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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미국의 자존심,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난짬뽕 2020. 12. 1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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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미국의 자존심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연주의 포르테 부분에서 보여주는 그 유명한 레니립스. 약 30cm가량이나 허공으로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화려한 제스처에,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경박한 펭귄'이라는 말로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리저리 꼬이는 어깨 밑으로 열광적인 원숭이 춤을 유도하는 경쾌한 스텝. 그리고 점잖은 연미복 사이를 들썩거리는 엉덩이의 강한 흔들림. 

그때까지만 해도 다소 권위적인 인상으로 밖에 떠올릴 수 없었던 지휘자의 모습을, 굳이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지휘 스타일로 대중에게 한걸음 친숙한 클래식을 선사한 그의 이름은 바로 레너드 번스타인이다. 

글 엄익순

사진_ Sony /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 모습이 떠오른다

 

공원에서의 무료 음악회를 통해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결국에는 텔레비전 속으로 오케스트라를 흡입시킴으로써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는 음악사의 이론적인 면들을 굳이 인식하지 않더라도, 레너드 번스타인은 너무나 소탈하고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친근감이 든다. 

 

청중들이 보다 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주제가 바뀌는 부분에서는 첫 번째 테마에 비해 아주 느리게 연주하거나 강조함으로써 그 변화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음악의 메시지를 한층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만 같은 날카로운 리듬감과 확신에 찬 악센트, 그리고 명쾌한 윤곽으로 처리되는 번스타인의 연주는 1962년과 1986년에 녹음된 <신세계> 2악장이 약 4분,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비창>의 경우에는 전체적으로 15분이나 느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는 정확하면서도 표현력이 넘친다는 극찬을 받은 바 있다. 

 

부여될 기회를 위한 준비된 노력

1918년 8월 25일, 미국 보스턴 근교에서 태어난 번스타인이 처음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숙모로부터 낡은 피아노를 선물 받은 그의 나이 8세 때였다. 레슨을 받은 지 채 일 년이 되기도 전에 바흐의 전주곡과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하였고, 14세에는 교회에서 첫 공개 연주회를 그리고 16세가 되어서는 <카르멘>을 각색, 거리에서 상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계 유태인으로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어려운 처지의 아버지는 가난 때문에 아들의 음악공부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특히 그 당시만 해도 단지 경제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결혼식이나 파티 등을 찾아다니며 살아가는 것이 음악인으로서의 대부분의 일부 유태인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번스타인이 음악의 길로 들어서는 것에 대해 많은 반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번스타인은 하버드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음악에 대한 동경으로 다시 그 길을 선회하게 되며, 그의 아버지 또한 결국 아들의 재능을 인정하면서 번스타인의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행복한 가정 속에서 화목한 소년 시절을 보낸 것이 아마도 그의 서민적이면서도 자애로운 인품의 바탕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_hu / 지휘자로 잘 알려진 레너드 번스타인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 것도 색다를 것이다

 

<대학축전서곡>. 레너드 번스타인이 즐겨 연주하곤 했던 이 곡은, 자신의 길을 음악으로 선택한 그가 평소 존경하던 프리츠 라이너에게 지휘 수업을 받기 위해 커티스 음악원에 진학할 때의 시험 곡목이었다. 1940년 번스타인은 보스턴 교회에서 열린 탱클우드 축제를 통해 미국 지휘계의 선구자로 꼽히는 쿠세비츠키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는 곧 번스타인을 자신의 보조 지휘자로 추천했다. 그리고 그 3년 후에는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25세가 되는 그때까지만 해도 단지 무명에 지나지 않았던 그해 11월 14일, 뉴욕 필 부지휘자라는 책임을 맡은 지 채 3개월이 되지 않은 번스타인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객원지휘자인 브루노 발터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해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던 것. 또한 당시 상임지휘자인 로진스키 또한 폭설로 인해 자신의 농장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그 연주회는 CBS 라디오로 생중계될 예정이었다. 결국 번스타인은 리허설도 없이 지휘대에 오르게 되었고,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연주회로 마무리, 세계 음악계에 자신의 화려한 출현을 신고하게 된다. 

 

이 연주회의 성공으로 번스타인은 이후 피츠버그 관현악단과 뉴욕 시립, 보스턴과 이스라엘 필과 같은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으면서 기반을 다져나갔고, 그다음 해에는 노환으로 사임한 메트로폴리스의 뒤를 이어 마침내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된다. 그의 나이 마흔에. 

