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란 무엇일까. 너무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시어 하나하나가 마음을 다독여준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가 아닐까 싶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시련과 슬픔과 번민의 불안감을 조용히 함께해 주는 시가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편의 시라도 주머니에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걸어서 건널 수 있다'라고 프랑스 시인인 보뱅은 말한다. 류시화의 시는 우리들에게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건너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언어이며, 희망의 감싸안음이다.
류시화의 어느 시 하나를 내 주머니에 넣어본다. 그리고는 다음 해 봄에 그 시어들을 엮어 나만의 꽃을 피워볼까 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번뇌로 심장을 무겁게 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새로운 몸과 정신으로 깨어나기 위해, 류시화의 시를 읊어본다.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지은이: 류시화
- 2022년 4월 11일 1판 1쇄 발행
- 펴낸곳: 수오서재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늦게 출가해 경전 외는 승려가 발견한 구절
어떤 꽃도
거짓으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어떤 새도
절반의 마음으로 날갯짓하지 않는다
어떤 번개도
건성으로 파열하지 않는다
어떤 강도
마음에 없이 바다로 향하지 않는다
어떤 바다도
절실함 없이 파도치지 않는다
이 길에 온 존재 쏟아붓지 않는 것은 없다
자신이 속한 세상과
일체가 되기 위해
다 걸어야 한다
아무리 작은 기회라도
온몸을 던지는 씨앗처럼

어떤 사랑
어느 길을 걷든
네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느 곳을 가든
너를 찾아다녔다
네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첫 음절 외우면서부터
모든 단어 속에서 너의 이름을 찾았다
너의 이름 알지도 못하면서
소리 들리는 곳마다에서
너의 목소리 쪽으로 귀를 열었다
네가 어떤 언어로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수많은 얼굴들 속을 여행했다
너를 알아볼 수 있기 바라면서
너의 얼굴 본 적도 없으면서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너는 아픔이면서 그 아픔 낫게 하는 손이므로
서로 다른 길 가고 있을 때에도
서로 다른 곳 바라볼 때에도
네가 나를 살게 했다
그런 사람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었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은 사람
숨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의 아픔이면서 그 아픔의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심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직한 사람
좋아하는 것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
어느 길을 가든 자신 안으로도 길을 내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 영혼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
내어 주는 사람
아직 그래 본 적 없지만
새알을 품을 수 있는 사람
하나의 얼굴 찾아서
지상에 많은 발자국 낸 사람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자신에게 너무 작다는 걸 아는 사람
어디에 있든 자신 안의 고요 잃지 않은 사람
마른 입술은 물이 보내는 소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

달에 관한 명상
완전해야만 빛나는 것은
아니다
너는 너의 안에 언제나 빛날 수 있는
너를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너보다
더 큰 너를
달을 보라
완전하지 않을 때에도
매 순간 빛나는 달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뭇잎의 집합이 나뭇잎들이 아니라
나무라고 말하는 사람
꽃의 집합이 꽃들이 아니라
봄이라는 걸 아는 사람
물방울의 집합이 파도이고
파도의 집합이 바다라고 믿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길의 집합이 길들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걸 발견한 사람
절망의 집합이 절망들이 아니라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슬픔의 집합이 슬픔들이 아니라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벽의 집합이 벽들이 아니라
감옥임을 깨달은 사람
하지만 문은 벽에 산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
날개의 집합이 날개들이 아니라
비상임을 믿는 사람
그리움의 집합이 사랑임을 아는 사람

류시화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으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엮은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마음챙김의 시>로 시 읽는 기쁨을 전파한 류시화 시인이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 시집.
<초대> <살아남기> <너는 피었다>에 위로받고 <그런 사람> <저녁기도> <얼마나 많이 일으켜 세웠을까>로 삶의 본질을, <숨바꼭질> <슬픈 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진 방식 때문>에서 사랑을 생각한다. 삶 속에서 심호흡이 필요할 때 가슴으로 암송하는 시, 세계를 내면에서 보고 마음속 불을 기억하게 하는 시들. 섬세한 언어 감각, 자유로운 시적 상상력이 빛난다.
불완전한 단어들이 모여 시가 될 수 있는 것은 가슴 안에 시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는 그에게만 보이는 세상이 있다. 그가 그것을 시에 담으면 그 세상은 모두의 세상이 된다. 여기에 실린 시들이 그것과 같다. 시는 고독한 영혼의 소유자에게 또 다른 고독한 영혼이 보내는 메시지이다. 읽을수록 좋아하는 시가 많아지는 시집, 또 한 권의 마음에 품는 시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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