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아버지

 

 

딸의

아버지

 

 

 

 

저물어가는 어느 해 봄날, 나의 아버지는 외손자를 키우고 계셨다. 결혼 전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자식을 맡기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건만, 결국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역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였기 때문이었을까. 이제 조금은 즐길 수도 있는 노년의 여유로움을 시집간 딸이 빼앗고 있는 것이다. 친구분들과의 모임도, 개인적인 취미 활동도 마음껏 누릴 수 없는 아버지의 현실. 하루 종일 졸졸 그림자가 되어 쫓아다니는 네 살배기 손자 녀석과 함께 아버지의 하루가 밝아오고 다시 저물어간다. 

 

모처럼 식구들과 함께 한 밖에서의 저녁식사. 개구쟁이 손자를 돌보시느라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위한 자리라고 말하면서도, 구워지는 고기는 내 자식 수저 위에 올려놓는 나의 이중성에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아버지는 상추에 곱게 싼 고기를 내 입에 넣어 주신다. 사랑하는 손자의 엄마, 그러나 그 이전에 나는 아버지의 딸이었다. 

 

그 오래전, 바람이 매섭던 겨울의 길목에서 나의 아버지는 얼마 후 사돈이 될 또 다른 사람의 아버지와 마주 앉아 계셨다. 많은 음식이 거의 다 비워질 때까지, 나의 아버지가 건넨 대화의 내용은 부족한 딸에 대한 너그러운 보살핌을 바라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많이 가르치지 못해 익숙지 못하다는 살림살이, 철없는 막내라 아직 어린애 같다는 당신의 딸에 대한 사랑만이 있었다. 

 

앞으로 새로운 환경과 장소에서 부딪히게 될 딸의 앞날에 대한 작은 방패막이 되어 주시려던 아버지의 그 모습. 그날 나는 왠지 형언하지 못할 미묘한 감정으로 가슴이 먹먹했던 것 같다. 더욱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두 분의 아버지 앞에서 나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두 벌의 양복저고리를 쳐다보았다. 자연스레 낯선 저고리를 내려 또 한 분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때 한편에서는 직접 당신의 손으로 옷걸이에서 저고리를 떼어내는 나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만큼만 처져있던 아버지의 어깨. 자라면서 내가 가장 아프게 느껴졌던 아버지의 쓸쓸한 모습이었다. 

 

시간이 쌓이고 쌓이기 전 이제 막 시작되는 무더위에 눌려 있을 무렵, 아버지는 고등학생이 된 딸을 염려하고 계셨다. 집을 떠나 타지에서, 돌아서면 배고프다는 하숙 밥을 먹고 있는 그 딸을 생각하며 매달 편지 한 통씩을 띄워 보내셨다. '사랑하는 딸에게'라는 멋진 필체를 자랑하며 학교로 도착되는 그 밋밋한 하얀색 봉투의 편지는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늘 화제가 되곤 했다. 

 

시골에서 상경한 촌스러운 여학생을 언제나 당당하게 지켜준 아버지의 편지. 그 안에는 항상 '우리 딸을 믿는다'라며 마무리되는 강한 어휘가 갈등과 고민이 많았던 나의 여고시절을 붙잡아 준 것 같다. 

 

한평생 교단에 몸담으셨던 나의 아버지. 어린 시절, 선생님이라는 이유에서인지 나의 아버지는 만인의 아버지에 더 가까웠다. 친딸인 나보다는 오히려 많은 학생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셨으며, '선생님 딸'이라는 호칭을 나에게 부여해 주시지 않으시려고 그랬는지, 시골에서 보낸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과 관련된 갖은 행사에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입학식과 졸업식 때에도 아버지와 함께한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그 아버지에게 받게 된 편지들의 행렬. 언제나 다른 학생들의 선생님이 아닌 나만의 아버지만을 갈망하던 사춘기 시절, 그때 아버지는 딸의 욕심을 채워 주셨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라는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그래서 내가 아버지만큼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아버지의 딸로 나는 살아가고 싶다. 그런데 그 딸의 아버지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 것 같은 슬픈 생각이 밀려온다. 

 

 

오늘 아버지가 계신 시골에 다녀왔습니다. 

문득 바라본 아버지의 뒷모습, 

서울로 올라오며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

그 어깨에 내려앉은 삶의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조용히 아버지의 손을 잡아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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