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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섬세한 문체에 숨은 수많은 은유와 감정들

난짬뽕 2024. 4. 1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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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 지은이: 클레어 키건
  • 옮긴이: 허진
  • 2009년 데이비 번스 문학상 수상
  • 2022년 영화 <말없는 소녀>로 제작
  • 초판 1쇄 발행: 2023년 4월 21일
  • 펴낸곳: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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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 소설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의 섬세한 문체에 숨은 의미들

<맡겨진 소녀>는 작가 클레어 키건이 2009년에 발표한 소설로, 같은 해에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타임스》는 '21세기 최고의 소설 50권'에 이 책을 선정했고, 2022년 콤 베어리드 감독에 의해 영화 '말없는 소녀'로 제작되어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2관왕과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작에 오르기도 했다. 

 

나는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 가운데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며 불법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한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제일 먼저 읽었었다. 그 책에서도 그랬듯이 클레어 키건은 문장들 사이사이에 많은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이 책 <맡겨진 소녀>에서도 그러한 클레어 키건의 섬세한 문체들을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11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었는데, <맡겨진 소녀> 역시 '옮긴이의 말'을 포함해도 103페이지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얇은 책 두께에 담을 수 없는 많은 은유와 감정들이 어휘 하나, 문장부호 하나에도 몇 가지 이상의 의미들로 꼬리를 물고 숨어 있어 마치 몇 백 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책을 읽은 듯한 여운을 남긴다. 

 

 

<맡겨진 소녀>의 아빠, 그리고 독자들에게 넘긴 여운의 몫

얼마 동안 맡아달라고 하지?

원하는 만큼 데리고 있으면 안 되나?

 

자신의 집을 떠나 먼 친척 부부의 집으로 맡겨지게 된 소녀는 아빠의 차를 타고 가며 상상한다. 자신을 맡아줄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집을 궁금해하고, 그들과 생활하는 소소한 모습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도 한다. 땅에 끌리는 가지를 보고는 나무가 아프다는 생각이 든 딸에게, 아빠는 무덤덤하게 "수양버들이잖아."라고 건조하게 말한다. 집을 떠나 생활하게 된 소녀에게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환한 날이 될 수 있을까.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p 17

 

"먹기야 많이 먹겠지만 대신 일을 시키세요." "먹을 건 엄청나게 축낼 겁니다." 이제 아빠는 나도 데려다주었고 배도 채웠으니,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한 대 피우고 그만 가고 싶은 것이다. 늘 똑같다.(p 19) 오랜 시간 딸을 남의 집에 맡기면서도 제대로 된 이별도 하지 않고, 감사인사조차 건네지 않은 아빠는 챙겨 온 딸의 짐을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집으로 돌아간다. 

 

 아빠는 왜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이,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없이 떠났을까?  p 21

 

어느 날  킨셀라 아저씨가 손을 잡아주자, 소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아빠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를 통해 집에서와 이곳에서의 자신의 삶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소녀. 집으로 돌아온 날 재채기를 하는 딸을 보고는 그동안 보살펴준 아저씨 부부를 향해... "제대로 돌보질 못하시는군요?" "그 꼴로 돌아오다니, 잘한다."라고 빈정대는 아빠. 

 

<맡겨진 소녀>의 아빠는 너무나 무심하다. 자신의 딸에 대한 사랑도 별다른 관심도 느껴지지 않으며, 예의를 찾아볼 수도 없으며 심지어 거칠기까지 하다. 반면에 친적집 아저씨는 함께 책을 읽고, 매일 우편함까지 달리기도 시키며 시간을 재주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해변으로 산책을 나가기도 하며 다정하게 안아준다. 

 

책의 마지막 부분..... 자신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떠나는 킨셀라 부부에게 달려간 소녀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멀리 아저씨의 어깨너머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다가오는 아빠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것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소녀가 마지막으로 말한 "아빠"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클레어 키건이 독자에게 남긴 마지막 여운이 될 것 같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여름날의 우리들의 비밀

"네. 이 집에 비밀은 없어요."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p 27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p 30

 

남동생이 태어나자, 다시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엄마의 편지를 받은 킨셀라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이제 자신의 집으로 떠나야 하는,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소녀에게... "우리처럼 나이 많은 가짜 부모랑 여기서 영영 살 수는 없잖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때로는 진짜 부모가 가짜 부모보다는 못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소녀는 아저씨 아줌마와 함께한 나날들과 즐거웠던 대화들 생각에, 이곳에서는 항상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고 떠올린다. 

