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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수많은 관계 속의 개인에 대하여

난짬뽕 2023. 9. 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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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나의 결핍을 안고서 그것을 너무 미워하지도, 너무 가여워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슬프면 슬프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

최은영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자신이 지금 바로 그런 일을 하는 중인 것 같다는 말을 한다. "더 진실하기를, 더 치열하기를, 더 용기 있기를" 말하고 있는 그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으면서, 나는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저 문장이 최은영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문학동네)는 각종 잡지에 발표했던 최은영 작가의 중단편 작품 7편을 엮은 소설집이다. 정부의 과잉 진압으로 참사가 일어난 용산을 배경으로 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비롯하여 교지 편집부 활동을 하며 가까워진 여학생 세 명의 관계를 그린 '몫',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일 년', 언니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답신'은 사회적인 문제 앞에서 한계를 느끼게 되는 개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 비해 '파종'과 '이모에게',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는 조금 더 특별한 가족 간의 관계를 통해 개인의 아픔과 상처, 위로에 대해 접근한다. 최은영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와 사회적인 문제 속에서 한 개인이 겪게 되는 불합리한 모습들에 대해 언성을 높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독자의 시선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강도로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의 근간에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숨겨진 진실을 보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용기 있게 나아가보자는 말을 하고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가 갖고 있는 기억들에 대한 강한 울림들이 모두 힘을 잃어갈지라도, 단 한줄기의 희미한 빛이라도 있다면 희망을 간직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그것은 아마도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현실을 버텨내고 견뎌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은영 작가

2013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장편소설 <밝은 밤>, 짧은 소설 <애쓰지 않아도>가 있다. 허균문학작가상, 김준성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이해조소설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대산문학상과 제5회, 제8회, 제1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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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소설집 내용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은행을 그만두고 스물일곱 나이에 영문학과 편입생이 된 희원은 지적인 자극을 주는 젊은 강사 '그녀'에게 매료되지만, 곧 복잡한 어긋남을 경험하게 된다. 다시 9년이란 시간이 흘러 그녀의 위치가 되었을 때, 희원은 자신에게 상처가 되었던 그녀의 말에 대해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 도서관 앞에 쌓인 교지에서 선배 정윤의 글에 마음을 빼앗긴 스무 살 해진이 교지 편집부에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해진은 날카로운 글을 쓰는 동기 희영에 압도되고, 여성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논쟁이 첨예해지면서 해진과 희영, 선배 정윤은 돈독했던 사이가 점점 멀어진다. 

일 년: 동갑내기 인턴 다희와 카풀을 하면서 전혀 다른 대화를 나누는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를 상기시킨다.

답신: 엄마가 집을 나간 뒤 부모 역할을 해온 언니와 그 언니가 무시당하는 현실과 맞서려는 '나'의 모습을 그려낸다.

파종: 텃밭을 배경으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하여 자신을 보살펴준 오빠와, 그러한 오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여동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모에게: 작고한 이모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여온 조카의 관계를 그린 작품. 

사라지는 또 사라지지 않는: 식모 출신 기남은 홍콩에 살고 있는 작은딸 우경을 만나기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난다. 기남은 우경과 손자 마이클과 함께 홍콩 시내에 구경 갔다가 실수를 저지르고는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일곱 살 손자 마이클이 부끄러워도 된다며 말하자, 기남은 그 말을 통해 그동안의 고단했던 자신의 삶에 대해 위로받게 된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책 속의 문장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하던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가 잔인함을 잔인함이라고 말하고, 저항을 저항이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 내 마음도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날것 그대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덜 외로워졌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그럴 수 없었던, 그러지 않았던 내 비겁함을 동시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 31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p 44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p 52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p 108

하지만 그게 그때 우리가 솔직하지 않았던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아.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 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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