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너머/짧은 만남, 긴 여운

나는 꼭 잡초 같아, 탤런트 전원주

난짬뽕 2021. 9. 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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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꼭 잡초 같아

탤런트 전원주

 

 

어제 외근을 나갔다가 회사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연히 앞자리에 앉은 승객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친구인 듯한 두 명의 젊은 여인들은 무슨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여러 패널들이 나와 토크쇼 형태의 프로그램인 그 방송에서 연기자 한 분이 너무 고집이 세고 꽉 막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너무 절약만 강요하는 그런 구두쇠 시어머니를 둔 며느리가 안됐다는 말도 했습니다. 제가 버스에서 내리기 전까지 거의 20여 분 동안 그들 대화의 주인공이었던 한 연기자는 정말로 나쁘고 또 나쁜,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정말로 이기적인 고집불통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차벨을 누르는 제 뒤에서 들려오는 한마디, "저런 시어머니 만날 거면, 난 결혼 안 해!".  그들 대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짐작하실 수 있으세요? 

 

제가 탤런트 전원주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2004년 5월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은 <아침마당>이라는 방송에 출연하시고 계셨고, 하루 일과가 너무 바빠서 방송과 방송 사이 목을 축일 잠깐의 시간만이 휴식이 될 정도로 정말로 일을 많이 하시고 계셨습니다. 

 

"나는 꼭 잡초 같아. 아무리 밟고 지나가도 쓰러지지 않으니 말이야. 꽃은 금방 피었다가 시들지만, 잡초는 역경을 겪을 때마다 한층 더 푸르름을 더하잖아. 그 강한 생명력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걸어온 그동안의 발자취가 느껴져. 사람은 말이야. 누구에게나 시련기가 있지. 그런데 용기를 가지고 그 긴 터널의 어둠을 헤치고 나오면, 반드시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해. 그때 자신 앞에 놓인 그 기회를 거머쥘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놓쳐버릴지는 각 개인의 문제가 되겠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면 언젠가는 쨍하고 해가 뜨지 않을까? 극복해야만, 그 폭풍우를 이겨내는 사람들의 가슴에만 서광이 비치겠지. 그때가 되면 하늘을 봐도 그냥 웃음이 나오고, 땅을 내려다봐도 왠지 기분이 좋다는 설렘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지금 바로 내가 그래."

 

1963년 동아방송 성우 1기로 방송에 데뷔한 배우 전원주는 그로부터 9년 후 다시 탤런트로 변신합니다.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 출신으로 중학교에서 2년 6개월 간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그녀의 또 다른 도전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항상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나는 학구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어. 조금 활동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아. 혼자서도 아무 곳이나 잘 다니고, 친구들과 흥겹게 어울리기도 하면서 나 자신 스스로 내 생활을 즐겼던 것 같아. 사실 어릴 적 꿈이 가수였거든. 노래를 조금은 괜찮게 했었나 봐. 학창 시절 아이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고, 입담을 나누던 생활에 익숙해 있던 나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너무 답답했어. 결국에는 내가 그렇게 원하던 무대에 서기 위해 내 삶의 궤도를 수정하게 되었던 것이지. 만족해. 그때의 선택을 말이야."

 

'항상 최선을 다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설계하는 그녀 역시 젊은 시절 많은 좌절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마음을 나누는 몇몇 연예인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서 <보리밭>이나 <그 집 앞>, <만남> 등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우울한 기분을 달래곤 하지만, 방송에 입문했던 그 시절 그녀의 가슴앓이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었을까요. 

 

"배역이 항상 한정되었던 그때가 가장 힘들었지. 파출부나 부엌데기 역할만 맡았는데, 어느 날 문득 아이들이 그런 연기를 하는 엄마를 부끄러워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 당시 남편이 '조금만 참자. 당신은 충분히 해낼 수 있어. 나는 당신을 믿어.'라고 격려해 주지 뭐야. 남편의 믿음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항상 아이들한테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으면서, '과연 나는 내 아들들한테 얼마나 떳떳한 엄마일까, 나는 자식들한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그 순간, 갑자기 정신이 바짝 차려지지 뭐야. 무대에 서고 싶어 교단을 떠나올 때 다짐했던 굳은 각오들이, 고작 배역 하나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 허물어지고 있는 나약함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지. 그리고는 이를 악 물었더니 지금의 내가 되어 있네. 지금 하루에 2시간도 채 못 자면서도 너무나 행복해. 항상 감사할 따름이지."

 

배우로서 자신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될 즈음, 우연히 시장에서 아주머니들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직 우울한 마음이 남아 있던 그녀는 유난스러워 보이는 그 웃음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만들기 위해 매일 거울 앞에서 연습을 하고 또 하였습니다. 그렇게 만들어낸 웃음은 곧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마침 크게 잘 웃어야 하는 아주머니 역할이 필요했던 KBS에서 곧바로 그녀를 캐스팅하게 됩니다. 

 

사진 김명미

 

아마도 기억하실 분들이 계실, 바로 1990년부터 8년 동안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통해 드디어 배우로서의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 드라마를 통해 호탕한 웃음소리를 선보였고, 배역도 도우미 아줌마가 아닌 친근한 시골 아주머니 역할을 처음으로 맡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 웃음소리로 CF까지 찍게 되었고요. 

