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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단편소설집 <각각의 계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의 진실

난짬뽕 2024. 1. 1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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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 지은이: 권여선
  • 교보문고 '2023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
  • 문학동네 소설집
  • 1판 1쇄: 2023년 5월 7일

 

권여선 소설집 <각각의 계절>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집 <각각의 계절>은 모두 일곱 편의 소설들을 담고 있다. '사슴벌레식 문답'을 시작으로 '실버들 천만사', '하늘 높이 아름답게', '무구', '깜빡이',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에 이어 '기억의 왈츠'로 마무리된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와 '실버들 천만사'는 각각 2019년과 2020년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이고, '기억의 왈츠'는 2021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보통 여러 작품들을 함께 모은 소설집의 경우에는 수록된 작품 중 하나를 뽑아 책 제목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집은 세 번째 작품인 '하늘 높이 아름답게'의 마지막 문장인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에서 뽑아 온 것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권여선 작가의 글은 현학적으로 치장되지 않아 읽어 내려가는 데 있어 막힘이 없다.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 덜커덩거리는 방지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편안하게 읽어 내려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갖고 있는 무게감이 결코 가볍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한 작품을 읽고 나서는 그 여운이 깊어 잠시 쉬어갈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에도 억센 표현이나 강한 어조를 내보이지 않았지만, 읽는 이의 마음 한 구석을 향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각각의 계절>에 소개된 단편소설들은 모두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하게 귀 기울여 보면, 그것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기억과 관계, 감정들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다. 너무나 익숙해서 쉽게 간과해 버릴 수 있는 일상의 질문들을 권여선 작가가 낮은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건네주고 있다. 만약 책을 읽고 있는 우리들이 작가의 그 질문들을 인식하게 된다면 분명 우리 모두는 한 걸음 더 성숙해지고 있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소설의 내용과 기억에 남는 문장들

사슴벌레식 문답: 친구 정원의 이십 주기 추모 모임에 참석한 준희는 대학 신입생 시절 같은 하숙집에서 지냈던 친구들을 떠올린다. 상냥하고 조심성이 많고 무서움을 잘 타는 성격의 정원은 교직을 던지고 연극판에 들어갔지만 자살한다. 한때 운동권 동지였던 부영과 경애. 교수직을 제안받은 경애는 함께 활동하던 동료이자 친구 부영의 남편을 팔 년 동안 감옥에 갇히게 하는 진술을 한다. 경애의 배반으로 더 이상 서로 보지 않게 된 이들의 우정. 준희는 삼십 년 전 그녀들과 함께 떠났던 여행을 추억하며 그들이 나눴던 '사슴벌레식 문답'을 생각한다. 오로지 즐거웠던 추억으로만 남아 있던 그 여행이 어쩌면 아름답게 채색하려 애썼던 기억의 오류였음을 깨닫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p 36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어디로든...... 갇힌 기억 속의 내 옆에 쌍둥이처럼 갇힌 지금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  p 42

 

실버들 천만사: 딸 채운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이혼한 엄마 반희. 딸이 자신을 닮을까 봐 두려워 도망치고, 딸과 이어진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어내려고만 했던 반희는 딸과의 1박 2일간의 짧은 여행을 통해 딸의 상처를 알게 되고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그들 모녀는 그동안의 불안한 관계에서 벗어나 단단한 사이로 다가서는 변화를 맞는다.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p 75

 

하늘 높이 아름답게: 일흔두 살에 병으로 죽음을 맞이한 마리아를 회상하는 성당 신도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갖고 있는 타인에 대한 시선의 양면성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고귀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 역시 나만의 오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p 114

 

무구: 소미는 페이스북을 통해 이십 년이 넘어 대학동창 현수를 다시 만나게 된다. 부동산중개인이었던 현수를 통해 땅을 구입하지만, 그곳은 묘역이 들어설 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친구 현수는 소미와 연락을 끊고 잠적하게 되고, 땅을 사느라 빚을 졌던 소미는 한동안 속앓이를 한다. 그러나 묘역이 들어선다는 그 부지는 개발구역이 되어 소미는 건물주가 되어 부유한 은퇴생활을 누리게 된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현수에게 들은 말은 자신의 기억 속에 저절로 퍼즐이 맞춰져 어떤 형태를 갖추었지만, 자신이 현수에게 한 말은 허공에 산산이 흩어져 그런 파편적인 정보로 현수가 자신의 삶을 상상했다면 그건 매우 허술하거나 왜곡된 것이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었다.  p 125~126 

