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너머/짧은 만남, 긴 여운

사진가 최광호, 그의 렌즈 속에서 부활하는 삶의 영상들

난짬뽕 2021. 12. 11. 17:11
728x90
반응형

 

 

그의 렌즈 속에서 부활하는 삶의 영상들

사진가 최광호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의 몸에서 카메라가 떨어져 있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고. 마치 숨을 내쉬듯, 그는 셔터를 누른다. 모든 사고와 인식활동, 그리고 그 속에서 배어나는 가족사와 생활모습. 사진가 최광호의 사진은 곧 그의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 때문에 최광호 사진가를 만난 것은 아주 오래전, 1998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서였다. 그의 작업실로 향하는 길은 두 번의,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깊지 않은 경사의 오르막길을 지나 어느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마치 하늘과 대면하려는 듯한 끝없는 돌계단. 하나, 둘, 셋~~ 조금의 가쁜 호흡이 동반되는 이 공간을 오르내리는 동안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하는 엉뚱한 사고에 빠져 헤아리던 나의 발걸음 수치에 혼동을 느끼게 될 즈음, 나는 아주 노오란 색깔의 자그마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눈에 띈 것은 나의 전신이 다 스며들고도 많은 여유분을 남겨 놓고 있는, 어느 작은 왕국의 수문장처럼 현관 옆에 비스듬히 기댄 아주 큰 거울 하나였다. 외출을 하거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마주치는, 집안에 걸어 놓아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이 거울 앞에서 이곳의 사람들은 매일 자신과의 대화를 하겠지, 그런 이유로 이렇게 밖에 내놓은 것일까 하는 또 한 번의 망상이었다. 

 

"저는 그리 재미있는 사람이 아닌데~~~."

 

만남의 장소가 그의 작업실로 약속되었을 때, 나는 적지 않은 기대감에 설레 했다. 한 개인의 체취를 가장 짙게 공감할 수 있는 그들 생활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더욱이 예술가의 작업 공간은 나에게 있어 무한한 신비스러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리 달구어 놓았죠. 오신다고 해서."

 

신문지에 싼 나무토막을 삼키며 난로는 뜨거운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여느 가정집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그곳은 거실로 향하는 한쪽 벽면이 모두 그의 작업물들로 빼곡히 가득 차 있었고, 몇 사람의 앉을자리를 제외하고는 바닥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저쪽으로 가고자 하면, 책과 자료 사이에 벌어진 틈 사이를 골라 옮겨 다니는 재미 또한 한몫을 했다. 

 

필름과 몇 장의 메모들이 붙어 있는 창가 옆면으로는, 약 110여 장의 사진들이 하나의 구성체로 직사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의도된 빈자리인지, 옆으로 다섯 번째 자리에서 위로 여섯 칸을 올라간 즈음에서의 사진 한 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본 그 사진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볼펜을 가지고 장난을 친 것처럼 이리저리 선이 그어져 있었고, 그 위로 인주에 담갔다 꺼낸 듯한 손바닥이 묽은 자줏빛으로 온통 수를 놓은 듯했다. 

 

"사진 위에 그어진 선들요? 아, 그 위에서 우리 딸아이와 땅따먹기 놀이를 했어요."

 

나는 한층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내가 그를 꼭 만나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사진가라는 이름으로의 그와, 그의 사진 속에서 배어 나오는 우리들의 생활. 그 두 가지 요소는 너무나 밀접하게 다가와 굳이 분류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 속에서 전이되는 너무나 강한 인상 때문에 적지 않은 충격에서 한동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 같다. 나의 욕심은 바로 이러한 양면성에 대한 해답을 그를 통해 직접 듣고 싶었던 것이다. 

