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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지휘자로 부활한 또 다른 이름으로의 베토벤

난짬뽕 2020. 11. 20.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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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이름으로의 베토벤, 그 영감적 신비주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서른한 살의 나이로 베를린 필 지휘대에 오른 빌헬름 푸르트뱅글러(1886.1.25~1954.11.30). 청중들로 하여금 악장과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도록 관례를 만들기도 한 그는 히틀러의 반유태주의와 독재에는 반발했지만, 음악에 있어서 만큼은 철저한 독일인이 아니었을까.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푸르트뱅글러는 전혀 색다른 울림을 창조해내는 낭만적인 지휘자, 바로 그 이름으로 기억된다.

글 엄익순

 

1954년 루체른 공연실황 음반이다.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 (주)명음레코드

 

지휘자라는 이름으로 떠오르는 나의 기억 속에는 화려하고 현란한 동작으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레너드 번스타인과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권력과 부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조금은 권위적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리고 놀라운 암보력과 불 같은 성격으로 특유의 카리스마를 연출시킨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던 사람은 바로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아니었을까.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거의 모든 앨범 재킷에서의 그는 한결같이 무표정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셔츠의 조금 올라간 커프스 밑으로 비춰지는 그의 손목은 마치 잘 다듬어진 청동처럼 매끄러우면서도 빈틈이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강한 힘까지 전이되고 있는 듯하다. 대부분 손에서 팔로 연결되는 손목 부분에서는 마치 병목 현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폭이 좁아지는데, 푸르트뱅글러의 손목은 엄지와 검지 손가락에서 일직선이 되도록 밑으로 선을 그어 놓은 것과 같은 형태로 손목이 무척이나 굵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왠지 무척이나 연약해 보이는 마른 체격과 두 눈이 깊게 고인 그의 얼굴에서 받은 여린 첫인상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시선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손목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는 그만의 지휘봉은 어떠한 색조를 지니고 있을까. 푸르트뱅글러에게 모아지는 나의 관심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점화되고 있었다. 

 

푸르트뱅글러는 9번 교향곡이 베토벤 전 교향곡 중의 정수인 동시에 완성이며 끝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명확한 비트의 지휘는

멜로디의 자연스런 흐름을 단절시킨다

 

각이 지는 기계적인 정확함 보다는, 원을 그리는 듯한 푸르트뱅글러의 손과 팔의 움직임은 일반적으로 인식해 오던 정통적인 지휘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악보를 신성시 여겼던 토스카니니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음악가들과 달리 그는 악보 자체를 진실의 창 건너편에 존재하는 허상의 일부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단지 표준적인 테크닉으로 발산시켜 놓은 결과물은 그 또한 지극히 표준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뿐이라며, 확실한 비트로 손을 젓는 행위는 아주 낮은 차원의 지휘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지휘 방식은 기본적으로 박자를 센다기보다는 멜로디의 선을 그려나가는 새로운 형태의 구성이었다. 

 

"이 구절은 반드시, 반드시 그렇게, 반드시, 내 말 아시겠죠, 그렇게 해주세요. 여러분."

 

연주 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시선은 푸르트뱅글러의 지휘봉보다는 오히려 그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의 지휘가 그리 엄정하지 못할 만큼 부정확한 형태였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그 자신 스스로가 충분히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다. 즉 어느 악장에서 어떻게 연주하라는 세부적인 지시 사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고, 더욱이 정확한 박자와 장단이 부재한 상태의 지휘라 할지라도 그의 단원들은 아주 섬세한 테크닉으로 청중들에게 놀랄 만한 감흥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마치 푸르트뱅글러에게 작품의 영적인 본채를 찾아내는 힘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그의 모습은 바라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전혀 색다른 울림을 창조해낼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많은 연주자들은 음악과 인간을 서로 교감시키는 마법을 뿌려놓는 신비주의가 바로 그로부터 전이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그의 연주는 자연히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으며, 곧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즉흥의 산물이라는 견해까지 대두되게 되었다. 

