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고독 너머의 브람스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의 '3B' 음악가로 일컬어지는 요하네스 브람스를 말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슈만과 클라라를 함께 떠올린다. 물론 1853년 브람스의 나이 스무 살 때 만난 슈만과 클라라 부부는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임에 틀림없다.
브람스의 스승이 된 슈만은 당시 음악가로서의 명성도 높았고, <음악 신보>라는 음악평론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신인이었던 브람스의 이름을 알릴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또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 역시 브람스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슈만이 자살 시도를 했을 때에도,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브람스는 클라라 곁에서 그의 가족들을 돕게 된다. 브람스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람들은 클라라를 향한 마음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실제로 브람스는 1866년 작곡한 <4개의 가곡집> 가운데 '5월의 밤'이라는 노래에서 클라라를 향한 특별한 마음을 담는다.
"은빛 달빛이 숲 사이로 빛날 때, 잠결의 달빛이 초원 위에 흩날릴 때, 밤꾀꼬리가 노래할 때, 나는 슬픔에 잠겨 천천히 걷네. 나뭇잎 쌓인 곳, 한 쌍의 비둘기의 행복을 노래하네. 난 고개 돌리며 어두운 그늘을 찾네."라는 가사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애닮은 마음을 추스르는 브람스의 마음이 느껴진다.
1833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브람스는 1897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는 클라라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생을 달리 한 1년 후이다. 클라라가 위독하다는 얘기를 듣고 그녀를 만나러 가지만, 급하게 기차를 타다 보니 다른 곳으로 향하는 기차여서 클라라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는 못한다. 그로 인한 슬픔으로 인해 브람스 역시 일찍 떠나갔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브람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왠지 그 감정을 표면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아 더욱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절제된 감정이 쏟아내는 애잔한 무게감이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층 뭉클하게 만들어 버린다. 프랑수와즈 시몽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스물다섯 살의 시몽과 서른아홉 살의 폴처럼, 브람스 역시 클라라보다 열네 살 아래였다.
브람스의 어머니도 자신의 남편보다 열일곱 살 연상이었다. 브람스의 아버지인 요한 야코프 브람스는 작은 악단의 콘트라베이스와 호른 연주자였는데, 스무 살 무렵 독일 함부르크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세 들어 살던 집의 딸인 크리스티아네 니센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브람스는 아주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 했다.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브람스는 열두 살 때부터 극장에서 가수들의 반주를 하거나 술 취한 사람들이 많은 항구의 술집에서 연주를 하며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래서였을까.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의 어두운 단면과 무거움을 모두 경험했던 탓이었을까.
브람스의 음악들을 듣고 있으면 애써 치장하려는 기교음도 느껴지지 않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은 채 매우 솔직하면서도 담백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또한 듣는 이의 감정을 어루만져주거나 어설픈 위로 같은 것도 건네지 않는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브람스의 그러한 음악이 들으면 들을수록 참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브람스의 사랑과 <교향곡 3번 3악장>
브람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곡인 <피아노 소나타 C장조>를 슈만 앞에서 연주했을 때, 슈만은 1악장이 끝나자마자 브람스에게 연주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는 아내인 클라라를 부른 후, 다시 처음부터 연주하게 한다. 그날 슈만은 자신의 일기에 브람스를 '천재'라고 표현했고, 자신이 창간한 잡지에 브람스에 대한 극찬의 글을 올린다.
그 당시 조울증을 겪고 있었던 슈만은 브람스와의 만남 이후 5개월 만에 라인 강에 몸을 던진다. 간신히 구조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생을 마친 슈만. 그 후 슈만의 집안을 가족처럼 돌보게 된 브람스. 어쩌면 브람스는 클라라를 존경하고 신뢰하는,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브람스를 언급할 때에는 언제나 클라라와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말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브람스가 다른 여성들을 아예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브람스에게도 다른 사랑이 있었다. 1883년 쉰 살의 브람스는 자신의 가곡인 <운명의 여신의 노래>를 부르는 알토 가수 헤르미네 슈피스를 본 순간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거닐었죠, 둘이서 함께
저는 말이 없었고, 당신도 그랬지요
그때 그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무도 알고 싶어요
그러나 제가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그대로 접어두기로 해요
제가 하고픈 말은 오직 한 마디뿐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다웠고
천국에서처럼 너무 즐거웠다고
제 머릿속에는
그때 생각이 금방울처럼 울린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이
너무도 감미롭고 너무도 사랑스럽게
이 시는 독일 시인인 다우머의 글인데, 브람스의 가곡 <우리는 거닐었네>로 만들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가곡이 남편을 잃은 클라라에게 바치는 노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브람스의 나이 쉰한 살에 만들어진 것을 보면 자신의 나이 쉰 살에 만나 마음을 빼앗겨버린 헤르미네 슈피스를 위한 노래가 아니었을까 싶다.
브람스를 처음 만났을 때의 헤르미네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로, 나이차가 24년이나 되었다. 우울하고 진중한 브람스는 헤르미네와 함께 있을 때에는 밝은 표정의 얼굴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브람스는 그녀와의 결혼을 고민했을 정도로 헤르미네에게 빠져 있었다. 그러나 헤르미네는 그런 브람스의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예술가로서는 존경하지만, 남편으로는 마음이 열리지 않았던 것. 그래서 사람들에게 브람스와는 스승과 제자 사이일 뿐이라고 말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아픈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곡이 바로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이다.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흘러나오는 OST는 <교향곡 3번 3악장>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헤르미네에게 느꼈던 감정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교향곡 3번>이라고도 한다.
첼로 선율로 다가가는 브람스의 마음은 바이올린과 플루트, 클라리넷으로 이어지며 다가갈 수 없는 현실의 슬픔을 안겨준다. 그리고는 곧이어 호른의 따스한 음으로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다. 그러나 다시 바이올린과 플루트의 선율이 이제는 그만 마음을 접으라고 말해주는 듯한, 브람스의 <교향곡 3번 3악장>.
3부 형식으로 된 3악장은 전곡을 듣는 데에만 6분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꼭 한번 들어보셨으면 좋겠다. 연주를 듣다 보면 호른을 제외한 금관악기와 타악기는 사용하지 않은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향곡 3번>의 총 연주시간 역시 34분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브람스의 교향곡은 다른 작곡가에 비해 여러 선율들이 동시에 어우러져 처음에는 조금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반복해서 몇 번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선율 속의 선율들이 하나하나 뚜렷하게 들리면서 음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브람스의 음악을 두고 어느 때부터인가 가을에 잘 어울린다는 말을 공식처럼 하고 있지만, 나는 그 말에 공감할 수 없다. 어느 계절, 어느 순간에 들어도 브람스의 음악은 좋다. 굳이 나만의 수식어를 첨부하자면 어른이 된 즈음에,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음에 스며드는 농도가 짙어진다는 것. 그것이 바로 브람스의 음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 교향곡 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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