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아름다움/음악

건반 위의 순례자, 피아니스트 백건우

난짬뽕 2021. 6. 3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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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 위의 순례자

피아니스트 백건우

 

사진 크레디아

 

굳이 지휘자의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더라도, 마치 쾌종 시계의 시계추처럼 오케스트라의 선율에 맞춰  때로는 잔잔한 미풍이 되어 그러나 한순간에는 매서운 파도처럼 강렬해지는 어느 피아니스트의 숨 막히는 열정 속에서 그날의 지휘를 그려볼 수 있었다. 

 

나지막이 연주되는 바순과 현의 서주가 피아노 솔로를 유도하며 시작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 고조를 더하는 꾸준한 상승곡선이 절정에 이를 즈음, 선이 굵고 펼친 화성의 음형을 띠는 그리고 라흐마니노프가 개인적으로 선호했던 가볍고 경쾌한 두 종류의 카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것의 선택은 절대적으로 연주자의 자유에 맡겨졌으며, 처연한 멜로디의 오보에 독주로 막을 올리는 제2악장과 매우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피아노의 기교가 총망라된 제3악장에 이르기까지 내내 청중들의 눈과 귀와 그리고 작은 몸짓마저도 단 한 곳의 대상으로부터 마비된 듯했다. 

 

그는 자신의 연주가 계속되는 가운데 처음에는 왼쪽, 그리고 또 한 번은 오른쪽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우리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동으로 두 번 살며시 피아노 의자를 당겨 앉았으며, 그의 강인한 파워와 기교 뒤에 이어지는 화려하면서도 장대한 풍모의 관현악이 모습을 드러낼 때에는 조용히 자신의 무릎에 두 손을 얹어놓았다. 

 

마치 네 개의 손이 동시에 옥타브를 타고 오르는 듯한 영상으로, 건반 위에서는 물론 피아노 페달을 밟고 있는 양발 또한 투우사에게 돌진하기 위해 뒤땅을 박차는 사나운 소의 결사적인 모습을 연상케 하며 나름대로 피아노 선율에 악센트를 가미했다. 

 

그리고 그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그 자신 스스로가 인간 스타카토가 된 듯 절도 있는 단호함으로 그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고 서슴없이 내달렸던 오른손이 그랜드 피아노의 높이만큼 치켜 올라갔을 때, 그제야 우리는 그의 연주에 잡음이 될까 차마 내쉴 용기가 나지 않았던 숨을 뿜어낼 수 있었다. 

 

숨 막히는 열정 속에 내재된 깊은 여운

지난 1998년 11월 16일. 한 곳의 빈자리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뜨거운 열기를 자아냈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는 무려 10여 분이 넘도록 지속된 박수소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피아노와 가장 근접한 위치에 자리한 바이올리니스트와 행하는 의례적인 애꿎은 악수만이 반복되곤 했다. 

결국 그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무려 7번이나 넘게 무대 뒤로 사라졌다. 결국에는 다시 건반 위에 손가락을 밀착시켰다. 곧이어 흘러나온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중에서 작품 32의 12번이 다시 우리들의 마음을 긴장케 했다. 오케스트라에 대한 작은 예의 때문에 교향악단과의 공연에 있어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협연자의 앙코르 연주가 끝난 후, 아주 긴 호흡의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그는 우리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날의 모든 연주가 막을 내리고 하나둘 조명이 꺼질 때까지, 되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일어설 수 없었던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공연이 시작되는 7시 30분 보다도 2시간이나 먼저 도착한 설렘이, 또한 아직 모든 장치가 완비되지 않은 무대 한구석에서 통통거리는 피아노 조율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던 것 역시, 그리고 자리한 그곳에서의 시간을 마음 한구석에 더욱 뚜렷이 각인시키려는 욕심에 고개를 쑥 내밀며 의자 모서리에 걸터앉을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이유는 바로 단 한 가지. 

 

그날의 지휘자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미하일 플레트네프였기 때문도, 또한 러시아 음악의 자존심이라고 일컬어지는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라는 타이틀 역시 그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피아니스트 백건우라는 고유명사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앙금처럼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수식어와 감탄사로서도 형언할 수 없는
그만의 피아노 언어 속에는 깊이가 있다.
눈과 귀를 대신하여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다면
그의 여운을 전이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황금의 디아파종상'을 비롯, '누벨 아카데미 뒤 디크상'과 '디아파종 월간금상' 등 프랑스 3대 음반상을 수상한 것은 그의 나이 불혹의 반을 넘어서였다. 1961년 줄리어드 음악원에 유학, 러시아 피아노 스쿨의 계승자인 로지나 레빈의 사사 이후 1967년 나움베르크 콩쿠르와 1969년 부조니 콩쿠르의 우승을 거머쥐면서 본격적으로 프로 연주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카네기홀과 뉴욕 앨리스 튤리 홀 등 초특급 연주홀에 데뷔하며 나름대로의 기반을 다져간 그와 피아노의 만남은 8세 때.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와 교회 오르가니스트였던 어머니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은 그로 하여금 피아노를 배운 지 2년 만에 서울에서 첫 번째 리사이틀을 가졌고, 12세가 되던 해에는 당시의 국립 교향악단과 그리그의 협주곡을 협연할 정도로 빠른 성장을 가능케 했다. 