 

사진가 최광호

 

내가 본 하나의 얼굴,

그 속에 비친 또 다른 사람들

 

<Auguish>, <Life>, <A. N. Whitehead>, <My grandma>, <She is dead, now>, <Solitude>, <CANCER>, <American Graffiti>, <AIDS>, <귀향길>, <알프레도와 토토>, <ALIVE>, <COSMIC CONNECTION>, <My parent>, <순환>~~~

 

1994년, 내가 이러한 제목들로 그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아마도 도올 김용옥의 <기옹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였던 것 같다. 본문 사이사이에 걸쳐 자리하고 있는 그의 사진들을 발견했을 때, 처음에는 단지 그 내용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쉽게 간과해 버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곧 나의 시선은 <Life>라는 제목으로, 두 페이지에 걸쳐 펼쳐져 있는 사진 한 장에 머물렀다. 아마도 어느 남자의 오른손인 듯한 그 사진은 손등의 혈관이 뚜렷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마치 두 손을 약간 추켜올린 그리고 왼쪽 다리의 무릎은 다소 꺾인 듯한 사람의 형태였다. 

 

나는 곧 그 사진처럼 나의 손가락 마디를 굽혀 손톱이 바닥에 밀착되도록 사진 속의 형태를 취해 보았다. 그러나 단지 혈관의 퍼런 색조만 눈에 들어올 뿐, 그것을 그대로 흉내 낼 수는 없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인위적으로 그런 상태를 찍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참으로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는, 그래서인지 아마도 그것은 어떻게 하다 보니 우연찮게 포착된 일상의 한 단면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넘겨진 몇 장의 책장 뒤에서의 <My grandma>. 그 사진은 요강에 앉아 계신 어느 늙으신 할머니의 모습으로, 주름이 가득한 너무나 많이 야윈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떠한 말로는 형언할 수 없었던 참으로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넘겨진 그다음 페이지에서 또한, 나는 다시 한번 적잖은 놀라움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그것은 충격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She is dead, now>. 제목이 말해주듯 그것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누워 계신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곤 한다. 삶에 대한 진실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래서인지 문학이나 영화, 혹은 음악과 미술에서와 같은 예술작품에 있어 인생이 묻어날 때, 우리는 때때로 명작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물론 생의 한 모퉁이인 죽음 역시 이야기나 영상, 또는 선율로 표현되거나 그림으로 형상화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통해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할머니의 죽음이 다른 예술 매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지 카메라를 통한 그 표현 방법에 있어서의 차이만 존재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 사진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물론 유사한 소재를 다룬 이청준의 <축제>라든가, 모차르트의 <레퀴엠> 등에 후한 점수를 주면서도, 유독 사진 속의 죽음에만 인색하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었다. 

 

그러나 문체나 시어를 통해, 또는 다양한 색채나 악기를 통한 다른 예술 작품에 있어서는 이러한 생활의 표현이 한 단계 여과되어 표출되고 있는 듯했지만, 사진은 그러한 것들에 비해서 훨씬 사실적이라는 느낌이 지배적이다. 물론 필름이라는 중간 단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진은 다른 어떠한 것들에 비해 그때의 이미지를 그대로 투시한다는 차이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그 충격의 이유가 될까. 설령 시각적인 감각이 우리들의 정신적 작용을 아주 크게 좌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우리들의 생활 그 자체는 물론 바로 나 자신의 발자취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의 낯섦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책의 내용은 배제한 채 사진만을 찾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My parents>. 제목으로 보아 그 사진의 주인공들은 바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나신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흐른, 1998년 11월 20일부터 12월 19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마련된 <한국사진역사전>에서 나는 그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등장한 현대 사진의 흐름을 작가의 특정 작품 위주로 보여주고 있는 제1특별전에서, 나는 한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예전에 책에서 본 바로 그 할머니의 모습. 그 사진 안에는 임종을 눈앞에 둔, 그리고 죽음이 지나가고 있는 한 삶의 마지막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진 안에서,

우리들의 삶이 되살아나고 있다

 

"할머니는 저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중심이셨어요. 3~4년을 노환으로 고생하시는 동안 매일 목욕을 시켜드리고, 진지를 수발들고, 대소변을 직접 받아냈죠. 같이 놀다가 사진을 찍기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놀기도 하고. 그 속에서의 카메라는 하나의 독립체적인 존재가 아니었어요. 할머니와 저,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일상 속의 한 흐름일 뿐이었죠. 

