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음악의 매력을 세상 속으로, 쳄발리스트 김희정

 

 

바로크 음악의 매력을, 세상 속으로

쳄발리스트

김희정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가장 번성한 건반악기였던 쳄발로가 세상 속으로, 아름다운 비행을 시작했다. 울림이 짧아 연주 공간에 제약이 있을 거라는 일반적인 시선은 기우에 불과했고, 고음악은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착각 역시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 다양한 음악 장르와 자유롭게 교유하면서 현대음악 작품들과 함께 무대를 수놓는 바로크 음악의 부활. 그 견인차 역할을 바로 쳄발리스트 김희정이 그려가고 있다.

 

사진제공 김희정

 

쳄발로가 마음을 묶어놓다

"순간 걸음이 멈춰졌죠. 마치 저의 심장을 음악이 감싸 안는 느낌이랄까.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왔지만, 이런 기분이 든 것은 처음이었어요. 예전에는 음악이 그냥 어릴 때부터 늘 해왔던 것, 그 정도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때 제가 들은 음악은 저의 감정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가슴이 한층 더 뭉클해지고, 정말로 이 음악을 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기게 되었죠."

고등학교 시절, 겨울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쳄발로를 만났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듣게 된, 어느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바흐의 브란덴브루크 콘체르트(Brandenburg Concertos) 제5번. '뭐지? 저런 소리를 내는 악기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놀라움으로 그녀는 한참 동안 가게 앞에 서있었다고 한다. 쳄발로의 활약이 눈부시다는 점에서 쳄발로 협주곡이라는 아취를 가지고 있는 이 곡을 통해, 결국 자신을 매료시킨 악기가 바로 쳄발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피아노는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빠져 있었지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무엇인가가 늘 불편했다. 음악이 100% 와닿지 않는 느낌. 그러나 쳄발로는 달랐다. 한순간에 쳄발로의 매력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쳄발로를 전문적으로 배울 기회가 없어서 독일로 가게 되었어요. 물론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죠. 악기를 직접 본 적도 없는데 공부를 하러 간다고 하니, 많이 걱정이 되셨던 것 같아요. 대학에 진학하여 피아노 공부를 마치면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지금 당장 쳄발로를 공부하러 떠나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밖에 보이지 않더라고요."

 

결국 김희정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유학길에 오른다. 독일 아우스부르크 음대에서 쳄발로를 전공하고, 오르간을 부전공으로 대학 및 동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그리고 곧바로 고음악의 세계적인 음악학교인 스위스 바젤의 스콜라 칸토룸에서 공부한 후, 다시 영국 런던의 왕립음대에서 세계적인 쳄발리스트인 Robert Wooley를 사사한다. 이후 다시 독일로 건너가 뷔르츠부르크 음대를 수료한 후 뮌헨 음대에서 피아노포르테를 공부하였으며, 라이프치히 음대 최고 연주자과정을 졸업하였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쳄발로에 대한 열정이 새로워지는 거예요. 고음악의 깊이에 빠져들게 된 거죠."

 

쳄발리스트가 펼친 고음악의 새로운 시도

1987년에 유학을 떠났던 김희정은 200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유럽에서 수학하는 동안 쳄발로뿐만 아니라 포르테피아노와 오르간 등 바로크 시대의 중요한 건반악기들까지 두루 공부하며 한층 음악적 깊이를 더해갔다. 런던 바로크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비롯하여 영국과 독일 유수의 오케스트라 및 실내악단과 연주를 가졌고, 독일의 바흐 박물관과 베를린 악기 박물관, 영국의 런던 악기 박물관 초청연주에서 유서 깊은 원전 악기로 독주회를 하는 등 유럽 다수의 국가에서 수많은 독주회와 협연을 가졌다. 

또한 독일의 권위 있는 라디오 방송국인 MDR, ARD와 녹음 작업을 하였으며 아우스부르크 대학의 강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국제무대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하던 중에 귀국하게 된 이유는 단 한 가지. 고음악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쳄발로의 매력을 선사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제가 한국에 돌아왔을 그 당시만 해도 쳄발로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어요. 국내에 악기 자체도 흔하지 않았으니까요. 한 번은 연주 섭외가 들어와 공연장에 갔더니, 무대에 쳄발로가 아닌 신시사이저를 갖다 놓은 거예요. 어떤 곳에서는 그냥 피아노를 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더라고요. 아마도 쳄발로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것 같아요. 너무 슬펐죠. 귀국 후 한 3~4년 동안은 그런 시행착오들이 계속 있었어요."

 

그러한 과도기를 거쳐 지금은 쳄발로를 공부하는 연주자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국내에서 쳄발로를 접할 기회조차 없었지만 현재 학부부터 전공할 수 있는 대학이 있는가 하면, 직접 쳄발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연주회도 많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쳄발로가 있는 공연장은 전국에서 단 세 곳뿐. 지방에서 연주가 있으면, 김희정은 자신의 악기를 트럭에 싣고 동행한다. 

