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아름다움/음악

우아한 영국의 장미, 재클린 뒤 프레

난짬뽕 2020. 11. 1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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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나의 음악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

Jacqueline de Pre

 

 

동일한 한 명의 음악가가 던져준 세 번의 서로 다른 느낌. 그녀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자신의 연주에 취한 듯 너무나 정열적이면서도 섬세한 그녀의 음악에 대해 매우 신선함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1950년대만 해도 악기를 자신의 두 다리 사이에 놓는 연주 모습이 불순하다 하여, 첼로에 있어서만큼은 꽤나 인색했던 그 시대의 아주 드문 여성 연주자였기 때문에 더욱 강한 인상을 받은지도 모르겠다.

글 엄익순

 

 

그녀의 음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가 비록 더 이상 현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14년간의 병마를 겪어야 했지만, 그래도 최고의 연주자로 인정받은 13년간의 영광과 더욱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도 선택할 수 있었던 사랑이 있었기에, 나는 그래도 그녀가 그리 애달프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며칠 전, 그녀의 연주에 대한 진수를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던 'Jacqueline in tears(EMI 클래식)' 앨범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작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마치 '재클린의 눈물'이라는 이 앨범의 제목처럼, 그녀 자신이 남몰래 삭여야만 했던 그 아픔들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재기할 수 없었던 원인 불명의 난치병에 걸린 후, 다니엘 바렌보임이라는 그녀의 남편이 너무나 쉽게 그녀를 버렸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새롭게 알게 되었다.

 

EMI CLASSICS

 

우아한 영국의 장미로 불린 천재 연주자

한때 영국이 그들의 국화인 장미에 비유하며 아꼈던 여인. 15살에 데뷔, 13년간의 연주생활을 뒤로 14년간의 투병생활을 거쳐 42살이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던, 너무나 짧으면서도 그러나 누구보다도 굵은 삶을 그려갔던 비운의 첼리스트. 마치 첼로와 사랑을 나누는 듯한 모습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그녀의 이름과 함께 동반되는 것은 바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일 것이다. 엘가 생전에는 누구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이 작품을 단숨에 첼로의 명곡 반열에 올려놓고, 오늘날 많은 첼리스트들의 인기 연주곡으로 정착시킨 주인공이 바로 재클린 뒤 프레이기 때문이다.

당시 엘가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했던 지휘자 존 바비롤리는 1934년 엘가가 세상을 떠난 후, 당시 스무 살 밖에 되지 않았던 뒤 프레에게 1945년 자신의 지휘로 열렸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그가 이끄는 할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부탁하게 된다. 결국 첼로의 거장 카잘스가 눈물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녀의 연주는 최상이었으며, 엘가라는 작곡가에 대해서도 새로운 평가를 내리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이때이다. 당시 음악에 있어서는 다른 유럽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영국에게 있어 이러한 뒤 프레의 완벽한 연주는 곧 영국의 자존심으로 부각되었다.

 

볼품없는 이스라엘 선인장과의 사랑

"엄마, 저런 소리를 내고 싶어." 1945년 1월 26일,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태어난 재클린 뒤 프레는 BBC 방송에서 흘러나오던 첼로의 멜로디를 듣고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3살. 당시 음대 출신의 어머니는 이듬해 그녀에게 3/4 사이즈의 첼로를 사주었고, 결국 재키(당시의 애칭)는 5살 때부터 런던의 길드홀 음악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본격적인 첼로 공부에 몰입하게 된다. 1960년 런던의 위그모어 홀에서의 데뷔 리사이틀은 영국 음악계에 있어 경이로움을 던져주었으며, 그 후 그녀는 파리에서 폴 토르틀리에게, 모스크바에서 로스트로포비치에게 각각 개인지도를 받으며 국제적인 콘서트 캐리어를 쌓기 시작, 1967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과의 데뷔 무대에서 슈만의 첼로 협주곡을 통해 타임지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한 그녀가 부모의 반대(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나게 된 것은 1966년 크리스마스이브, 한 파티에서였다. 자신보다 15cm나 작은 몸집의 까무잡잡한, 그러나 지휘는 물론 3백여 곡의 레퍼토리를 언제건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었던 뛰어난 기억력과 6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젊은 피아니스트와 결국 '볼품없는 이스라엘 선인장과의 결합'이라는 세상의 빈정거림을 뒤로한 채, 결혼을 감행하게 된다. 다니엘의 식초처럼 톡 쏘는 성격에, 아주 순진하고 고집스러운 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던 뒤 프레와의 결혼은 아주 최상의 선택인 것처럼 마냥 행복하게만 보였다. 남편을 따라 유대교로 개종하고, 이스라엘이 6일 전쟁에 돌입하자 바렌보임을 따라 전장으로 뛰어들어 총성이 가득한 전쟁터에서 사기를 진작시키는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남편에 대한 사랑이 그 유일한 이유였다.