 

우리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고민만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를 깨닫지 않으면서 마냥 상심에 빠져드는 것은 단지 고민을 위한 고민에 불과할 뿐, 발전이 없을지도 모른다. 고민은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연마와 함께 준비될 때에만 언젠가 자신에게 부여될 기회들을 힘없이 흘려보내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틀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완벽주의자

작곡가로서의 번스타인의 입지는 뉴욕 필과 함께 연주한 자신의 오페라타인 <캔디드>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 뮤지컬을 한 단계 진보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발표, 종래 오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빠른 비트의 노래와 춤으로 뒷골목 젊은이들의 아메리칸드림을 그림으로써 영화와 연극으로도 개작,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공연되고 있다. 

레너드 번스타인을 떠올리는 대명사로 단연 지휘자라는 수식어를 선택하지만, 그는 실력 있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으며, 음악 교육자로도 대변될 만큼 많은 재능의 소유자였다. 

사진_ Sony / 너무 많은 재능을 물려받은 레너드 번스타인을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는 그에 대해 "레너드 번스타인은 좋은 사람이지만, 에고이스트다. 또한 그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지 못할 경우에는 차라리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잠자는 것처럼 가장해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라고 말했으며, 전기작가인 험프리 버튼 역시 번스타인에 대해 "일생동안 자신 내부에 있는 이중성으로 인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 당시 어떠한 이유에서 그러한 말이 유래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 음악계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미국 땅에서 출세하는 방법은 3가지가 있다. 마피아와 결탁하든가, 유태인 아니면 게이여야 한다"라는 속설이 떠돌았다. 

 

번스타인은 과연 어떠했을까? 죽음으로까지 이르게 된 줄담배를 즐기고, 폭음을 마다하지 않으며 밤늦게까지 파티를 즐기기도 하고 동성애까지. '르네상스 인간'이라는 찬사와 더불어 '잡화상'이라는 비난까지 함께 감수해야만 했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작곡하려는 욕구 속에 다른 사람의 작품을 지휘하려는, 또한 동성연애자인 동시에 행복한 가정의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함께 아주 완벽하게 해내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한 자신 스스로의 틀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강박관념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것들을 모두 잘하기 위한 내적 고통 속에서 수없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야만 했던 번스타인의 갈등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어릴 적 외할머니와 부모가 지어준 '루이스'라는, 그리고 '레너드'라는 이름 사이에서 언제나 어리둥절한 태도를 보여 다소 이상한 아이로, 또한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연약한 어린 시절의 모습과 빗대어 부족한 사회성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모든 이유는 바로 단 한 가지. 바로 레너드 번스타인이 너무나 많은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통해 대중적 스타로 등장했고, 그 시리즈로 에미상을 11회나 수상한, 당시 문화적으로 유럽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국 음악계의 돌파구로 상징된 레너드 번스타인이 왜 그토록 즐거워하는 자신의 얼굴 속에 또 하나의 가면을 감추고 있었는지, 왠지 모를 쓸쓸한 마음이 든다.

 

1990년 10월 14일, 심장마비로 자신의 평생을 바쳤던 소리의 세계에서 잠든 번스타인은 2년 전 "아직은 완전히 만족하며 죽을 수 없다. 만들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72세로 생을 마감하던 그 시간 동안 번스타인은 자신이 행하고자 했던 수많은 일들을 다 이루었을까. 

 

낙천적인 정열가로서만 인식되었던 레너드 번스타인이라는 개인적 삶에 대해 왠지 서글픔이 밀려온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나의 머릿속에 각인된 그는 여전히 영원한 멋있는 지휘자였으며, 앞으로도 그의 자리를 대신할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비워놓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오랫동안 고집할 것 같다. 

 

그는 엄청난 수효의 리코딩에 있어서나 막강한 대중적 인기, 그리고 활동무대 또한 빈을 거점으로 미주와 유럽까지 지휘 이외에 피아노 연주와 작곡, 저술, 음악방송 해설에 이르기까지, 더불어 자신이 만든 작품들을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치거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스스로 소화해내기를 바랐으며, 한편으로는 이들을 음반으로 담아내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던, 바로 지휘대의 제왕이기 때문이다. 

 

그의 너무 많은 작품들 중에서 지휘보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역량을 엿볼 수 있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Sony SMK 47519)과 라벨 협주곡 음반, 그리고 번스타인의 작곡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교향곡 3번 <카디슈>나 <치체스터 시편> 같은 작품(Sony SM3K 47162)을 권하고 싶다. 특히 이 앨범에서는 그의 아내인 몽테알레그레의 내레이션이 곁들여져 있으므로 또 다른 분위기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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