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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소설 <구의 증명>,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 했다

난짬뽕 2023. 7. 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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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구의 증명>은 지난 2015년에 발표된 최진영 소설가의 작품이다. 처음에 발표되었을 때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2020년부터 입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하여 화제를 모았다.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라는 문구로 인해, 이 소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엽기적'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최진영 소설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지난날, 애인과 같이 있을 때면 그의 살을 손가락으로 뚝뚝 뜯어 오물오물 씹어 먹는 상상을 하다 혼자 좋아 웃곤 했다. 상상 속 애인의 살은 찹쌀떡처럼 쫄깃하고 달았다.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하는 사랑. 그런 사랑을 가능케 하는 상상. 글을 쓰면서 그 시절을 종종 돌아봤다."라고 말하고 있다. 

 

연인의 죽음 앞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애도하는 방법으로 그의 살을 먹는다니, 책장을 넘기면서도 '아니, 이것은 뭐지?'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런데 이러한 작가의 괴이한 상상력이 어느 순간 좀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울 수도 없는 그 마음. 죽은 연인의 살점을 먹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잔인한 현실에 화가 나기도 했다. 

 

구의 증명
  • 지은이: 최진영
  • 펴낸곳: (주)은행나무
  • 1판 1쇄 발행 2015년 3월 30일

구의 증명, 줄거리

어릴 적 여덟 살, 아홉 살 때 두 번이나 같은 반이었던 구와 담. 언제나 담을 괴롭히는 구였지만, 그런 구가 밉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게 된 담. 어느 순간 그 둘은 서로를 의지하게 된다. 서로가 전부였던 구와 담은 그저 서로를 사랑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지만, 가진 것 없는 처지의 두 사람에게는 그것도 사치였다. 부모에 대한 기억 없이 이모와 함께 산 담과 부모님의 빚을 짊어진 구. 엄청난 빚을 아들에게 남긴 채 도망가버린 부모로 인해 구는 아무리 애써봐도 빚의 이자조차도 갚지 못하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만다. 결국 사채업자들에 의해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담은 그렇게 죽어간 연인을 깨끗이 씻긴 후 구를 먹으려고 한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구의 증명, 책 속의 문장들

너는 알까?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모를까? 네가 모른다면 나는 너무 서럽다. 죽음보다 서럽다. 너를 보지 못하고 너를 생각하다 나는 죽었다. 너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 했다. p 16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더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지금 이해할 수 없다고 묻고 또 물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기다리지 못하는 건 죄가 되기도 한다고. p 23

 

죽으면 알 수 있을까 싶었다. 살아서는 답을 내리지 못한 것들, 죽으면 자연스레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모르겠다. 살아서 몰랐던 건 죽어서도 모른다. 차이가 있다면, 죽은 뒤에는 모른다고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것뿐.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게 된다. 그것 자체로 완성. p 33

 

몸 안에 방음벽이라도 두른 것 같았다. 그 벽에 걸러져 밖의 소리도 잘 들어가지도 않고 내면의 소리도 퍼져나오지도 않았다.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마음이 아팠고 안달이 났다. 나에게만은 그러지 않으면 좋겠는데. 위험한 세상 대하듯 나를 대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p 59

 

넌 이담에 뭐가 될래? 난 이담에 좋은 아빠가 될 거야. 노마의 대답이었다. 좋은 아빠? 응. 울트라 캡숑 아빠. 어떤 아빠가 울트라 캡숑인데? 노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울트라 캡숑 남편이 울트라 캡숑 아빠지. p 74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조차 참고 살았다. 그 질문이 불러오는 온갖 감정을 참고 살았다. 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버거웠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울 때에도 딱딱한 돈 무덤에 걸려 넘어졌다. 미래에 대한 내 근육은 한없이 느슨하고 무기력했다.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p 90

 

