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너머/짧은 만남, 긴 여운

세상 속으로 떠난 여행, 거리의 화가 김태연

난짬뽕 2021. 11. 21.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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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떠난 여행

거리의 화가, 김태연

 

 

사진 김명미

 

 

그의 날개는 아직 접혀 있었다. 푸르른 창공을 향해 질주하는 화려한 비상만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새라는 이유만으로 부여된 똑같은 날갯짓.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날 수 있다, 라는 이유만으로가 아닌 왜 날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그 질문에 대해서. 

 

어느덧 일 년 반. 하늘이 아닌 사람들의 세상 속으로 찾아든 작은 새 한 마리의 끝나지 않은 작은 전쟁. 스물여섯 살의 그의 젊음은 그렇게 길 위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

"아닙니다."

"글쎄, 이런 경우가~~~"

 

연세가 지긋한 어느 노신사 앞에서 한 젊은이가 예의를 갖춘 채, 무엇인가를 건네고 있었다. 한사코 뿌리치는 거절과 정중히 부탁드리는 그들의 실랑이가 계속되는 가운데, 결국 그 노신사는 젊은이의 고집을 꺾지 못한 듯,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 한 장을 의아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치열하게 고민하는

젊은 날의 초상

 

스물여섯 살의 김태연. 그에 대한 나의 처음 기억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서울의 가장 화려한 땅으로 군림된 명동 한가운데에서 무심코 스친 그의 첫인상. 그는 침묵하고 있는 듯했다. 모두들 분주해하는 빠른 발걸음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살아있는 목소리들을 그저 관조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명동성당과 소공동 롯데호텔을 잇는 대각선의 중심 지점 즈음에 그는 앉아 있었다. 화판과 이젤을 비롯한 각종 색깔의 도화지와 생필, 그리고 파스텔 종이와 목탄 등의 그림 도구와 낚시용으로 쓰이는 간이의자 2개가 동반된 그는 거리의 화가였다. 

 

"아, 그거요~~~"

 

마치 사진을 찍은 듯, 아니 사진기로 반사된 자신의 얼굴과는 또 다른 느낌을 선사하는 초상화 한 장. 보통 10~15분 정도 걸리는 그 짧은 긴장감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또 하나의 나 자신을 만나게 되는, 그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감사해서~~~"

 

운이 그리 좋지 않을 경우에는 하루에 단 한 장의 도화지도 써보지 못한 채 짐을 꾸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참으로 여유로워 보였다. 보통 주말을 제외한 평일, 오후 4시가 되면 어김없이 그림 도구를 펼쳐놓았다가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향한다는 그가 그림값을 받는 대신 모델료를 드렸다니, 나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 그러실 거예요. 그런데 무엇이라 형언할 수가 없더군요. 눈가에 잔잔한 미소가 비친 그 할아버지의 모습을 처음 뵙는 순간, 그리고 그림이 완성되는 마지막까지 왠지 이상했어요. 마치 무슨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정신이 멍해지더군요. 그때의 기분을 어떠한 어휘로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거 있잖아요. 

 

지나간 삶의 발자취라고나 할까요. 살아가는 데 있어 진지한 그 무엇인가가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 할아버지를 통해 불연 듯 스치더군요. 

 

그것은 제가 그린 그림을 대신하여 받는 어떠한 금액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가치를 안겨주신 거예요. 그 사고의 깊이를 깨닫게 해 주신 할아버지께 어떻게 그림값을 받을 수가 있겠어요."

 

홍익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공부하던 그가 작업실 대신 거리를 그의 화폭으로 결정한 것은 바로 지난 1997년 가을의 일이었다. 

 

"그림을 시작하면서 한때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죠. 좀 더 넓은 세계에 나아가 실력을 쌓고 싶었거든요. 그러던 중, 어느 날 학교 영화동아리에서 상영하는 '후 샤오시엔'이라는 감독의 <동년왕사>라는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죠.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성격이 묻어나는 영화였는데,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 그런지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강한 이미지를 자아내더군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장례식 장면이었는데, 저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계속 울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보아왔던 할리우드의 많은 영화들과는 다른 느낌이더군요. 가슴에 무엇인가가 파고드는, 바로 그런 아픔 같은 것이 느껴졌거든요."