어떻게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그때에도 카메라의 렌즈를 돌리 수 있었냐고요? 예전에도 그러했듯이, 우리들 곁에는 항상 카메라가 있었어요. 굳이 그 장면을 연출하여 사진으로 남긴다는 그러한 거창한 의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할머니와 저의 생활 속에는 그만큼의 동등한 위치로 사진이 존재했죠. 마치 무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공기처럼요. 그때에도 마찬가지였죠.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카메라가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진과 더불어 생활하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죠. 충격이셨어요? 그러한 상황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

 

그제야 나의 혼동은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에 대한 철학요? 그런 것은 없는데~~~ 다만, 있는 그대로의 삶을 그려낼 뿐이죠. 남의 얘기가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할머니와 저의 장인, 그리고 동생. 그들은 저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사진들 또한 저의 머릿속에 가장 강한 인상으로 자리하고 있죠. 장인어른이 돌아가실 때에는, 처남이 그러더군요. 이런 다급한 상황에 촬영이 다 무엇이냐고요.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시는데, 왜 그러느냐며 화를 내더라고요. 이것은 제 동생 사진이랍니다. 몇 해전 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할머니와 함께 그는 시인이었던 동생과 장인의 사진을 건네주며, 그때를 회상하듯 잠시 자리를 떠났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오고 가던 주방의 식탁 의자에 앉은 채, 나의 눈은 집안 이곳저곳으로 방황을 시작했다. 물론 이곳 역시 작업을 위한 각종 약품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철제 선반으로 이루어진 책장에는 특이하게도 각종 들풀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빠알간 약호박에 꽂아 놓은, 각양각색의 컵과 음료수 병에 넣은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그 들풀들을 그는 좋아한다고 했다. 어디선가에서 갑자기 정적을 깨우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창가에 놓인 자그마한 새장 속에서 십자매 한 마리가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하, 혼자가 아니죠. 며칠만 지나면 대식구가 될 텐데요. 지금 저 안에서 알을 품고 있거든요."

 

다시 자리로 돌아온 그는 내 앞에 빛깔 좋은 감 한 접시를 내려놓았다. 아직 홍시가 되지는 않았지만, 흠씬 익어 먹기 좋게 말랑말랑해진 그 감은 거실 천장에서 하나의 모빌같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던 것 같다. 어려운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감 하나를 한입에 쏙 집어넣고 우물우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는 또 한 개의 감을 건넸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앞에 사진을 현상하는 곳이 있었어요. 확대기에 필름을 걸고 노광이 들어오는 가운데, 현상약에 담근 인화지에서 상이 올라오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죠. 마치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밀려오듯, 세상의 인간사들이 조용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어요. 그때 문득 사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짙다고요? 맞아요. 그것은 곧 사람들의 이야기잖아요.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내 자신을 거울에 비치듯이, 그 속에서 내 삶을 바치고 싶었어요. '저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은 바로 저러하구나.'라는 깨달음 속에서 그 삶의 지혜를 배우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사진과의 인연은, 단지 대외적으로 상을 타는 재미만에 취해 있었던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대학에 진학하면서 사진에 대한 좀 더 깊은 사고를 내재하게 된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단지 상 타는 재미에 빠져, 사진 그 자체의 여운을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그래서인지 사진 그 자체만을 공유하고 싶었어요. 여유가 생기는대로 필름을 사 모으면서, 한동안 사진만 찍기 위해 준비를 했죠. 오직 사진 하나에만 몰두하기 위해서 다른 직업은 생각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필름을 사기 위한 재료비가 필요하게 되면,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많이 빼앗기지 않는 것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는 것이 제가 찾은 최적의 수단이었죠. 그래서 모은 비용으로, 한 6개월 동안 오직 사진 하나만으로 생활하고~~~~."