 

깜빡이: 독립한 두 딸 혜영과 혜진은 엄마와의 점심식사 자리에 나가고, 자리를 함께하기로 한 이모는 길을 잃는다. 엄마와 동생 사이에서 완층 역할을 하는 큰딸 혜영. 그녀 자신이 어쩌면 가족의 깜빡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끈질긴 온화함. 그게 혜진을 대하는 혜영의 오래된 방법이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말의 속도를 유지하고 표정을 흩뜨리지 않는 게 중요했다.  p 150

진짜 귀신같은 게, 내가 언제 약간 행복해지고 내가 언제 약간 기분 좋아지는 지를 딱 노리고 있다가, 딱 재 뿌리는 시점을 엄마는 귀신같이 아는 것 같아.  p 154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아들 오익에게 딸의 일로 늘 전화를 걸어 푸념하는 어머니. 오빠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희생당했다며 억울해하는 동생 오숙. 자신의 현실만 알아주기를 바라는 어머니. 그 사이에서 나름 자신도 괴로웠던 아들 오익의 이야기.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p 199

 

기억의 왈츠: 동생 부부와 함께 교외에 있는 숲 속 식당을 방문한 나는 오래전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던 과거를 기억해 낸다. 젊은 시절 어머니와 오빠로부터 학대당한 이후 스스로의 삶에 대해 냉소주의에 빠진 나. 그로 인해 자신에게 다가왔던 사람들의 마음도 알아채지 못한 채 홀로의 덫에 걸려 살아왔던 그녀는 지난날의 사건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희망과 선택으로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기를 마음먹는다. 

내가 무엇이 될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지 않았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일은 마치 몸이 뒤집힌 채 거꾸로 치달려가는 느낌이었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 최악의 과녁에 정통으로 박히리라는 느낌, 그러면 끝장이라는 시원하고 원통한 예감만 들었다.  p 209

자다 가끔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날 때가 있다. 누구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 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그렇게 했다.  p 230

어둠이 내리고 잿빛 삼베 거미줄이 내 위에 수의처럼 덮여도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p 242

 

<각각의 계절>을 읽고 난 후, 내가 느꼈던 점

사슴벌레식 문답 ☞  내가 기억하는 있는 것들은 모두 진실이었을까.

실버들 천만사 ☞  때로는 나의 배려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 누가 누구를 평가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  

무구 사람이 무구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깜빡이  ☞ 자식에게 짐이 되는 부모는 되지 말자.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나는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까.

기억의 왈츠 ☞ 스스로를 옭아매지 말자. 

 

소설가 권여선 작가에 대하여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인하대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 숲> <안녕 주정뱅이> <아직 멀었다는 말>, 장편소설 <레가토> <토우의 집> <레몬>, 산문집 <오늘 뭐 먹지?>가 있다. 오영수 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리문학상,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김승옥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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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드는 생각 하나

권여선 작가의 소설은 한 편의 작품을 읽고 나서는 뜸을 들여야 한다. 읽는 동안에는 눈치조차 주지 않았던 어휘들이, 가볍게 쓰인 듯한 문장들이 나도 모르게 과거의 어느 장면들을 마주하게 하고, 내 삶의 한 순간들을 반추하게 만들어버린다. 소설집 <각각의 계절>의 각 단편들이 보여주는 문체들은 텁텁하지 않아 목 넘김이 수월하지만, 편안하게 소화가 되지는 않는다. 명치끝을 옭아맬 정도의 드러나는 고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묵직한 돌멩이들이 나의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결석이 되어 쌓이는 기분이 든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p 241 <기억의 왈츠> 중에서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각각의 계절>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그 말은 바로 위의 문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것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기억의 왈츠> 중에서

 

내가 나로서 살아가길 바라는, 당신이 당신으로서, 그들이 그들의 생각과 모습으로 우리들은 각각의 계절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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