 

그때를 회상하듯, 그는 잠시 말문을 멈췄다. 그리고는 다시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영화가 저에게 던져준 것은 바로 '그림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분야 역시 마찬가지이겠지만, 영화 한 편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동요되는 그 감동의 깊이. 그렇다면 나의 그림은 과연 어떠한가, 지금까지 나 한 사람의 만족으로만 정체되어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그러한 씁쓸한 생각이 들더군요. 왠지 우울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어느 후배로부터 엽서 한 장을 받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더군요. <저의 그림에 대한 관점은 바로 제가 그것을 사고 싶다는 마음에 의해 평가될 뿐입니다>.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왠지 저의 마음을 벅차게 하더군요.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저를 무척이나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렇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여운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일을 하고 싶다. 그 영화로부터 내가 받은 감동처럼, 나의 그림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가 되었으면 좋겠어. 굳이 거창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그냥 작은 기쁨 같은 것이라도 말이야.'라는 생각이 저를 우울하게 하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먹이나 물감을 갖고 다니면서 주로 풍경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두 장의 화선지 사이에 낙엽을 넣고 그 위에 덮인 종이에 물감을 덧바르는 기법으로 입체감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목련 꽃잎을 백반과 녹슨 못과 함께 끓여낸 즙으로 화선지에 인물을 그려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이제는 좀처럼 풍경을 그리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영화 한 편이, 그리고 후배의 엽서 한 장이 저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묻는 삶의 방식에 대한 자문이기도 했죠. 어떠한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인지, 더 나아가 어떻게 나를 채찍질하며 생활해야 할 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한 삶의 고민들을 차분하게 풀어가고 싶었어요. 단지 신선 같은 느낌의 풍경화보다는, 직접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싶었죠. 아마도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물으신다면, 그에 대한 대답이 되겠군요."

 

그가 처음 거리로 나온 곳은 바로 이곳 명동이 아니라, 인사동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곳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부채에 풍경이나 현대 정물들을 그려 넣는 작업으로 외국인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처음 생각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과 직접 부딪히는 문제와는 약간 차이가 있더군요. 물론 거리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자체만으로도 일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그들과 함께 호흡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듯했어요. 

 

단순히 그린 것을 쳐다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들이 직접 저의 그림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초상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죠. 물론 그렇다면 사람들이 생기 있게 움직이는 이곳 명동이 좋을 것이라 여겨졌고요."

 

그 당시 전국에서 만날 수 있는 거리의 화가는 약 200여 명. 그중 서울에서는 남산을 비롯, 한강과 서울랜드에서 소속 없이 활동하는, 그리고 직원 형식으로 채용된 롯데월드의 화가들을 합쳐 모두 70~8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 모두는 아마도 서로 다른 나름대로의 이유로 인해 이렇게 거리의 화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주로 목탄을 재료로 썼죠. 그런데 그것은 너무 진한 느낌이기 때문에 깊은 맛이 떨어져요. 물론 다루기도 힘들지만요. 파스텔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죠. 언뜻 보기에 부드러우면서도 색감이 유연하거든요. 가장 빨리 작업되는 재료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말이죠. 가장 깊이가 있는 것은 바로 연필로 그리는 거예요. 화려한 그림은 몇 가지 색만으로도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쉽지만요. 흑백으로 그것과 똑같은 여운을 얻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간혹 연필로 그려주었으면, 하는 손님을 만나게 되면 무척이나 반가워요. 그런 분들은 왠지 그림에 대한 맛을 알고 계신 것 같거든요."

 

그를 찾는 손님의 대부분은 외국인.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도 적지는 않지만, 그중에서도 일본인이 약 3분의 2를 차지한다. 완성된 그림을 받아 든 그들은 대부분 '닮았다'라는 인사말을 건네며 무척이나 흐뭇해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는 좀처럼 만족해하는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할 정도로 꽤나 인색하다고 한다. 

 

또한 말레이시아와 이란, 그리고 미국 사람들은 그림값을 깎고 또 깎으면서도 작품이 완성되고 나면 다시 트집을 잡아 제 값을 잘 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린다고 한다. 