 

"세월이 흐르는 만큼 그 곡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는 것 같군요. 젊은 시절에는 선생님에 의해서 혹은 악보 그대로의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축척이 제 나름대로의 호흡에 맞는 연주를 가능케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년 피아니스트로서 재능을 인정받던 그 당시, 그러나 백건우 자신만은 그의 연주에 대해 아주 형편없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16세가 되던 해 미국으로의 줄리어드행으로 이어졌다.

 

"영화와 사진이었죠. 영화를 통해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히게 되었고, 그 속에서 미국에서의 외로움을 삭이게 된 거죠. 아, 맞아요. 그것의 대부분이 프랑스 영화들이었답니다. "

 

이러한 것으로부터의 감흥 때문이었을까. 줄리어드 유학 시절, 그의 고민은 수업에 대한 압박감보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자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갈등의 종지부는 바로 15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매듭짓는 파리로의 동경이었다. 세계의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부딪치고 숨 쉬는 도시, 그는 한 예술 세계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마음껏 교감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으로서 바로 파리를 선택한 것이다. 

 

다양한 레퍼토리보다는 전곡을 연주한다, 

라벨에서부터 라흐마니노프까지

이미 오래 전에 앨범을 통해 만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나와 함께 자리한 그의 이미지는 너무나 이상하리 만큼 한결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연주 스타일이나 레퍼토리에서 또한 예외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공부를 하다 보니, 모든 작품들이 보는 각도에 따라 너무나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죠. 예를 들면 협주곡 가운데에서 가장 이상적인 작품이라고 대변되는 모차르트와 같은 고전적인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너무나 세련되고 조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에 반해 러시아 작곡가들의 곡들은 왠지 거칠고 피상적인 느낌을 갖게 하죠. 전 이러한 다양한 레퍼토리를 한꺼번에 다루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거장으로서의 그의 이러한 겸손함은,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 음악세계의 다양성에 대한 지양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작품에 대해, 더 나아가 그 작곡가에게 몰입함으로써 연주자라는 위치에서 보다는 그들과 완전하게 동화되고자 하는 그의 진지한 연주관을 대변한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다. 

 

파리에서의 초기 시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라벨에서부터 새롭게 빠져든 리스트에 이어 호로비츠의 강렬함과 연주자로서의 자신감을 부여해 준 스크리아빈. 그들은 바로 백건우 안에서 몇 년, 몇 개월 동안 잠재되었고 그리고 또 다른 여운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라흐마니노프에게 빠져 있다. 

 

앙드레 프레빈과 다니엘 바렌보임을 비롯한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그리고 함께 협연한 미하일 플레트네프에 이르기까지, 많은 피아니스트들은 그들의 탁월한 연주 실력뿐만 아니라 지휘와 편곡에서 또한 남다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피아노만으로도 할 일이 너무 많은데요."

 

그러한 이유로 그는 유독 연주 자체에만 심혈을 기울일 뿐, 오히려 학생을 가르치는 것 또한 연주와 지도를 동시에 병행할 수 없다는 겸손함으로 대신한다

 

하나의 작품에 대해, 더 나아가 그 작곡가에게 몰입한다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음악세계의 다양성에 대한
지양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 연주자라는 위치에서 보다는
그들과 완전하게 동화되고자 하는 
그의 진지한 연주관을 대변하는 것이다. 


 

사진 크레디아

 

"내년 2월 말이면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꼭 다시 만나죠."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11월이었다. 건반 위의 발레리나처럼, 때로는 강한 이미지의 전위예술가처럼 춤추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나의 사회생활은 정신없이 흘러갔고, 그 가운데 한동안 잠들어 있던 나의 또 다른 꿈들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던 시기였다. 이제 막 사회초년생의 단계를 벗어난 그 시기에 백건우 선생님은 나를 최고의 프로로 대해 주셨다. 

 

나는 오래전부터 품어온 꿈 대신에 현실의 안주를 택했지만, 백건우 선생님을 뵙고 난 이후 이상하게도 음악과 관련된 일들이 내게 다가왔다. 비록 음악과 관련된 전공도 아니었고, 클래식 음악에 관한 폭넓은 지식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본업 이외에 음악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졌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내가 만난 음악인 가운데 가장 처음의 기억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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