 

몇 년 전에는 제주도에서의 연주를 위해 쳄발로를 배에 싣고 가기도 했다. 아직까지 쳄발로를 제작하는 회사는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한 상태. 쳄발로는 습도와 온도에도 민감한 아주 섬세한 악기이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손질을 받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 년에 한두 번씩 외국 전문가들이 국내를 방문하고 있다. 

 

"쳄발로를 연주할 때는 전혀 힘을 쓰지 않아요. 완전히 릴랙스 된 상태로 손가락만 가지고 표현하죠. 페달도 없고, 강약의 조절도 되지 않는 악기예요. 세게 치나 작게 치나 전혀 소리의 변화가 없어요. 단지 템포나 스피드, 음의 길이, 뉘앙스로 표현해요. 손가락으로 페달 효과를 낼 수도 있죠. 쳄발로를 오래 공부하다가 피아노를 치게 되면 소리가 안 나요. 힘을 완전히  뺀 상태에서 연주하는 것이 바로 쳄발로이기 때문이죠."

 

쳄발리스트로서 김희정이 소망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쳄발로를 알리는 것이다. 연주자로서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보다 쳄발로가 대중적인 악기로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동안 첼로와 비올라, 바이올린, 피아노 등과 함께했던 무대는 물론 해금과 사물놀이 등 국악기와의 협연과 현대 무용단과의 만남, 재즈와의 교감 등 고음악과 현대음악의 다양한 접목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펼쳐 나가고 있는 이유는 바로 쳄발로의 매력을 마음껏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쳄발로의 대중화를 꿈꾸다

"쳄발로가 사람들에게 너무 낯설고 먼 악기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바로크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원전 악보를 되살리는 고음악이 건네는 설렘을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느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자연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들을 때 편안한 음악들이 정말로 많거든요. 감정적으로 신경을 자극하지 않고, 몸과 마음이 힐링되는 음악이 바로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입니다."

몇 해 전, 김희정은 한국 전통악기인 해금과 함께 호흡하며 관객들을 사로잡은 적이 있다. 원전연주에 있어 워낙 탁월한 해석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에 김희정의 연주회는 늘 주목받지만, 특히 그날의 무대는 한국 전통음악 위에서 우리 고유의 악기와 서양악기가 현대적 음악어법으로 재해석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의의를 남겼다. 특히 공연을 함께 했던 청중의 90% 이상이 잠시도 지루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며 최상의 만족감으로 모두들 극찬한 바 있다. 

 

"연주자 자신이 갖고 있는 음악적 색채도 물론 중요하죠. 그런데 시야를 좀 더 폭넓게 봤으면 좋겠어요. 제가 지금 바로크 음악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지만, 단지 바로크 음악만을 고집한다면 왠지 죽은 음악만 파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완전히 퓨전 형식의 음악을 지향하자는 것도 아니에요. 단지 클래식도 대중의 입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단,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히 있어요. 제대로 공부하고, 자신의 음악세계를 폭넓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죠. 음악적 깊이도 없이 이것저것 시도만 하는 것은 음악 고유의 정체성을 해치는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쳄발로 연주를 들어보지 못했다면, 헨델의 '파사칼리아'와 라모의 '암탉',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과 '미뉴에트' 음악을 추천한다고 말한다. 이 작품들을 듣고 있노라면, 쳄발로의 매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연주회를 준비할 때마다 조금은 조심스럽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요. 마치 도마 위에 올라가 테스트를 받는 기분이 들 때가 많거든요. 그 이유는 음악을 즐기기 위해 오시는 분들도 많지만,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볼까.' 하는 표정을 짓고 계신 관객들도 많이 눈에 띄거든요. 심지어는 악보를 펴놓고 앉아 계신 분들도 간혹 있어요. 정말로 음악을 즐기고, 열린 마음으로 감상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저의 음악이 성장해가는 모습도 지켜봐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쳄발리스트 김희정은 오늘도 새로운 음악적 시도로 쳄발로를 널리 알리고 있다. 2천 석이 넘는 콘서트홀에서의 연주를 통해, 원전악기는 울림이 짧아 큰 공연장에서는 연주하기 힘들다는 고정관념을 시원스럽게 날려버리기도 했다. 그러한 하나하나의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바로크 음악의 매력이 세상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 쳄발로의 대중화를 꿈꾸는 김희정의 아름다운 비행이 한국 고음악의 역사를 새롭게 그려가고 있다.

JAN. 2016 Music Friends

 

고음악의 깊이와 감동,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김진

고음악의 깊이와 감동,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