 

"제 작업에 있어서 고민되었던 '그림의 대중화'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작업실에서, 혹은 화랑에서, 또는 책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그러한 그림들. 과연 그 감상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거리에서는 누구나 이러한 그림들을 미술 작품이라는 거대한 틀속에 비추어 바라보지만은 않을 거예요. 

 

자신이 직접 모델이 되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리는 과정을 직접 바라보면서 예전에 가지고 있던 미술에 대한 거리감이 조금은 무너지지 않았을까요. 제가 대중에게 다가가듯, 많은 사람들 역시 제 그림을 통해 미술이라는 영역을 좀 더 친숙하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즈음 나는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질문을 쉽게 건넬 수 없었다. 그러한 나의 망설임을 눈치챈 듯, 오히려 그가 먼저 나에게 말을 전했다. 

 

"아뇨, 그렇지 않았어요. 부모님께서는 오히려 조용히 바라보시더군요. 거리에서의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제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 격려해 주시기도 했고요. 친구들이나 후배들 역시 좋지 않은 시각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통해 접하게 되는 또 다른 세계를 무척이나 동경하는 듯해요.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았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림 김태연

 

 


영화 안에서 그림으로 말하다

그것이 바로 나의 꿈

 

그는 그 당시 친구가 작업하고 있는 <오대수 이야기>라는 단편영화에서 아트디렉터로서의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각각의 컷을 그림으로 만드는 스토리 보드를 구성하기도 하며, 그 밖의 그림과 관련된 일들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림이 아닌 영화를 통한 또 하나의 외도. 그러고 보니, 그는 1999년 3월 <나는 그림을 배설하고 화대를 받으러 갔다>라는 단편영화를 발표했던 예비 영화인이기도 했다. 

 

"이렇게 거리로 나오게 된 것에 대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림에 대한 대중성, 아마도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다름 아닌 그러한 '그림'과 '영화' 안에서 갈등하는 저 자신 때문일 것입니다. 

 

한때 그림밖에 알지 못했던 제가 그것이 아닌 다른 영역에 빠져들고 만 것이죠. 바로 <후 샤오시엔>이라는 감독을 알게 된 계기로 말입니다. 영화, 그 안에서 저의 생각과 그림을 말하고 싶어요."

 

영화 <붉은 수수밭>을 비롯하여 <햇빛 쏟아지는 날들>과 <집시의 시간>, <언더그라운드>, 그리고 감독 '구로자와 아끼라'의 <라쇼몽>과 <이끼루>라는 작품을 통해 더더욱 영화 세계로 빠져든 그는 1998년 단편영화제작소인 <필름 인>에서 개최하는 겨울 워크숍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신춘문예 시나리오 당선자와 정식으로 극작을 공부했던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당당히 그의 시나리오가 수료 작품 제작의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자전적인 요소가 짙게 묻어나는 작품이었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돈을 받는 것에 대한 우울한 느낌의 이야기였죠. 현실에서 탈피하고 싶은, 그러나 끝내 또다시 그러한 현실 안에서 계속 맴돌기만 하는 주인공이 바로 제 자신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 길이요? 약 10분 정도였죠. 대부분 그러한 시간으로 상영된다면, 필름은 약 1천2백 자 정도가 소요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저희들은 아직 공부하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7백 자 정도의 필름밖에 쓰지 못했습니다. 

 

처음으로 영화의 세계를 엿보게 된 저는 그때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죠. 시나리오만을 보고 든 '이러한 작품이 만들어지겠구나.'라는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편집하고 그것에 사운드를 입히고 색 보정을 거치면서 작품은 한 겹 한 겹 또 하나의 옷을 걸치게 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스텝들 간의 공유, 즉 서로 간의 느낌들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과제인 것 같더군요."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는 숨도 돌리지 않은 채 마냥 그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듯했다.

 

"영화는 참으로 젊은 장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 그림, 그리고 음악 등 모든 영역이 한데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잖아요. 더욱이 대중들이 함께 호흡해 주기도 하고요. 물론 그 작업은 무척이나 어렵고 힘이 들겠지만, 결코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그러나 그림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는 것도, 그것이 완성되고 난 후에도 자기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감동이 없는 그림은~~~ 글쎄요."

