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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의 첼로 협주곡, 재클린 뒤 프레와 다니엘 바렌보임의 호흡

난짬뽕 2022. 5. 30.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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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클린 뒤 프레와 다니엘 바렌보임의 호흡

엘가의 첼로 협주곡

 

 

'우아한 영국의 장미'라 불리는 세계적인 여성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 그리고 3백여 곡의 레퍼토리를 언제든지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는 뛰어난 기억력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아마도 이 두 음악가의 이름을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한때 영국이 그들의 국화인 장미에 비유했던 재클린 뒤 프레는 첼로를 사랑했던 천재 연주자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첼로를 말할 때는 언제나 같이 떠올리게 되는 그녀는 13년간의 연주생활을 뒤로 14년간의 투병생활을 거쳐, 너무나 안타까운 42년을 살았습니다. 

 

전 세계의 매스컴과 팬들로부터 더 이상 받기 힘든 최고의 찬사와 사랑을 받았지만, 다발성 증후군이라는 희귀한 병으로 끝내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어느 파티에서 만난 젊은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나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고, 결국 그들은 재클린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이르렀습니다. 

 

바렌보임 역시 뛰어난 재능과 에너지를 갖고 있는 음악가였습니다. 엄청난 레퍼토리를 언제건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는 빼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으며, 6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음악계의 뛰어난 신동으로 불리고 있었으니까요. 더욱이 피아노는 물론 실내악과 지휘에까지 탁월한 전문성을 가진, 정말로 보기 드문 다재다능한 연주자였습니다. 

 

당시 뒤 프레와 바렌보임을 위해 곡을 작곡하기도 했으며, 이들 부부와 우정을 나누었던 작곡가 고어 부부는 이들의 결혼에 대해 "당시의 재키는 바닐라처럼 향기로웠고, 다니엘은 식초처럼 톡 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주 순진했고, 고집스러운 점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그녀의 그런 성격에 감동해 아주 푹 빠져있었죠."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렌보임이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뒤 프레의 부모들이 이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뒤 프레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유태교로 개종을 하고 전장으로 뛰어들어 공습 사이렌이 울리는 방공호에서도 이스라엘 군인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함께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뒤 프레가 바렌보임을 정말로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었죠. 

 

엘가의 <첼로 협주곡> Sony / 사진_ hu

 

이 앨범은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재클린 뒤 프레와 다니엘 바렌보임이 함께 녹음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입니다. 이 <첼로 협주곡>은 엘가 생전에는 그 누구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가, 재클린 뒤 프레에 의해 단숨에 첼로의 명곡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엘가가 세상을 떠난 해는 1934년. 당시 엘가의 절친한 친구이자 지휘자였던 존 바비롤리는 엘가가 세상을 떠난 지 31년 후인 1965년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뒤 프레에게 자신이 지휘를 맡고 있던 할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부탁하게 됐고, 그때 협연을 수락한 뒤 프레가 연주한 곡이 바로 <첼로 협주곡>입니다. 

 

당시 완벽한 연주로 인해 청중들은 열광했고, 이러한 공연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인해 재클린 뒤 프레라는 여류 첼리스트의 이름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게 됩니다. 또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엘가의 작곡가적 위상까지 확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논할 때면 언제나 뒤 프레의 이름이 수식어처럼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이 음반에서 느낄 수 있는 뒤 프레의 연주 테크닉과 바렌보임의 매끄러운 지휘에 대해서는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통상적으로 지휘자와 솔로 연주자는 대부분 공연에 앞선 리허설 자리에서 처음 대면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들은 부부였던 관계로 그 호흡의 조화에 있어서는 최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만 같았던 재클린 뒤 프레에게 병마가 찾아온 것은 1971년 무렵이었습니다. 몸이 무거워지고, 조금만 활동해도 쉬 피로해지며, 현을 누르는 손의 힘이 빠져나갔습니다. 뒤 프레의 예전 같지 않은 변화를 눈치챈 사람들은 여러 주장과 억측들을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많은 인기가 그녀의 정신력을 해이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에서부터 우울증에 빠졌다거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다는 말들도 오갔습니다. 1973년 뒤 프레는 의사로부터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는 중추신경을 공격하는 원인 불명의 난치병으로 확실한 치료법이 없는 병이었고, 신경의 껍질이 붕괴되어 신호를 전할 수 없게 되는 병이었죠. 

 

결국 그녀는 자신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뒤로한 채, 휠체어를 타지 않고는 거동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첼로를 연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남편 바렌보임이 아픈 그녀를 두고 다른 사랑을 위해 떠나고 만 것입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뒤 프레가 다시 재기할 수 없어 떠났다는 말도 있는데, 그녀가 홀로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뒤 프레는 자신의 병을 정신적인 문제로 여겼던 남편의 오해를 풀 수 있었다는 것에 오히려 안도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한때 재클린의 연주에 대한 평론가들의 불만은 그녀의 연주가 너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며 히스테릭하고 과장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뒤 프레의 연주를 들으면서 든 생각은, 그것은 감정 과다가 아닌 순수한 열정의 반사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가 바렌보임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했던 것처럼요. 

 

15세부터 13년 동안은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던 최고의 연주자였고, 그 후 생을 마감하기까지 14년간은 병마의 고통 속에서 혼자 외로웠을 재클린 뒤 프레. 그녀는 안면근육마저 마비되어 눈물조차 흘릴 수도 없었으며, 최후 수개월간은 거의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뒤 프레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바렌보임을 위해 그가 자신을 떠나 자유롭게 음악을 향해 날아가기를 소원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바렌보임을 선택했을 만큼 정말로 그를 사랑했으니까요. 다른 사랑과 함께 살고 있던 바렌보임은 병마에 시달리던 뒤 프레가 생을 달리 한 그다음 해에 정식으로 재혼을 합니다.

 

재클린 뒤 프레의 그 사랑이 한없이 슬프네요. 오늘 이 앨범을 들으면서, 잇몸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던 재클린 뒤 프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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