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백수
전국백수연대 주덕한
1998년 11월 12일, 신문과 라디오를 비롯한 모든 언론 매체에서는 이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멘트는 한결같이 웃음으로 마무리되었다. 마치 어느 지면의 유머란을 지나친 듯. 그것은 우리나라의 백수가 일본 측 주선으로 도쿄 방문 일정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전백련의 지킴이인 주덕한 씨.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전국백수연대>라는 모임을 잘 알고 있지 못했다.
일본에 다녀오셨으니, 이번에는 그들을 초청해야 되나요?
그렇지 않아도, '차기 회담장소 선정' 문제로 막판까지 합의를 이루지 못했었죠. 제가 일본으로 떠날 때에는 보름치 용돈으로 단 6만 원 밖에 가져가지 않았어도 충분했어요. 왕복 항공권은 물론 모든 숙박 비용과 용돈까지 일본 측에서 부담했죠. 신문사와 잡지사의 인터뷰에 응하다 보니, 돌아올 때에는 오히려 주머니에 30만 원이 들어 있더군요.
그걸 생각하니, 그들을 초청하면 우리가 숙박도 책임을 져야 하고~~~ 그래도 우리가 이미 도쿄 초청을 받았고, 더욱이 숙박 비용 이상의 항공요금을 그들 스스로가 부담한다고 하니~~~ 이번 봄에 한일 백수들의 모임이 서울에서 열리게 될 예정입니다.
도쿄 방문은 어떻게 이루어지셨습니까?
그동안 서로 연락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서울시 실업대책본부 상황실 자문위원인 조해정 교수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죠. 방일 시 "한국에도 청년 백수들이 있다."라는 말을 들은 일본인들이 "도쿄에도 있는데, 한 번 만나자."라는 제의를 한 것이죠. 일본의 백수 조직을 <다메렌>이라고 하는데, 그곳 회장인 가미나가를 만날 수 있었죠.
일본 백수들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한국에 비해 회원수는 적었어요. 물론 조직은 3년 전에 결성되었지만요. 그러나 일본 경제 역시 침체기가 장기화됨에 따라, 그 회원수는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하더군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특히 도시에 사는 백수는 아주 늦게 일어나죠. 교통비나 방세를 내기 위해서 최소한의 아르바이트를 해요. 약 일주일에 2~3번 정도. 그 나머지 시간들은 자기를 위해서 할애하죠. 그리고 강가에 사는 백수들을 약 일곱 명 정도 만났는데, 그들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아요. 생활은 유통기간이 지난 햄버거나 다른 식품들로 허기를 채울 뿐이죠.
관심이 집중되었던 '합의문'의 주요 내용들은 무엇이죠?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1)한-일 백수들 간의 친목도모 및 지속적인 교류 추진 2) 서울-도쿄 백수자유지대 선포 3) 올봄 서울에서 2차 회담 재개 4)'글로벌 백수네트워크' 공식 출범 5) 양국 백수들이 애용하는 주요 품목에 대한 관세 인하 및 철폐 6) 세계 주요 도시의 거점 확보 박차' 등입니다.
백수자유지대요?
시범적으로 서울과 도쿄에 선포하고자 합니다. 이 지역 내에 가맹점으로 등록된 음식점과 노래방, 인터넷 카페와 기타 편의시설에서는 가능한 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되, 단계적으로 10~15%의 할인율을 적용하는 방법도 고려하고 있죠.
그것이 실현된다면, 지금과는 생활이 많이 달라지겠죠?
그럼요. 물론 지금도 1천5백 원 하는 해장국집을 비롯, 값싼 밥집들을 거의 알고 있죠. 화장실은 어느 곳이 가장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무료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장소, 제일은행 본점은 널찍한 회의 탁자가 있기 때문에 백수들끼리 만나서 일을 하기에 최적이라는 것까지. 그러나 백수자유지대가 결정되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주요 도시의 거점을 확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죠?
내년까지 뉴욕과 파리, 런던을 비롯한 암스테르담과 로마, 나이로비, 캘커타, 방콕, 싱가포르, 바그다드, 시드니, 멕시코시티,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파울루, 모스크바, 베이징, 그리고 평양까지 전 세계 주요 도시를 초고속 정보 통신망에 연계한다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서로가 정보를 교환하고, 도움을 나눌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전국백수연대>가 출범된 과정은 어떻게 정리될까요?
이야기가 나온 것은 7년 전부터이지만,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된 것은 지난해 7월이죠. 원래는 외국인을 비롯, 약 1천5백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매스컴에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될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약 3백여 명 정도의 인원들만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장소는 서울 신촌의 '카스캐빈'이라는 카페였죠.
운영체계와 회원들의 구성은요?
19세 재수생에서부터 사업에 실패한 47세 아저씨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다양하죠. 백수끼리 만나 서로 연인 사이가 된 사람들도 있고요. 크게 정회원과 준회원, 그리고 명예회원으로 구분되죠. 준회원은 백수의 친구들이나 가족 그리고 미래가 불안한 샐러리맨들인 반면, 회원들이 잘 가는 비디오나 만화가게 주인들은 명예회원으로 모시고 있죠. 기본적으로 회비는 따로 없어요. 다만 가끔 일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내곤 하죠. 얼마 후에는 백수카드를 만들려고 해요. 백수가 아니면서 백수 같이 행세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곧 탈당시킬 계획입니다.
