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카리스마적인 전율
레이니썬
RainySun
1960년대 말 뉴욕을 기점으로 루 리드와 패티 스미스, 톰 웨이츠, 토드 런그렌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작은 움직임은 1980년대에 이르러 섹스 피스톨스와 뉴욕 돌스 등을 통해 펑크와 뉴 웨이브의 오버그라운드로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색깔의 음악세계를 추구하였다는 점인데요. 그 공연활동 또한 클럽이나 카페 등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레코드는 출반 했더라도 방송 매체에 굳이 얽매이지 않았던 그들은 라이브만을 고집하는 진정한 실력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일컬어 사람들은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라고 명명합니다.
1980년대 통기타 가수들의 업소 출현이 감소하고 소비지향적인 맥주 카페가 대학가를 누비게 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언더 록밴드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그러한 흐름은 1995년, 1996년에 이르러 가속화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1999년 당시 홍대와 신촌 등지를 통해 활동하고 있는 언더 록밴드의 수는 약 100여 팀. 그들의 음악 장르는 얼터너티브를 비롯하여 메틀과 데스, 그리고 재즈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함은 물론 이들의 그룹명 역시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만큼이나 특이하면서도 이색적인 것이 그 특징이었습니다.
지극히 배제된 상업성 속에서 대중적 인기 또한 그리 연연하지 않는 그들은, 꾸준히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고집스러운 아티스트들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잔혹과 공포, 퇴폐와 관능의 음악
1999년 1월 14일, 압구정동에 위치한 <Time to Rock>은 그곳에 약 100여 명의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인하여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그중 대부분은 중고생인 듯했으며, 간혹 젊은 연인끼리 그리고 조금은 나이가 지긋한 50대 부부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공연이 시작된 저녁 8시가 넘어서자, 마치 자신들의 인상을 모든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려는 듯한 <DMZ - Corea>와 매력적인 여성 보컬의 <샌달>이 한층 최고조의 분위기를 선사했습니다. 그들 두 밴드가 뿌려놓은 흥분을 채 가라앉히기도 전에 맞게 된 짧은 휴식 시간.
남아 있는 공연을 한층 가까이에서 만끽하고자 한 명의 남학생이 무대 바로 앞 바닥에 주저앉자, 몇몇의 여학생이 경쟁이라도 하듯 자리다툼을 했고 친구들인 듯한 또 한 무리는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 옆을 점령했습니다.
조명이 하나 둘 희미해지면서 들려 나온 <Trade Fuckerness>. 팝적인 보컬 멜로디로 스래쉬 메탈적인 리프를 전면에 내세운, 레이니썬 DML 음악 중 가장 헤비메탈에 가까운 이 곡은 1인칭 화자의 동성애 성향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시종일관 내내 헤비 한 리프로 밀어붙이고 있는 이 노래가 흐르고 있는 동안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풍부한 베이스 사운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당시 군대 제대를 앞두고 있는 최태섭의 연주를 들을 수 없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들의 첫 곡에 매료되어 정신마저 잠시 주춤하고 있을 즈음, 보컬 정차식이 건넨 단 한마디는 짧고 명료했습니다. '돼지 십자가'라는 뜻의 <Pig Cross>. 곧이어 흘러나온 두 번째 곡은 전체적으로 기타가 만들어내는 군살 없는 리듬과 멜로디를 바탕으로, 콘을 연상시키는 보컬 창법에 유난히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철저한 시간 관리로 소문난 정차식이 절규하듯 반복하는 'Kill me now, With kill me now'라는 후렴구. 자신을, '조금은 난해하면서도 다중 인격의 소유자'라고 설명하는 그는 낙서처럼 써 내려가는 모든 글이 시어처럼 아름답다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말하곤 합니다. 그는 공연이 시작되고 마지막 곡을 부를 때까지, 노래와 다음 곡 사이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무릎을 곧추 세우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많이 덥네요. 다음 곡 할게요."
다른 밴드들에 비해 무척이나 간결한 그의 멘트에 이어 선택한 세 번째 곡은 <Ocean>이었습니다. 그들의 대표곡 중 하나로, 이미 독립영화 작가인 이성강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발표된 바 있는 이 곡은 동양적인 선율의 주술적인 분위기가 압도적입니다. 특히 곡 중반부부터 시작되는 저음과 가성의 보컬, 어쿠스틱 기타와 베이스, 드럼이 만들어내는 단단한 연주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기타의 김태진은 그때까지도 눈을 감고 있는 듯했습니다. 거의 일관된 무표정으로 그의 손놀림은 매우 유연하게 보였는데, 마치 연체동물처럼 등을 굽혀 지면과 직각을 이루는 듯한 자세는 가히 놀랄 만했습니다. 당시 공익근무 중이었기 때문에 헤어스타일이 매우 짧았는데, 대학교를 특차로 들어갈 만큼 학교 성적 또한 월등했다고 합니다.
그는 특히 멜로디를 읽는 음악적 능력이 남다르다고 평가되었는데, 저는 그때 '기타를 저렇게도 칠 수 있구나.'라는 감탄사에 취해 한동안 그의 손이 머무르는 기타 안에서 넋을 잃고 말았었습니다.
앨리스 인 체인스를 연상시키는 <Subtraction>과 노브레인의 보컬인 이성우가 코러스로 우정 참여하여 신선한 펑크의 에너지를 선사하고 있는 <Penitenziazite>에 이은 마지막 곡은, 제목 그대로 북한을 뜻하는 <North>였습니다. 이 곡은 1993년에 만들어진 곡으로, 도입부의 보컬 스타일이 매우 특이하여 예전부터 그것을 카피하는 밴드가 생겼을 정도로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곡이기도 했습니다.
문득 정차식과 김태진 사이로, 드럼 김대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걸어 다니는 사전'이라고 불릴 만큼 박학다식한 그는 스케이트 보드를 수준급으로 잘 탔고, 스포츠카에도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드럼을 연주할 때에는 마치 숨 쉬는 붕어처럼 입술을 물곤 했는데, 그 얼굴 표정이 무척이나 귀여웠다고 해도 실례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특히나 여성팬이 많은 듯 보였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무대를 채 내려오기도 전에 몇 명의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선물공세를 받는 것은 역시 팀의 막내인 김대현이었습니다.
레이니썬. 메탈 사운드를 기조로 헤비메탈의 직선적인 공격성을 뛰어넘어 1970년대 사이키델릭의 이상과 1990년대 그런지의 분노를 포용하고 있는 그들의 음악은 전위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색채를 품고 있습니다. 더욱이 평론가들 조차 그들의 음악을 어떠한 장르로 규정짓기 힘들어할 만큼, 그들은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고집해 오고 있었습니다.
지난 1993년에 결성되어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쳐왔던 그들은 기괴하면서도 독특한 음악성으로 조금은 파격적인, 때로는 과격적인 무대 매너로 언제나 화제를 불러일으키곤 했습니다. 자학과 이중심리 및 동성애, 신성모독 등 대부분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 그들의 주제는 인간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추악함과 더러움을 가사로 토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문득 '비 오는 태양', '흐린 태양'이라는 뜻의 레이니썬이 생각나는 저녁이었습니다. 가끔씩은 볼륨을 높여 머리를 흔들며 들을 수 있는 강렬한 음악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음악과 함께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을 향한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 색소포니스트 김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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