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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영혼으로 교감된 완전한 위대함

난짬뽕 2020. 12. 9.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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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으로 교감된 완전한 위대함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1876. 12. 29~1973. 10. 23)

 

첼로의 성서라 일컬어지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바르셀로나 악보점에서 13세의 카잘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로 인해 2백 년 동안의 침묵에서 깨어날 수 있었던 이 곡은 세상에 울려진, 그의 나이 25세가 될 때까지 12년 동안 매일 밤 카잘스와 함께 지새워졌다. 파블로 카잘스라는 마에스트로를 탄생시킨 바흐의 걸작.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의 영혼 안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카잘스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글 엄익순

 

 

"우리의 영혼으로 하는 거야."

자신의 너무나도 큰 업적들에 가리어져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실내악 연주자로서의 파블로 카잘스. 그는 지난 1905년 피아노의 알프레드 코르토와 바이올린의 자크 티보와 함께 3중주단을 조직, 1933년 브람스 탄생 100주년 음악제에서의 최후의 연주회까지 28년간 트리오로 활동했다. 더불어 여러 연주자들과 함께 하는 실내악 연주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피아니스트 유진 이스토민과 미에치슬라브 호르초프스키를 비롯, 바이올린의 예후디 메뉴힌과 요제프 시케티, 알렉산더 슈나이더, 아이작 스턴 그리고 비올라의 밀턴 케이팀즈와 첼로의 폴 토르틀리 등과 함께 좋은 짝을 이루기도 했다.

 

사진 EMI

 

어느 날 슈베르트의 5중주를 녹음할 당시, 5명의 주자가 따로따로 들어가야 하는 2악장에서 계속된 불협화음이 이어졌다. 그로 인해 알렉산더 슈나이더가 제시한 해결 방안은 숫자를 세면서 연주를 하는 것. 그러나 이에 대해 카잘스가 낮은 어투로 제지했다. 

 

"그런 식의 리코딩이라면 굳이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단지 인공적인 합일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마치 영혼의 교감으로 호흡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 연주를 하고 싶어."

 

화려한 독주 악기로 부활시킨 첼로의 명인

파블로 카잘스. 피카소와 함께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예술가로 대변되는 그를 떠올리는 데 있어 가장 큰 접두어는 역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으로 이어질 것 같다. 그의 필생의 작업이 되었던 바흐. 매일 밤 지속되었던 12년간의 연습 끝에 결국 25세가 되어서야 무대에 올린 이 곡을 만난 것은 카잘스의 나이 13세 때였다. 악보를 사기 위해 들른 부둣가의 오래된 상점 한구석에서 먼지에 흠뻑 젖어 있던 두툼한 악보 뭉치. 그것은 바로 그동안 입으로만 전해오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다. 그러나 그 곡을 무대에서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12년간의 연습 시간이 소요된 후였다. 카잘스는 결여된 자신감을 그 이유로 들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연주만을 추구했던 카잘스의 겸손함에서 비롯된 절제된 시간들이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나는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호세 가르시아를 통해 처음으로 접하게 된 첼로의 선율에 카잘스는 그 연주의 첫 악장 첫 번째 음에서부터 매료되어 바르셀로나의 사립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자신을 그토록 열광케 했던 호세 가르시아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카잘스의 아버지 카를로스 카잘스는 그가 음악가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목수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물론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 위치한 벤드럴이라는 작은 마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음악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미 4세 때부터 오르간과 피아노는 물론 바이올린과 플루트를 비롯하여 간단한 작곡법까지 배웠지만, 그는 자신과 같이 카잘스가 음악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아까워했던 어머니의 설득으로 아버지의 반대를 접을 수 있었다. 

 

스승 가르시아에게 정식으로 첼로 주법을 익힌 카잘스는, 그러나 그에게서 배운 주법보다는 오히려 자신만의 연주 테크닉을 찾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첼로 목에 왼손을 계속 묶어두는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에서 벗어나 카잘스는 손과 손가락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폭넓은 시도로 인해 고도의 비르투오시티를 가능하게 유도함은 물론, 카잘스는 자신의 첼로를 통해 아주 거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아름다운 소리만을 최상의 연주로 인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또 다른 형태의 낯설음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카잘스는 그것은 오히려 개개인의 연주자들이 표현해 낼 수 있는 각자의 개성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곡들을 악보 그대로 연주하는 것에 대하여 많은 거부감을 나타냈다. 더욱이 잉크로 쓰인 것에만 얽매이는 것은 연주자의 개성과 감각을 부정하는 행위라 여겼다. 

 

1895년 마드리드에서의 수업을 마친 19세의 카잘스에게 마침내 정식 연주자로서의 첫발은 파리 오페라 극장의 전속 연주자로 시작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점차 뛰어난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높여간 카잘스는 그로부터 3년 후 파리의 라므뢰 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에 독주자로 무대에 서게 된다. 탁월한 기량과 깊은 음악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름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킴으로써 '첼로의 명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더욱이 이러한 파리에서의 성공은 개인적인 명성뿐만 아니라, 단지 단순한 반주 악기에 불과했던 첼로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을 화려한 독주 악기로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서의 전환기를 마련하게 된다. 

