

난짬뽕 2021. 11. 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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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망

 

 

어머니     100이라는 숫자를 불과 5년 남겨둔 채 나의 어머니는 눈을 감으셨다. 아들만 아홉, 그중에 첫째와 여섯째 아들, 그리고 셋째 며느리를 먼저 떠나보내신 어머니의 장례식. 75세의 나이로 상주가 되어 손님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는 둘째 형님과 그 바로 밑 동생인 나. 

 

나이 든 우리들의 모습을 조금은 낯설어하며 사람들은 처음에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라고 위로하며 "그런데 연세는 얼마나 되셨죠?"라는 말을 이었다가는 금세 "아, 그러면 호상이네요." 하는 말로 한결같이 끝을 맺는 것이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서른두 명이나 되는 손녀와 손자들의 이름과 또 그들의 아들, 딸들의 관계까지 정확하게 머릿속에 담아 놓고 계시던 나의 어머니. 그러나 그러한 맑은 정신과는 달리, 어느 날 저녁 무렵 목욕탕에서 미끄러지시면서 허리를 다치신 이후 이 세상과 이별하실 때까지 3년을 꼬박 누워 계셔야만 했다. 

 

아들이 아홉이나 되니, 형제들끼리 번갈아가며 어머니를 모셨지만, 칠순을 넘긴 아들들은 물론 환갑을 앞둔 동생들 역시 어머니의 대소변을 손수 받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결국 관절염을 앓고 있던 일곱째 동생이 어머니를 목욕시켜 드리기 위해 당신을 업고 욕실로 가다가 넘어지는 일을 겪고 나서, 우리는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꼬박 3년, 기억력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하루 종일 누워 계신 탓에 활동을 전혀 하실 수 없는 상황에서 음식을 드셔도 소화를 제대로 시키지 못하시던 어머니의 기력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셨다. 

 

 

아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해 봄, 나는 7년 전 너무나 갑자기 내 곁을 떠나 가버린 마누라의 묘를 이장했다. 처음 묘를 세운 그 산 언덕은 우리가 살던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 고작 20여 가구의 노인네들 뿐인 이 산골짜기에 난데없이 새 도로가 놓인다는 것이었다.

 

다른 산 중턱에 아내의 묘를 옮기고 난 며칠 후 읍내에 가서 빨간색 튤립 조화를 한 묶음 사다 화분에 심어 아내에게 갖다 주었다. 어느덧 8월이면 또다시 아내의 제삿날이 어김없이 돌아온다. 그날 나는 한동안 망설인다. '아내를 위해 미역국이라도 끓여 놓을까.' 하는 짧은 고민을 한다. 왜냐하면 그날은 바로 아내의 생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그날, 아내의 생일을 맞아 휴가를 낸 아이들이 서울에서 내려오고 있던 그날 저녁 무렵, 이제 10분 후면 집에 도착한다는 딸과 사위, 아들의 전화를 받고 아내는 막 끓여놓은 된장찌개와 금방 무친 나물들을 서둘러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속이 좋지 않다며 잠깐 자리에 눕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의식을 잃었고, 병원에서는 내일을 넘기기 어렵다는 믿지 못할 말을 던졌다. 

 

 

그리고 나     며칠 전까지 먹고 있던 보약이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시 한의원에 가서 맥을 짚고 약을 지었다. 집으로 돌아와 날씨 탓인지 목이 타 끓여 놓은 물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칡뿌리에 대추를 넣고, 이름도 모를 약초들을 가득 섞은 조금은 쓴맛이 나는 그 물을 7년째 꾸준히 마시고 있다. 아무리 입맛이 없어도 제 때 시간을 맞춰 식사를 하려고 노력한다. 

 

현미에 검은콩을 한 주먹 넣고 은행도 한두 개씩, 보리도 조금 섞어 내 밥은 지어진다. 가끔씩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만, 아내가 살아있을 때처럼 그리 많이 하지는 않는다. 이제 내 몸은 내가 지키려고 노력한다. 가벼운 기침 몇 번만 해도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는 나 자신을 스스로 생각해봐도 참으로 유난스럽다. 

 

 

아이들     이제 내 나이 일흔을 두 해나 넘긴 지금, 없어져야 할 욕심이 더 많아졌다. 손자 녀석을 볼 때마다 '저 아이가 유치원에 갈 때까지, 아니 결혼식장에 나도 앉아 있었으면~~~.' 하는 참으로 큰 바람들이 문득 나를 사로잡곤 한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가장 크게 소망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의 죽음에 대한 문제이다. 

 

어머니처럼 아흔이 넘도록 오래, 그러나 건강을 잃고 난 후 가족들이 느꼈던 감출 수 없는 아주 사소한 문제들 앞에서 생각해 본 이 세상에서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갑작스럽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받아들일 수 없는 아내의 또 다른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나의 마지막 모습도 함께 생각해 본다. 

 

 

굳이 유별나게 나의 몸을 스스로 챙기는 그 별난스러움 뒤에서 나는 내 삶에 있어서의 마지막 축제를 꿈꾼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마무리에서, 그리고 그 생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나는 자유롭고 싶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이 나이에 내가  꿈꾸는 그 축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축제의 날을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조금은 서운하면서도, 기분 좋게 선물하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내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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