 

고뇌에 빠진 듯한 푸르트뱅글러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나치 체제에는 반발했지만,

음악에 관한 한 독일정신을 사랑한 휴머니스트

 

1886년 1월 25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푸르트뱅글러의 아버지 아돌프는 당대 독일을 대표하던 석학 중의 한 사람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고고학 교수였고, 어머니 아델라는 화가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7세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게 된 그는 당대의 주도적 음악가들인 라인베르거와 폰 쉴링스, 베어발프룬에게 작곡과 음악이론을 배웠고, 명지휘자인 펠릭스 모틀로부터 지휘 교육을 받았다.

 

푸르트뱅글러의 처음 목표는 작곡가였는데, 17세가 되던 1903년에 처음으로 교향곡을 작곡했던 그는 대리 지휘자로 나선 뮌헨에서의 어느 연주회에서 청중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게 된 것을 계기로 그 이듬해 지휘로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지휘자로서의 공식 데뷔는 1906년 뮌헨 카임관현악단과 함께 이루어졌고 취리히 시립 가극장과 뮌헨 궁정 가극장 등을 거치면서 점차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25세 때 뤼벡가극장 지휘에 이어 1917년 만하임 궁정가극단의 지휘자가 되면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지휘자로 손꼽히게 되었다. 특히 그 해에는 평생 자신의 음악적 반려자가 된 베를린 필을 처음으로 객원 지휘하게 되는 기회가 주어졌고, 불과 5년 후에는 31살의 나이로 이 오케스트라의 전권을 이임받는 음악감독으로 추대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간 베를린 필은 푸르트뱅글러라는 이름과 함께 황금기의 전성기를 동반하게 되었다.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세계는 일반적으로 3단계로 구분되어져 왔는데, 제1기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8년 말까지의 시기이며 제2기는 1940~45년 사이, 그리고 2차 대전 후 점령군 당국에 의해 음악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47년 5월 25일 복귀 연주회를 통해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 활동을 재개한 후부터 죽음을 맞이하기까지가 나머지 시기이다. 

 

초기 시대에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그의 예술적 특징은 표현 방법론에 있어서 가장 객관적인 방식이 모색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만의 개성인 감정의 거대한 복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시기에 비해 논리적인 균형감이 다른 시대와 비교해 볼 때 가장 많이 내재됨으로써 지나친 템포 루바토나 감정이입 등이 절제되어 형식적인 안정감이 분명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한편 제2기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초래한 긴박감과 혼돈 때문인지, 동요가 심하고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굴절된 것이라고도 평가받을 만큼 가장 도취적이고 주관적인 세계에 몰입해 있던 시간들이었다. 물론 이러한 영향은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긍정적인 측면에서 평가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시기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지향하고자 했던 낭만적이고 주관적인 음악 이념이 가장 극단적으로 포착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제3기는 현재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성향의 그의 음악이 걸쳐 있는 시기이다. 음악의 템포는 한층 느려져 있고, 내용은 더욱 심오해졌으며 비극적인 기운이 연주 전체를 사로잡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전쟁이 지나간 후에 느끼게 된 인간애에 대한 회의와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관조가 뒤섞여 나타난 결과라 생각된다. 

 

1933년 초기 전체주의 시대에 푸르트뱅글러는 히틀러의 예술 탄압과 유태인 박해에 강하게 반발했다. 명지휘자 브루노 발터의 연주회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무대에 올라가지 못했고, 쇤베르크가 작곡가 아카데미에서 해고되기도 했으며, 베를린 필 단원이던 시몬 골드베르크가 역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연주를 계속할 수 없게 된 상황 속에서 그는 치열하게 격분했고, 항의했다. 그러나 그가 나치 당국과의 투쟁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히틀러의 체제에 대해서는 반발했지만, 독일인으로서의 긍지 때문에 나치에 반대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국외로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국내에 남아 있던 그를 나치는 교묘한 형태로 이용했다. 1933년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프로이센 추밀원의 고문관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며, 1934년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의 지휘자로 추천하자 나치는 급히 그를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 다시 추대하기도 했다. 결국 정치적인 시끄러움을 피하고자 뉴욕 필을 거부한 그의 진의와는 관계없이 미국 음악계에서는 나치에 굴복한 어용 음악가라는 비난으로 그를 몰아붙였다. 한동안 철저히 나치의 선전 도구로 이용당한 푸르트뱅글러는 모든 전화와 행동을 감시당하면서, 1942년에는 히틀러 탄생 전야제의 축하 연주까지 담당해야 할 지경에 빠지기도 했다. 