주장하는 기본 취지가 없지 않을 텐데요?
절대 백수를 미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잘 된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직업을 잃은 것이 크나큰 죄악을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낮에 현관 밖으로만 나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곤 하죠. 그렇다고 하여 가게에 가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저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라는 말들을 굳이 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일을 하고 싶어도 그러한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좀 더 사회적 관점에서 여유 있게 그들을 포용해야 되지 않을까요. 실업자가 되면 마치 인생 전부를 잃은 것처럼 매도하는 편견은 너무나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유롭게 포용을 한다는 의미는 무엇이죠?
최소한 3개월 정도는 그 사람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것이죠. 그 자신 스스로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운을 축적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켜봐 달라는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을 다시 한번 냉철하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니까요.
만약 그렇지 못하고 그의 삶을 추궁하게 된다면, 그는 남의 시선이 두려워 그저 단기간에 무엇이라도 이룰 마음에 급급하여, 오히려 더 큰 좌절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를 부양하지도 못하면서, 남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 아닐까요. 백수라 하여 우울해하거나,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그 기간 동안 앞으로를 위해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준비를 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 격려도 하고, 정보도 교환하면서 말입니다.
정보통신회사에 다니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하여 백수가 되셨다던데~~~
학교를 졸업하고 약 1년 3개월 정도를 다녔죠. 일이 좋아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러던 중, 사장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왠지 허망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죠. '과연 나는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 것일까? 일요일도 없이 일만 하는 내가 만약 한 달 후에 죽게 된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되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치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고, '일'만 남아 있는 듯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일주일만 쉬어 보겠다는.
불안한 생각은?
저는 버리는 것을 좋아해요. 물론 직업도 그랬나 봐요. 그리고 이 생활이 저에게는 잘 맞아요. 직장인은 시간을 열심히 할애하여 자신을 즐기지만, 저는 그러한 시테크가 만족스럽지 않아요. 틀에 박힌 생활도 불편해요. 그래서인지 저는 이사도 자주 가죠. 머문 지 한 5개월 정도가 되면, 곧 떠나기 위해 준비를 해요. 무작정 부동산 정보지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는, 단지 느낌이 좋은 역에서 내리죠. 이사 가기 3일 전, 빠르면 일주일 전 즈음에.
저희 집은 짐이 별로 없어요. 항상 떠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하니까요. 새로운 곳에서 비디오 가게 아저씨와 슈퍼 아줌마와 익숙해지는 것도 재미죠. 그러나 한 달 정도가 지나 어느 정도 친숙해지면, 조금씩 지루해져요. 제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또한 그분들이 어떻게 행동하실지 이미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생각하죠. 또 이 동네를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전백련의 취지는 참으로 많은 교훈을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덕한 씨는 왠지 화려한 백수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말로 일을 하고 싶어도 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다른 분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신다고 생각하세요? 그것은 즐기는 차원의 백수가 아니라, 곧 생계의 문제와 직결되는데요. 결혼, 아직 하지 않으셨죠? 만약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 해도, 이러한 생활이 가능하시겠어요?
지금 전백련에 백수 커플이 있어요. 그들이 결혼하고 나면, 그 답을 풀 수 있겠죠~~~.
참, '백수 탐사 대원' 선발이라는 말을 들었는데요.
네. 짧게는 6개월에서 1년 동안, 서울에서 도쿄를 거쳐 유럽까지 백수정신을 전파하자는 계획이죠. 약 3명을 공개 선발할 예정입니다. 선발 조건은 일주일 내내 방안에만 있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사람으로, 건빵 한 봉지로 3일 동안 버틸 수 있어야 하며, 처음 만난 사람도 10년을 알고 지낸 것처럼 사교성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겠습니다.
실업대책, 정부는 물론 다른 사람들이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결국은 우리들 자신들이 직접 해결해야죠. 백수로서 그 불안한 위기를 이미 극복했다면, 그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들이 당황해하지 않도록 도움을 건넬 수 있지 않을까요. 그 길이 조금은 멀고 험할지라도, 우리 전백련 회원들은 또 다른 희망을 위해 오늘을 극복할 것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또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앞두고 있다. 그 당시 그들에게도 1999년은 다가왔고, 지금은 2022년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학사전을 보면, "백수"는 '한 푼도 없는 처지에 특별히 하는 일이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쓰여 있다. 오래전 홍대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그 누구도 진지하게 <백수로 사는 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열변을 토했었다.
주덕한 1968년 출생. 성균관대 역사학과 졸업. 저서로는 <캔맥주를 마시며 생각해낸 인생을 즐기는 방법 170>과 <백수도 프로라야 살아남는다> 등. 그 당시 틈틈이 뜨개질을 배우며, 파출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프로 백수. 매스컴의 단골손님이 된 그는, <전국백수연대>의 사무총장으로, 백수들의 생활을 대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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