 

<맡겨진 소녀>는 1981년 아일랜드 시골 지역을 배경으로,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 엄마의 출산을 앞두고 친적집에 맡겨져 몇 달 동안 지낸 어린 소녀의 이야기이다. 넉넉하지 않은 경제적 형편, 따스함을 찾아볼 수 없는 아빠, 임신한 채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과 밭일까지 하느라 지친 엄마.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소녀는 맡겨진 친척집에서 처음으로 킨셀라 부부로부터 사랑과 다정함을 느끼게 된다. 

 

사실 킨셀라 부부 역시 아픈 상처를 갖고 있는 부모였다. 비밀이 없는 집이었지만, 이제는 킨셀라 부부와 함께 소녀는 지켜야 할 비밀을 간직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예전에 한 번 읽고, 며칠 전에 다시 읽었다. 나 또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서 그런지, <맡겨진 소녀>에 나오는 아빠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다. 무능하고 무책임까지 한 아빠, 착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다섯째까지 아이를 낳지만 자식들을 잘 보살피지 못하는 엄마, 타인의 처지나 감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들의 아픔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는 가벼운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서 속이 상했다. 

 

이 책에서 클레어 키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해야 하는 말만 하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는'...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다'... 는 문장들을 읽으면서 그것이 비단 소설 속 이야기로만 머물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할 말은 꼭 해야겠지만 말이다. 

 

<맡겨진 소녀>는 빨리 읽어 내려가면 책 속에 소중하게 담겨 있는 함축적인 의미들을 들여다볼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시를 읊듯이 문장들을 음미하다 보면 클레어 키건의 짧은 소설이 왜 장편소설로 다가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집에서 낯선 첫날밤을 보내는 소녀가 침대에 실수를 했는데도 모르는 척 방이 습해 매트리스에 습기가 찼다고 말하는 것도, 제대로 대답하는 법을 알려주거나 손가락을 짚어가며 책 읽는 법을 가르쳐주는 모습도, 소녀의 걸음걸이에 맞춰 자신의 발걸음을 늦추는 부부의 모습도 무척이나 다정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집으로 떠나야 하는 소녀가 마지막으로 아주머니를 위한 차를 끓이기 위해서 우물에 간 일은 책을 읽은 나도 비밀로 해야겠다. 소녀는...... 이제...... 아저씨 아주머니의 사랑을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어...... 이전과는 다른....... 마음이 튼튼한...... 강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

'양동이와 그 안의 물에 반사된 소녀의 모습'이라는, 키건을 사로잡은 한 이미지에서 비롯된 <맡겨진 소녀>는 한 소녀가 먼 친척 부부와 보내는 어느 여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출간 이래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아일랜드에서는 모두가 읽는 소설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1968년 아일랜드 위클로에서 태어난 클레어 키건은 17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욜라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이어서 웨일스대학교에서 문예창작 석사 학위를 받아 학부생을 가르쳤고, 더블린트리니티칼리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디언》은 키건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는 그가 24년간 활동하면서 단 4권의 책만을 냈는데, 그 모든 작품들이 얇고 예리하고 우수하기 때문이다. 키건은 1999년 첫 단편집인 <남극>으로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2007년 두 번째 작품 <푸른 들판을 걷다>를 출간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출간된 가장 뛰어난 단편집에 수여하는 에지 힐상을 수상했다. 2009년 쓰인 <맡겨진 소녀>는 같은 해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최근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소설 부문 오웰상을 수상하고,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소설, 간결한 문장 속의 깊은 함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소설, 간결한 문장 속의 깊은 함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지은이: 클레어 키건 옮긴이: 홍한별 초판 1쇄 발행: 2023년 11월 27일 2022 오웰상 소설 부문 수상 2022 부커상 최종후보 펴낸곳: 다산북 소설 은 의 작가인 클레어 키건의 작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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