 

가혹한 운명 속에 시들어 버린 그녀의 웃음

전쟁이 끝나고 영국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한 지하방에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결국 화려한 영웅에게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가난한 모습으로, 그러나 음악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남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그러나 결혼 5년째에 접어들 무렵, 뒤 프레는 몸이 무거워지고 쉬 피로해지며 현을 누르는 손의 힘도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그러한 그녀를 보며, 지나친 인기로 정신이 해이해졌다는 수군거림에서부터 우울증이라니, 결혼생활의 불화 등으로 단정 짓기도 했다. 더욱이 남편까지도 단지 나약한 신경성으로 치부하며, 절망에 빠진 그녀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뒤 프레는 자신도 모르는 몸의 이상을 밝히기 위해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한다.

남편도 이해해 주지 않는 혹독한 외로움 속에서 그녀는 결국 쓰러지고 마는데, 병명은 중추신경이 무너지면서 점차 온몸이 마비되어 죽어가는 '멀티플 스클레로시스(다발성 경화증)'라는 확실한 치료법이 없는 난치병. 결국 뒤 프레는 휠체어를 타지 않고는 끝내 걸을 수도 없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녀를 절망케 한 것은 그녀의 분신인 첼로를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더욱더 마음 아프게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남편 바렌보임이 그녀가 재기불능이라는 판단이 들자 떠나갔다는 사실이었다. 바렌보임은 그녀가 홀로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안면근육마저 마비되어 눈물조차 흘릴 수도 없었던 뒤 프레.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남편의 오해를 풀 수 있었다는 것에 오히려 안도의 빛을 나타내는 듯했다. 그녀의 나이 아직 스물여덟에.

 

EMI CLASSICS

 

끝내 말하기 조차 힘들어진 그녀는 지난날 자신이 연주했던 엘가의 협주곡을 들으며 회상에 잠긴 듯, 1987년 42년이라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그녀의 마지막 길에 배달된 한 다발의 붉은 장미. 뒤 프레가 자신의 짧은 생애 동안 사랑했던 단 한 사람, 바로 다니엘 바렌보임이 보낸 애도의 뜻이었다. 그토록 열정적이었던 두 사람의 추억에 비해 너무나 냉혹하리 만큼 차가운 작별인사. 그러나 그래도 자신을 위해 한번은 생각해 줬다고 뒤 프레는 행복해했을까. 나는 왠지 모를 서글픔에 빠져 트랙을 몇 번이나 돌고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이 앨범을 또다시 들으면서 새벽이 올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너무나 환한 웃음을 사람들에게 선사했던, 살짝 미소 짓기보다는 있는 대로 입을 크게 벌려 크게 웃곤 했던 뒤 프레가, 이 음악이 멈추고 나면 또다시 혼자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좀처럼 그녀의 시야에서 멀어지기에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클린 뒤 프레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대표곡으로는 특히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비롯하여 드볼작과 하이든,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숭어'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로도 어딘가 조금 부족한 아쉬움이 남는다면, 지난 1996년 EMI에서 선보인 <눈물이 재클린>을 권해 본다. 뒤 프레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명곡들이 모두 수록된 이 앨범에는 그녀의 정열과 사랑과 눈물이 모두 녹아내려 슬픈 앙금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의 음악세계 전체를 이 앨범 하나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엿볼 수는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쇼팽의 '첼로 소나타 G단조 작품 65-3악장(라르고)'은 남편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피아노 반주를 맡고 있어, 그들 부부의 화음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느린 악장으로 첼로와 피아노가 교대로 마치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 E단조 작품 85-3악장(아다지오)'은 뒤 프레의 연주를 통해 유명해진 작품. 중후한 품격을 갖추면서도 적당한 낭만성과 서정성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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