 

현실과 자신의 소신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푸르트뱅글러의 모습을 떠올리면, 나 역시 왠지 모를 슬픔에 잠기게 된다. /  앨범의 뒷 표지 사진

 

푸르트뱅글러 지휘의 마지막 실황 음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1945년 빈 필하모닉과 갖은 최후의 연주회 직후 푸르트뱅글러는 게슈타포의 감시를 피해 호텔로 탈출, 스위스로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끝난 후 지휘자 레오 보르하르트가 살아남은 베를린 필의 단원들을 모아 연습을 시작할 때, 그들의 목표는 바로 다시 돌아올 푸르트뱅글러에게 가장 좋은 상태로 지휘봉을 넘겨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나치에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었고, 연합국으로부터 연주 금지 명령을 받게 된다. 심리 결과 무죄가 인정되어 그가 다시 베를린 필의 지휘대로 돌아오게 된 것은 1947년 5월 25일. 그의 연주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은 비록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커피와 담배, 심지어 자신의 구두까지 팔아 연주회장을 찾았고 그의 지휘가 계속되는 가운데 끝없이 열광했으며, 막이 내려진 후 오랫동안 아무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푸르트뱅글러가 남긴 명반으로는 1926년에 녹음된 베토벤 교향곡 <운명>과 1937년의 <합창교향곡>, 그리고 그 이듬해의 유명한 작업으로 전해지는 <운명>과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 등의 제1시기의 작품들과 제2시기인 1942년 하순부터 1944년에 걸쳐 녹음된 <합창교향곡>과 <영웅 교향곡>, 그리고 마지막 시기인 1951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개막 연주회에서 실황 녹음된 <합창교향곡>과 다음 해 빈의 무지크페라인잘에서 EMI와 작업했던 베토벤의 제1, 3, 4, 5, 6, 7번 교향곡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음악에 있어서 가장 친밀했던 베토벤 다음으로 즐겨 연주했던 브람스와 바그너의 몇몇 작품들도 좋은 감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1995년 그라모폰 히스토릭 비성악 부문 수상의 영광을 차지했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권하고자 한다. 이 음반은 1954년 8월 22일 루체른 페스티벌에서의 실황 녹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합창>은 그가 1913년 4월 26일 뤼백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이 앨범에 이르기까지 만 41년간 아흔여섯 번의 연주를 갖은 작품으로, 듣는 이에게 남모를 경외감을 부여하고 있는 제1악장과 더불어 청중에게 새로운 생명감을 안겨주는 스케르초와 아다지오의 서정성이 마지막 악장에 이르기까지 강한 황홀경에 빠져들게 한다. 특히 이러한 감동은 곡의 세심한 부분들에 이르러 더욱더 선명해지고 여유로워지는데, 그래서인지 이 앨범을 듣고 있노라면 베토벤이라는 대가가 뿌려놓는 후광과는 별도로 푸르트뱅글러의 우아하면서도 마법에 끌리는 듯한 그의 음악적 유혹에 한껏 매료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라는 지휘자로 부활한 또 다른 이름으로의 베토벤을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연주회가 있은 그 해 11월 30일, 폐렴과 항상재 부작용으로 이어진 청각장애. 그는 자신의 생애 그토록 사랑했던 베토벤과 같은 모습으로 생의 마지막을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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