 

그녀의 이름이 붙은 국제전화 광고는 전원주의 연기 인생을 바꾼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1970년대 인기를 누렸던 만화영화 <짱가>의 주제가인 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안테나를 세우고 지붕 위를 뛰는 배우 전원주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1998년에 방송된 이 광고를 통해 그녀는 30년의 무명 설움을 털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웃음 하나가 내 인생을 바꿔버렸지. 매번 단역만 연기했는데, 8년이나 한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으니 말이야. 처음에는 오기가 생겼지.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보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모습은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언젠가는 햇살이 비칠 것이라고 믿었거든. 만약 내가 배역이 나쁘다고, 주인공 한 번 못해 봤다고 포기해버렸다면 이런 기쁨은 맛보지 못했을 거야. 아직 보여주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믿고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지금의 전원주가 존재하는 것이지."

 

그녀는 하루아침에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조급해하지 말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달리는 마라톤 선수가 되라는 조언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내 인생 최고의 기회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한길을 걸어온 배우 전원주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남편 분이 먼저 떠나셨지만, 그 당시 그녀는 한동안 쉼 없이 달려온 방송 생활로 인해 남편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부만의 시간마저 여유롭게 즐기지 못한 채 늙어간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릴 때가 있어.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곧바로 반박하거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 없이 교만해지는 나 자신을 느끼게 될 때, 정말 후회가 오래 가. 어디서 인터뷰를 하자고 할 때도 '장소가 어디냐, 몇 시간이 걸리냐?'라는 되물음을 할 때가 많아진 나를 보면 참으로 한심해. '전원주,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유명했느냐!'라고 상대방이 비웃을 지도 몰라.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반성하고 뉘우쳐야 되나 봐.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고 필요로 할 때가 정말로 행복한 것인데, 가끔씩 그런 행복함을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나도 항상 반성해야겠지."

 

2004년 첫 만남 이후 10년이 흐른 2014년 9월 하순에 또 우연히 KBS에서 전원주 선생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만남의 10년 전에 배우 전원주는 또 하나의 도전을 꿈꾼다고 귀띔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이 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만남 당시 그녀는 공영방송과 종편에 이르기까지 하루에 촬영하는 프로그램만 해도 보통 3~4편이나 되었고, 악극도 2편을 동시에 공연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만남 이후  또 몇 년 간의 시간이 흐른 2021년 여름날, 버스 안에서 우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배우 전원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첫 번째 들은 생각은 '역시 그때의 꿈을 또 이루셨구나.' 하는 작은 기쁨이었습니다. 안방에 앉아 따뜻한 마음을 전이받을 수 있는 아주 소박한 프로그램에서 솔직한 말씀을 하고 싶다는 10년 전 소망이, 비록 어느 누군가에게는 예상치 못한 험한 이야깃거리의 대상이 되셨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든 생각 하나는,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아쉬움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당시 선생님과 주고받은 문자가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열어보았습니다. 통화할 때도 그러했지만, 문자 역시 따뜻함과 배려의 마음이 오래된 지금에도 느껴지는 문장들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절친이었던 배우 여운계 선생님이 떠나신 후에도 한동안 너무 아파하셔서 주위 사람들이 많이 걱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날 때 저는 어린아이를 둔 새내기 주부였고, 다시 뵙게 되었을 때 역시 여전히 살림살이에는 서툴지만 제사까지 모시고 있는 외며느리였습니다. 배우 전원주가 아닌 인생 선배로서 그녀는 아내와 엄마와 며느리로서의, 그리고 일하는 선배로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다른 누군가에게서 들은 어떤 이야기들보다 진실되었고, 절실했고, 공감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헤어질 때, 선생님은 행복하게 잘 살아라는 말씀과 함께 "나 조금 힘들어."라는 아주 작은 목소리를 건네셨습니다. 가끔씩 방송에서 시청자들에게 호응받지 못하는 옛날이야기를 하시는 선생님의 호탕한 웃음소리 뒤에서 자꾸만 그때의 그 말씀이 함께 떠오릅니다. 이제는 충분히 그냥 편하게 방송을 하셔도 될 연륜이신데, 아직도 치열하게 전쟁터에 서 계신 모습이 조금은 쓸쓸해 보였습니다. 크고 작은 소소한 경제적 지원을 모두 도맡아 하고 계신 선생님에게 주위에서는 "이제 너를 위해 살아. 옷도 좀 사 입고."라는 말씀을 하신다고 합니다. "나 오늘 새 옷 입고 나왔어. 한벌 샀어." "정말 잘 어울리세요. 선생님 잘하셨어요." 이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래서 배우 전원주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나이가 들수록 무심코 하는 말들이 내 마음의 진심일 수도 있으니, 단면이 아닌 말의 뒷면에 숨은 의미들도 잘 새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입니다. 그리고 방송은 방송일 뿐이고요. 찬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에는 작은 상념들이 뒤엉켜 불쑥 터져 나올 때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저부터라도 생각을 잘 정리하는 시간들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들 행복한 가을날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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