 

그의 가족들은 그가 그림이 아닌 영화 속으로 빠져드는 것에 대해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 이외의 다른 길에 대해서는 조금은 인색한 것이 사실. 물론 영화로의 동경 역시 예외는 아닌 듯싶다. 

 

"사실 조금은 막막해요. 제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확신 있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요. 그러나 한 가지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림과 영화, 그것들이 앞으로 저와 함께 동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올해에는 그림 작업뿐만 아니라 단편영화도 한 작품 완성시키려고 해요. 물론 자신 있게 이것이다, 라는 생각에는 아직 미흡하지만 영화 세계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림은 계속 그릴 것이며, 그러한 저의 그림이 영화 안에서 역시 한몫을 담당했으면 하거든요. 영화 속에서 그림으로 말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저의 꿈입니다."

 

그는 '영화 아카데미' 시험에도 응시할 예정이다. 단지 하고 싶다, 라는 자신의 희망과 직접 부딪히기 위해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할 계획. 그리고는 외국에 나가 영화에 대하여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한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영상의 세계는 어떠한 색깔일까.

 

"제가 처음 작품을 만들게 된다면요, 음. 모든 장면을 깜깜한 밤으로 처리하고 싶어요. 주인공이 자신의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일들과 생각들~~~ 그 이상은 비밀입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꿈을 꾸는 것이라고 한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또한 그 이외의 시간에도 그는 눈을 감지 않은 채 자신만의 꿈을 형상화시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회상으로 이곳 길 위에 앉아 있었으며, 앞으로 걸어갈 길을 찾기 위해 그렇게 길 위에 서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나이요? 글쎄요. 아마도 서른여섯 살일 것 같군요. 그때에는 모든 것이 판가름 나 있을 것 같아요.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고자 하는 길에 접어들었을 수도 있고, 혹 그렇지 않다면 현실적인 문제와 타협하여 그것에 안주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다만 그래도 그 나이가 되면, 더 이상 포기하지 못할 명확한 길에 서 있을 것 같기는 하거든요. 그래서 저의 서른여섯, 그때가 기다려집니다. "

 

"아주 넓은 광장 한가운데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인식시킬 수 있는 시간이 단 30초밖에 주어져 있지 않다면~~~"

 

우리가 헤어질 즈음, 나는 그에게 짓궂은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는 잠시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동서남북을 향해 정확히 4번, 제 이름을 부르겠어요. 마치 친구를 부르듯, 그러나 제 자신을 찾는 것처럼 그렇게요."

 

언젠가 우리는 어느 화랑에 걸린 그의 이름 석자를 통해, 혹은 올라가는 스크린 자막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 또는 그림도 영화도 아닌 미처 생각지도 못한 다른 분야에서 그를 떠올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들의 기억 속에 그의 젊은 날의 고민과 갈등은 그대로 간직되어 있지 않을까. 자신을 찾기 위해 세상 속으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스물여섯 살의 거리의 화가. 그때 우리는 아마도 그의 여정을 통해 나 자신만의 여행을 조용히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지난주 반가운 카톡이 왔다. 안부를 묻는 짧은 몇 마디가 오고 갔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6월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그 당시 그는 나를 누나라고 불렀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누나라고 부른다. 일 때문에 만나게 되었지만, 동생이 없는 나에게는 친동생같이 늘 나를 잘 챙겨준다. 

 

그의 외모를 본 사람들은 모델로 생각하지만, 그는 그림을 그린다. 꾸준히 시나리오를 써왔고, 단편영화를 찍었으며, 우리가 알 만한 영화들의 조감독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국제 미술 전시회장에서 그의 작품을 더 많이 만나게 된다. 

 

젊은 날 우리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들을 나누었고, 이제는 살아가는 이야기와 가족들에 대한 안부를 나눈다. 여전히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화폭에 담는 그의 전시회가 다가온다. 20여 년 전에 세상 속으로 떠난 그의 여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스스로를 향해 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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