누나 나이쯤 되면 계산적으로 이성을 만나게 된다고. 만나자마자 서로의 처지와 조건을 재고 따져서 견적내기 바쁘다고. 그런 만남을 반복하다보면 스스로 상품이 된 것 같고 상대 역시 상품처럼 대하게 된다고. 과정을 함께하며 서로의 됨됨이를 알아가는 걸 번거로워하고, 결과로 남은 것만 보려 한다고. p 119

 

지금의 인간은 미개하지 않은가. 돈으로 목숨을 사고팔며 계급을 짓는 지금은. 돈은 힘인가. 약육강식의 강에 해당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동물의 힘은 유전된다. 유전된 힘으로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는다. 불과 도구 없이도, 다리와 턱뼈와 이빨만으로. 인간의 돈도 유전된다. 유전된 돈으로 돈 없는 자를 잡아먹는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있는 사람도 살지 못하고, 돈이 있으면 죽어 마땅한 사람도 기세 좋게 살아간다. p 164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p 167

 

그러니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나를 기억하며 오래도록 살아주기를. 그렇게 오래오래 너를 지켜볼 수 있기를. 살고 살다 늙어버린 몸을 더는 견디지 못해 결국 너마저 죽는 날, 그렇게 되는 날, 그제야 우리 같이 기대해보자. 너와 내가 혼으로든 다른 몸으로든 다시 만나길. 네가 바라고 내가 바라듯, 네가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은 후에, 그때에야 우리 같이. p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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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의 증명, 안타까운 문장들 

우리 몸에 새겨진 기억과 추억 같은 것 / 그 질문이 불행하고 잔인해서 울고 싶었다 / 괴로움 없는 사랑은 없다 /  나는 나와 비슷하게 작은 구가 좋았다. 더 높거나 낮지 않게, 비슷한 눈높이로 세상을 보는 것만 같아서 / 이번 생은 빨리 감기로 돌려주세요 /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저자 최진영 소개

<구의 증명> 저자 최진영은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은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구의 증명> <해가 지는 곳으로> <이제야 언니에게> <내가 되는 꿈>, 소설집 <팽이> <겨울방학>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한겨레문학상, 만해문학상을 수상했고, 2023년에는 <홈 스위트 홈>으로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구의 증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죽은 연인의 살점'을 먹는다는 설정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 작가 최진영 소설가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작가는 예전부터 연인의 살을 똑똑 떼어먹는 상상을 하는 편이라서 그것을 스스로 엽기적인 상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만큼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상상에 가까웠다는 말을 했다. 

 

물론 그것이 몸 전체는 아닐 것이고, 손톱이나 머리카락 등으로 어느 정도의 은유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이런 상상을 소설 속에서 보여준 것은 현대사회가 경제적인 부를 얻지 못한 어려운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일침이기도 하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생명이나 죽음까지 돈에 의해 결정되는 현실. 돈이면 무엇이든 다 된다는 그런 불합리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죽어서도 편안하게 잠들 수 없는 불평등한 가치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특히 화가 났던 것은 구의 부모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빚을 물려주고, 심지어는 아들이 군 제대 후 돌아오자 보증인으로 내세워 더 많은 빚을 떠넘긴 채 아빠엄마라는 사람들은 도망을 가버린다. 구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좋아하는 담을 떠나보내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물론 짧은 이별 사이에서도 서로를 아끼고 그리워한 구와 담은 다시 만나게 되지만, 자식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짐을 넘기는 것도 화가 나는데 자신들만 살겠다고 아들만 남겨둔 채 도망까지 가버린 구의 부모를 보니 말할 수 없는 충격이 느껴졌다. 

 

인육을 먹는다는 표현이 있지만, 이 소설이 전체적으로 엽기적인 것은 아니다. 죽은 사람의 장기까지 빼간다는 사채업자들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담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들의 삶이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책임한 부모로 인해 망가지고,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희망이 없을까. 그냥 둘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었던 구와 담의 인생이 안타깝다. 정말로 자식에게 짐이 되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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