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로 다시 낮이 찾아왔고, 몇 번의 밤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가슴이 떨려오고 마음이 진정되지 못한 채, 제대로 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너무 무섭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옆 동네에 사시는 아저씨께서 한밤 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몇 달 후에 집으로 돌아온 아저씨는 말도 어눌해지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집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인기척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며 몸을 떠는 아저씨를 회복시키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몸을 보할 수 있는 음식들과 약을 지어왔지만, 아저씨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아저씨는 저와 함께 동네를 뛰어다니며 놀던 친한 언니의 자상한 아빠였습니다.
아저씨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을 때, 마을에서는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습니다. 평소에 소신 있는 말씀을 하시던 아저씨였기에, 동네 어른들은 물론 저희들 같은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말조심을 하라는 얘기였습니다. 절대 속에 갖고 있는 생각들이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는. 그럴 경우 같이 소꿉놀이를 하던 언니의 아빠처럼 누구든지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사령부의 포고령을 들었을 때 저는 어린 시절의 그 아저씨가 떠올랐습니다.
오빠들이 대학생이 되자, 아빠와 엄마는 거리에 나가는 오빠들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붙잡히지만은 말라는 마음이셨을 것 같습니다. 그 시대, 전국의 거리는 대학생들의 시위 진압을 위한 최루탄 사용으로 인해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게 된 아빠의 제자가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밤, 어머니와 함께 자신이 키우던 토끼 두 마리를 데리고 저희 집에 왔습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 오빠는 공부를 잘했지만 가정형편이 녹록지 않아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 했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주변사람들이 십시일반 정성을 모았고, 그 오빠는 우리들의 자랑거리가 되어 서울로 떠났습니다. 토끼를 잘 부탁했던 그 오빠가 그 이듬해 시골로 내려온다는 소식에 저는 그동안 토끼가 잘 먹고 잘 크고 있다는 말을 전할 생각에 기뻤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을 끝내 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 학부의 법대를 나와 자신과 같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그 오빠의 꿈은 날개도 펼치지 못했습니다. 홀로 자신을 키운 고생하신 어머니의 모습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고, 넉넉한 생활형편이 아니었던 주변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정성을 모았던 고마움도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오빠는 거리에서 쓰러져 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외면한 채 도서관에 앉아 있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힘이 없었습니다. 그 오빠를 지켜줄 권력도 부도, 그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 이유였을까요. 도망가지 못했던 그 오빠는 어디론가 잡혀가 몇 달간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고, 어른들도 차마 바라볼 수 없는 모습이 되어 차갑게 돌아왔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로 출장을 가게 되었을 때, 저는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마중 나온 담당자의 차에 올라 전남도청을 지날 때 그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무고한 시민들과 어린 학생들이 떠올랐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그때의 내가 너무 어렸다는 것도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까지도 지금까지 늘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지금의 자유와 평온함은 모두 험하고 거칠었던 앞 시대를 목숨으로 지켜낸 모든 분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입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그러한 많은 분들의 희생으로 힘들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꼬박 밤을 새운 며칠 전 그날 밤, 밤새도록 미국과 영국 등 외국 거래처들에서 계속 연락이 왔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외교 상황은 최악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공정과 상식이 없는 지도자로 인해,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우리나라는 국제적 신뢰가 바닥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충격적이고,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반식재상, 지금 나는?!!!
당나라 6대 황제인 현종을 도와 당대 최성기인 '개원(開元)의 치(治)'를 연 재상은 요승이었습니다. 개원 2년(713), 현종이 망국의 근원인 사치를 추방하기 위해 문무백관의 호사스러운 비단 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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