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아름다움/책

박완서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난짬뽕 2022. 9. 7.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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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의 글은 화려하지 않다. 화려한 치장 없이 담백하고 말끔하다.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라고 말씀하시던 생전의 모습이 떠오른다. 멀리 떠나신 지 10여 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작가의 글과 작품들은 우리 곁에서 변함없이 함께하고 있다.

 

소박하고 진실된 아름다움을 사랑한 작가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불혹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한 박완서 작가는 1931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나 1953년에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40여 년간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의 장편소설을 포함하여 동화와 산문집, 콩트집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남기신 선생은 2011년 1월 담낭암으로 타계했다.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중년 여인의 허기증 중에서

 

이 책은 작가가 1970년부터 2010년까지 생전에 쓰신 660여 편의 에세이 중에서 추린 35편의 글들을 담고 있다. 작가 박완서가 아닌 엄마로서, 딸로서, 이웃집 할머니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그러한 작가의 글들은 한결같이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 안에서 희망과 사랑을 건네준다.

 

가족들에게 사랑의 입김을 불어넣어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젊은이들이 밝고 자유롭게 미래를 펼쳐나가기를 얼마나 기원했는지, 하찮은 것에서 길어 올린 빛나는 진실을 알려주려고 얼마나 고심했는지, 생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얼마나 절절하게 마음이 벅찼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얼마나 정직하고 엄격했던지 그 담금질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따뜻한 사랑의 입김으로'라는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작가의 딸은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딸로서 바라본 작가 박완서의 모습이 바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책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편안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박완서 작가의 글 속에는 늘 사람들을 향한 따스한 공감과 위로,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사랑이 스며 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세계사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수많은 믿음의 교감

보는 눈에 따라 이렇게 한 가지 사물, 동일한 현상도 정반대로 보이는 수가 부지기수다.
사람을 믿었다가 속았을 때처럼 억울한 적은 없고, 억울한 것처럼 고약한 느낌은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어떡하든지 그 억울한 느낌만은 되풀이해서 당하지 않으려든다. 다시 속기 싫어서 다시 속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만나는 모든 것을 일단 불신부터 하고 보는 방법은 매우 약은 삶의 방법 같지만 실은 가장 미련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집 없는 아이

소녀의 옷차림은 초라하지도 사치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그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거였고, 머리 모양도 약간의 멋을 낸 티가 귀여운, 그 나이의 평균치의 머리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건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대화가 있고, 자유와 구속이 적당히 조화된 가정으로서의 집이었다.

 

남부럽지 않게 거두어주는 집은 있을지 모르지만 타인과 제대로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가족이 있는 집은 없는 아이처럼 보였고,

 

다시 꿈을 꾸고 싶다. 절박한 현실 가각에서 놓여나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만 한가해지면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만 한가해지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꿈을 단념할 만큼 뻣뻣하게 굳은 늙은이가 돼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덕방은 내 방

자연히 내 집이 제일이다. 자주 여행을 다니는 것도 내 집에 돌아올 때의 감격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집은 편안한 만큼 헌 옷처럼 시들하기가 십상인데 그 헌 옷을 새 옷으로 만드는 데는 여행이 그만이다.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태껏 만난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나에게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상하게 했지만 살날보다 산 날이 훨씬 더 많은 이 서글픈 나이엔 어릴 적을 공상한다.
이 서글픈 시기를 그렇게 곱디곱게 채색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내가 만난 아름다운 것들이 남기고 간 축복이 아닐까?
예사로운 아름다움도 살날보다 산 날이 많은 어느 시기와 만나면 깜짝 놀랄 빼어남으로 빛날 수 있다는 신기한 발견을 올해의 행운으로 꼽으며 1982년이여 안녕.

 

목차



행복하게 사는 법

남의 좋은 점만 보는 것도 노력과 훈련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니 누구나 한번 시험해보기 바랍니다. 남의 좋은 점만 보기 시작하면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그 좋은 점이 확대되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믿을 수 없다면 꼭 한번 시험해보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는 행복입니다. 행복하려고 태어났지 불행하려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각자 선택한 행복에 이르는 길은 제각각 다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의 색깔은 똑같을 수 없다. 누군가는 경제적인 기준이 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지위와 명예, 권력을 원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잠시 고민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자칫 방향을 잘 잡지 못하면 때로는 상처만 남기는 험난한 항해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곧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인간관계 속에서 남의 좋은 점을 발견해 버릇하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는 거지요.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아이들의 책가방은 무겁다. 그러나 단순히 책가방의 무게만으로 한창 나이의 아이들의 어깨가 그렇게 축 처진 것일까? 부모들의 지나친 사랑, 지나친 극성이 책가방의 몇 배의 무게로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거나 아닐지.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

딸의 일을 위해서 내 일을 희생하느냐 마느냐로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가정을 가진 여자가 일을 갖기 위해서 딴 여자를 하나 희생시켜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느낌은 매우 맥 빠지고 낭패스러운 것이었다.

 

잃어버린 여행가방

나의 최후의 집은 내 인생의 마지막 여행가방이 아닐까. 내가 끼고 살던 물건들은 남 보기에는 하찮은 것들이다. 구식의 낡은 생활필수품 아니면 왜 이런 것들을 기고 살았는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어린 물건들이다. 나에게만 중요했던 것은, 나의 소멸과 동시에 남은 가족들에게 처치 곤란한 짐만 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단순 소박하게 사느라 애썼지만 내가 남길 내 인생의 남루한 여행가방을 생각하면 내 자식들의 입장이 되어 골머리가 아파진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예사로운 아름다움도 어느 시기와 만나면 깜짝 놀랄 빼어남으로 빛날 수 있다는 신기한 발견을 올해의 행운으로 꼽으며"라는 박완서 작가의 글처럼, 나 역시 하루의 길목에서 만나는 작은 일상들 속에서 늘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선생은 자신의 둘레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와 한 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노을 등을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두고 싶다고 했다.

 

가을이 깊어가는 9월의 어느 날 밤에 나는 작가 박완서가 아닌 엄마로서의 박완서가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아들을 먼저 보낸 엄마의 심정을 어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겠느냐마는, 아들을 잃자 따라 죽고 싶었다는 엄마의 마음은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해졌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입니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오늘도 내일도 우리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매일매일 행복이 쌓이다 보면 일주일이, 한 달이, 한 해가 행복해질 것이니까 말이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들을 주로 읽었던 나에게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이 책은 힘을 빼고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우리들의 모든 순간순간들이 너무 아프지 않은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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