 

그러던 그가 일본에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글쎄요. 가끔씩 술이 건해지면,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그렇게 말하죠. '너 참 못 된 놈이라고.' 어떻게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렌즈를 들이댈 수 있느냐고. 아무리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옷을 벗은 채 사진을 찍느냐고 말을 하죠.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찍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굳이 사진으로 담아내기 위해 시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그리 익숙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단지 변해가는 삶의 한 단면이 그 모습 그대로 사진 속에 녹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랬던 것 같아요. 사람들의 인식 속에 저는 작은 주변인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저의 작업은 그들에게 오히려 낯설었을지도 모르죠. 그런 상황에서, 많이 보고 듣고 배우면서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일본에서 사진 자체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면, 그의 미국 생활은 사진 속에 내재된 어떠한 예술성을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 사진가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죠. 많은 대화 속에 느낀 것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사진과 생활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은 곧 작품이나 사물이 너무 먼 상태에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사는 것도, 그 속에서의 작품 또한 서로 따로따로의 이미지였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는 사진작가가 많고, 일본에는 사진 프로가, 그리고 미국은 사진으로 자기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나는 아직 잘 모른다. 그리고 어떠한 작품에 대해서도 '좋다, 나쁘다'라는 말보다는, 단지 '이것은 너답지 않다'라는 표현으로 대신하는 그의 작품 세계를 나는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

 

"제 색깔요? 저 자신에게 게을러지거나, 남을 흉내 내거나 그래서 제 머릿속이 고갈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 두려울 뿐이지, 나이가 드는 것은 무섭지 않아요. 앞으로도 열심히 작업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때에는 알게 되겠죠. 제가 만들어 가는 색깔을요."

 

사진가 최광호 / "He is dead, now - 동생의 죽음"

 

그날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찻잎에서 향이 더 이상 우러나지 않을 때까지, 그리고 난로에 올려놓은 주전자의 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지금까지 항상 좋은 스승님들이 많은 가르침을 주셨거든요. 지금요?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해요. 저의 분신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사진으로 하고 싶은 것이 정말로 많거든요. 물론 그 바탕은 역시 내 안에서의 생활이 틀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저의 소신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지도교수인 제랄드 프라이어는 그가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영어 공부를 강조했다고 한다. 그런 교수에게 던진 그의 주장이 문득 떠올랐다. 

 

"사진가에게 있어 사진 이외의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사진가에게는 영어나 한국어가 아닌, 사진이라는 영상언어가 곧 모국어이며, 세계의 공통 언어가 아닐까요. 저는 영상언어의 의사소통이 서툴러 항상 답답함을 느끼지만, 영어 실력이 모자라서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에서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사진가 최광호가 자아내는 깊은 여운이었음을. 

 

사진가 최광호 교수는 1956년 강원도 강릉 출생. 오사카 예술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공하였고, 뉴욕대학원에서는 순수예술을 공부하였다. 한때 잡지사 <뿌리깊은나무>에서 사진부장으로 일한 적도 있지만,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하기 위해 사진 이외의 다른 분야에는 좀처럼 관심이 없는 듯하다. 1973년 사진의 세계로 들어와, 지금까지 줄곧 자신의 가족과 일상적인 생활사를 주제로 고민해왔다. 산 언덕 위에 나신으로 서서 정면을 바라보던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그의 가족들. 그는 말한다. '사진으로 생활하기'라고.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거기에서 다시 사진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는 우리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곧 그와 우리들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피카소와 함께 한 어느날 오후, 추리소설 같은 사진이야기

 

피카소와 함께 한 어느날 오후, 추리소설 같은 사진이야기

피카소와 함께 한 어느 날 오후 추리소설 같은 사진이야기 우리가 무엇인가를 담아내는 방법 중 가장 진실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사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breezehu.tistory.com

삶과 사랑과 죽음에 대한 서사시, 레퀴엠

 

삶과 사랑과 죽음에 대한 서사시, 레퀴엠

삶과 사랑과 죽음에 대한 서사시 REQUIEM 성악곡은 일반적으로 예술가곡과 오페라 같은 세속 음악과 미사곡, 칸타타, 레퀴엠, 모테트, 오라토리오 등과 같은 교회음악의 두 주류로 분류됩니다. 레

breezehu.tistory.com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