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너머/볼록 렌즈

그들을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한 승부수는 무엇이었나?

난짬뽕 2021. 11. 7.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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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한

승부수는 무엇이었나?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 사람들이 그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던졌던 승부수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도전과 좌절, 고난과 극복의 경험을 중심으로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겪었던 준비와 노력들에 대해 엿보고자 합니다.

 


혼을 담은 소리를 내기 위한 노력

박동진

 

국악계에 판소리 완창 시대를 연 선구자인 박동진 선생이 국창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의 고독한 승부에서 목숨을 건 투혼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총명하여 시골 유지의 후원으로 대전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우연히 대전극장에 진을 치고 있던 판소리 공연을 보고 나서 그 소리에 매료되어 소리꾼이 되고자 결심합니다. 

 

광대가 되면 절연을 하겠다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배우기 위해 처음에는 지방 명창의 집에서 1년 반 동안 새경도 못 받는 머슴살이를 하면서 토막소리를 배웠습니다. 그는 이후 더 큰 선생을 만나겠다는 생각으로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전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홀로서기를 했습니다. 

 

그의 소리는 독공을 통해 나름대로 독특한 득음을 하기에 이르는데, 그가 득음을 하기까지 얼마나 투혼을 발휘했는가는 똥물을 하루에 한 그릇씩 60일 동안 마셨다는 데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발성 연습은 하루 18시간씩 40여 일 소리만 지르다 보니, 나중에는 얼굴이 붓고 이도 솟아오르고 죽비를 들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혼자 산속에서 떼집을 짓고 그 안에서 북 대신 참나무 토막을 두드리며 수련을 쌓았고, 국창의 반열에 들고 팔순에 접어들었을 때에도 그는 하루 두세 시간의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하루 12시간씩 점심을 거르며 연습했다고도 전해집니다. 

 

박동진 선생이 자신의 소리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바로 혼을 담은 소리를 내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를 최고의 국악인으로 기억하는 명창의 승부수였다고 생각됩니다. 

 

 


변화구가 숨어있는 강속구에 인생을 걸다

박찬호

 

프로야구의 산실인 메이저 리그에서 선발투수가 된 박찬호 선수가 스카우트된 것은 150킬로미터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97년 14승, 1998년 15승의 성적을 올려 팀 내 다승 투수가 된 박찬호.

 

그러나 강력한 속구라 할지라도 변화구가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프로 무대였기 때문에,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그는 걸핏하면 베이스 온 볼스로 타자들을 출루시키는 고전을 맛보았고 끝내 2군 선수로 밀려났습니다. 

 

팔과 어깨 힘만 믿고 던졌던 그에게 있어 그 시기는 한국을 떠나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야 했습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던 그는 직구만으로 승부를 결정 낼 수 없음을 알고, 직구에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커브 볼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빠른 공만 가지고 강타자들을 잡으려 했던 그는 강속구에 이어 회오리를 몰고 오는 커브 볼을 결정구로 개발해낸 것입니다. 그를 상대하는 강타자들은 강속구가 들어올 줄 알고 방망이를 곤두세웠다가 갑자기 바깥쪽으로 뚝 떨어지는 커브 볼에 헛방망이질을 거듭하였습니다. 

 

결국 박찬호는 158킬로미터까지 뿜어내는 강속구에 이어 128~132킬로미터의 스피드를 갖춘 파워 커브로 위기를 극복한 것입니다. 그 당시 2군 선수로 떨어졌을 때 좌절하여 우리나라로 돌아왔다면 국내 마운드를 장악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굳은 의지로 인내하며 세계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결국 타석의 선수들이 두려워할 만한 투구를 개발해냄으로써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생각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박찬호. 그의 야구인생에서 던져진 승부수는 바로 변화구가 숨어있는 강속구를 자신의 투구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극인 대신 잡지사 기자를 선택했다면?

김명곤

 

대학 2학년 때인 스무 살의 김명곤에게 같은 과 여학생이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가 곧바로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작품을 한번 만들고 죽는 것이다."라고 대답했을 때, 친구는 참으로 불쌍하다는 눈으로 꿈 좀 깨라는 식의 말을 했다고 합니다. 

 

김명곤은 그 꿈을 30대가 되고 40대를 지나 50대가 되어서까지 가슴에 품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이 가난했고 장남이었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했던 그는 결국 잡지사 기자로 취직했습니다. 약 1년간의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연극을 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못했는데, 선생님이 되면 학생들과 연극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배화여고 교사로 다시 자리를 옮깁니다. 

 

그러나 수업이 끝나고 틈틈이 연극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사표를 내고 전업 연극인이 되고자 마음먹었으며 곧 실천에 옮겼습니다. 연극인이 되고 나서 버는 돈은 1년을 통틀어 10만 원도 되지 않았던 그때, 한 달 월급으로 최소한 150만 원을 주겠다며 잡지사에서 그를 유혹하기도 했지만, 김명곤은 물질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이 흔들릴 때마다 좋은 작품으로 공연하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꿈과 목표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굳은 각오를 다졌다고 합니다. 

 

만약 그가 그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연극인 생활을 그만두고 잡지사 기자가 되었다면, 아마도 편집장이나 그 이상의 직책을 맡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좋은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자 했던 그의 꿈은 현실로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며, 국립극장 극장장이 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자,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굳은 의지, 그것이 바로 그의 인생에 있어서 던졌던 가장 중요한 승부수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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