 

사진 EMI

 

너무나 솔직한 인간성의 지독한 연습벌레

바르셀로나 음악학교 시절, 카잘스는 자신에게 기회를 부여해준 부모님에 대한 보답으로 모든 학비와 생활비를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자 학교 근처 선술집인 <카페 토스트>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비단 그러한 경험에서만이 아니라, 카잘스는 클래식이라는 음악이 단지 화려한 공간 안에서만 공유되는 것에 대해 스스로 거부감을 느꼈다. 진장한 예술가의 자리는 바로 대중 속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더 나아가 '인간성을 수반하지 않은 예술은 허무하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카잘스는 자신의 음악이 인격적으로 성숙되기를 염원했다. 위대한 예술가로 대변되는 파블로 카잘스. 그에게 동반되는 '마에스트로'라는 대명사는 단지 그의 음악성만을 두고 수식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연주인이기 이전에, 일생을 통해 변함없었던 그의 인간적인 행적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음악 경력에서 간과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지휘자로서의 카잘스이다. 1898년 친구이자 작곡가인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첫 번째 오페라의 리허설 몇 부분을 맡은 것이 문헌상 그의 가장 처음의 지휘로 전해지기는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첼리스트로서의 주된 활동으로 인해 지휘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1919년, 조국 스페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카잘스는 고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라는 생각으로 사재를 털어 바르셀로나 카잘스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그 해 10월 제1회 연주회를 마련한다. 당시 그가 모집한 연주인들은 모두 88명으로 그들은 그 지방의 일반적인 연주자들이 받던 보수의 두 배를 받았는데,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카잘스는 첼리스트로서의 활동을 병행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적자를 메꾸어 갔다고 한다. 그로 인해 자신의 봉급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의 오케스트라는 급성장을 이루었고, 이후 전 세계 무대에서 각광받는 연주단체가 되기도 했다. 특히 카잘스는 슈트라우스를 비롯한 쇤베르크와 베베른,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토크, 프로코피예프 등 당시의 위대한 지휘자들에게 작곡을 의뢰했고, 위대한 현역 지휘자들을 초청하여 그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하기도 했으며,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와 에리히 클라이버, 프리츠 부슈와 오토 클렘페러 등 역사적인 명장들이 카잘스 관현악단을 찾아오기도 했다. 

 

이러한 카잘스 오케스트라의 가장 큰 연주 목적은 바로 '음악의 대중화'였다. 음악은 어느 특정 계층의 소유물이 아니라 만인이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그들의 이념은 곧 <노동자 콘서트 조합>을 통해 더욱더 구체화되었다. 이 조합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전음악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 모임을 계기로 이들은 곧 열광적인 클래식 애호가들로 변모해 갔다. 

 

비단 자신의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런던 심포니와 필하모니아 등을 이끌고 해외 무대에 서기도 했던 카잘스의 16년 동안이나 계속된 지휘 생활은 1936년 7월 프랭크 독재정권이 스페인을 장악하면서 잠시 중단된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누구보다도 최우선으로 여겼던 카잘스로서는 독재 정권 아래서의 연주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조국의 평화와 함께 다시 연주하자는 단원들과의 약속을 뒤로한 채 그는 프라데로의 망명길에 오른다. 

 

사진 EMI / 파블로 카잘스의 연주는 지극히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는 인간적이었으며 동시에 정열적이기도 했는데, 어머니의 고향인 멕시코 푸에르토리코에서 우연히 만난 어머니와 이름까지 같았던 젊은 음악도인 마르티나 몬테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의 나이 81세에 61년 연하의 신부, 장인보다도 서른 살이나 위였던 신랑이었다. 몬테스는 단지 부인 이상의, 카잘스 사후 그를 기리는 모든 음악 활동에 있어서의 중심이 되었으며, 카잘스 사후 생전 '나의 아들'이라며 아꼈던 피아니스트 유진 이스토민과 재혼한 후에도 그들 두 사람에 의해 카잘스 페스티벌은 계속되었다. 

 

1973년 9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파블로 카잘스. 바흐의 모음곡 하나를 12년간이나 연습만 했던 전설 속에 그리워진 첼로의 명인으로서, '한여름 밤의 꿈'의 리허설장에서 스케르초 부분의 반음계를 무려 19회나 반복시키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던 그는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는 현학도 독재로 타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무례함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 누구보다도 자유와 평화를 사랑했던 휴머니스트였음에 틀림없다. 

 

그의 명성에 취해 파블로 카잘스의 연주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적잖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연주 테크닉 면에서 볼 때 오히려 카잘스 보다 더 유려한 기교를 뽐내는 첼리스트들이 없지 않을 것이며, 미적인 측면에서 또한 그보다 더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내는 연주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카잘스의 연주는 마치 무대에 처음 오른 신인처럼 너무나 겸손하여 잔잔하면서도 지극히 부드럽고 무척이나 따뜻하다. 카잘스의 연주에서는 깊은 내면의 성찰을 고스란히 전해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모노 시대부터 스테레오 시대까지 포괄하고 있는 그의 리코딩 중 가장 먼저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역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EMI)이다. 이것은 SP 초기에 단지 3번만 녹음되었는데, 1936년 이후 3년간 전곡의 녹음이 단행되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때의 것이다. 그리고 프라데와 페르피냥에서 열렸던 페스티벌 실황 음반들만 모아 총 10개의 CD로 구성된 <카잘스 전집>(Sony)에서는 클라라 하스킬과 유진 이스토민을 비롯하여 그를 사모했던 많은 명연주자들의 자취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굳이 위에 열거한 앨범이 아니더라도, 그가 함께 한 모든 음반에서 파블로 카잘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곡들을 선택하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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